고려의 성립과 발전

 

 

 

수덕사 대웅전|충남 예산 1308년(충렬왕 34)에 건립한 형태미가

뛰어난 목조 건물이다.

 철조석가여래 좌상(국립 중앙 박물관)│통일 신라 시대의 불상 양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초기의 철불이다.

 

 

1  고려의 발전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후 통일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사회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성종 때에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내세우고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체제의 기반을 다졌다. 고려는 건국 직후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고려 성균관 명륜당|경기 개성 고려의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이

                                                                        고려 후기에는 성균관으로 명칭이 바꾸었다.

 

현릉|경기 개풍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능이다

진남루|평북 구성 10세기 말부터 거란의 침입을 막아 낸 귀주성의 성문이다.

 

[1]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는?

 

고려의 건국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우세한 군사력으로 신라를 압박하였다. 한편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꾸었다. 태봉은 한때 지금의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의 일부까지 영역을 넓혀 세력을 떨쳤다. 그리하여 태봉, 후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였다.

 

강사진(姜思進) 판문하평장사

강기장(姜起章)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강구만(姜九萬)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

 

918년 고려 태조 1년

  ◇6월-왕건(王建),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함

 

 919년

  고려, 송악(松岳)으로 천도. 3성(省) 등 관제를 정함. 평양성을 축성.

 

 

  

 

  

  송악 출신의 왕건은 궁예의 신하였는데 후백제의 배후 지역인 금성(나주)을 점령하는  등 큰공을 세워 시중의 지위 에 올랐다. 반면에 궁예는 미륵불로 자칭하면서 주변 사람을 의심하고 실정(失政)을 거듭하여 민심을 잃어 갔다.

  이에 신하들이 궁예를 내쫓고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왕건은 나라 이름을 고려로 고치고 연호를 천수라 하였으며(918년), 이듬해에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후삼국의 통일

  왕건은 견훤이나 궁예와는 달리 확고한 토착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군대의 규율을 엄하게 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므로 곳곳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신라 말의 혼란 속에서 가혹한 세금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세금을 줄이는 등 민심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후백제를 공격하는 한편, 신라에 대해서는 화친 정책을 썼다. 후백제의 공격으로 쇠약해진 신라의 경순왕은 더 이상 국가를 보전할 수 없어 스스로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었다(935년).

 

강극술(姜極述)

강보능(姜甫能) 원윤(元尹)

 

924년

  신라, 경명왕 죽고(?∼), 경애왕(景哀王) 즉위(∼927).

 

926년 고려 태조 9/신라 경애왕 3년

  ◇2월-발해의 103성이 모두 거란에 점령되어 발해 멸망.

 

927년 고려 태조 10/신라 경애왕 4년

  ◇11월-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금성(金城)의 왕궁에 침입. 경애왕을 자살케 하고 경순왕을 세움. 견훤이 고려에 국서(國書)를 보내어 강화를 청함.

 

934년 태조 17년/신라 경순왕 8년

  ◇7월-발해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수 만 군중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하였다.

  ◇고려, 운주(運州)에서 후백제군을 격파. 웅진(熊津) 이북 30여 성이 항복.

 

935년 태조 18년/신라 경순왕 9년

  ◇3월-후백제, 신검(神劍)이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하고 왕이 됨.

  ◇6월-견훤이 나주(羅州)로 도망하여 고려에 투항하였다.  

  ◇12월-경순왕이 고려에 투항, 신라가 멸망하였다.

 

  한편,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의 큰아들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왕위를 빼앗자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로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고려는 신검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년).  

 금산사|전북 김제  견훤은 왕위 계승 문제로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

태조의 정책

  태조가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이 토대 위에서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태조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마침내 통 일을 달성하였다. 통일을 위해 태조가추구한 정책의 방향은 다음과 같았다.

  태조는 건국 직후부터 북방 진출을 꾀하여 북진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나라 이름도 옛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고려(高麗)라 하였다. 태조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중시하여 이곳을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태조는 이곳에 자주 들러서 북방 지역을 순시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또,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한 거란을 무도한 나라로 여기고 적대시하였다. 이러한 북진 정책은 뒤에 압록강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936년

  고려의 후삼국 통일, 태조가 일이천(一利川)에서 후백제의 신검을 대파, 신검이 항복하여 후백제 멸망.

 938년

  탐라국이 고려에 조공.

940년

  경주(慶州)에 대도독부(大都督府) 설치. 역분전제(役分田制)를 실시.

943년

  태조,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친히 전함. 태조 죽고(877∼), 혜종(惠宗) 즉위(∼946).

945년 혜종 2년

  ◇9월-혜종이 죽고(?∼), 왕의 아우 왕요(王堯)가 즉위(∼950)하여 왕규(王規), 박술희(朴述熙)를 죽임.

947년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여 30만 거란군을 대비하였다.

948년 고려 정종 3년

  강은천(姜殷川) 출생,  뒤에 강감찬(姜邯贊)으로 개명(改名)하였다. 

 

 

 

 

 태조는 지방 세력을 포섭하기 위하여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기도 하고, 그들에게 관직과 토지를 주거나 성씨를 내리는 등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민족 통합을 위하여 다양한 지방 세력을 지배 세력으로 받아들였다. 이들 가운데는 통일 신라뿐만 아니라, 옛 고구려나 백제 출신의 지방 세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태조는 발해의 유민들까지 적극적으로 포섭하였고, 이들을 고려의 지배 세력으로 참여시켰다.

   태조는 불교, 유교, 도교, 풍수지리설 등 다양한 사상이 공존하게 하는 정책을 펼치고자 하였다. 또,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그대로 따르지 말고 우리의 풍속에 맞게 수용하라고 하여 개방적이면서도 주체적인 관점에서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949년 고려 정종 4년

  ◇3월-정종 죽음(923∼), 왕의 아우 왕소(王昭)가 즉위하였다.

963년 고려 광종 14년

  강민첨(姜民瞻) 출생

978년 고려 경종 3년

  ◇4월-김부(金傅-경순왕) 죽음

983년 고려 성종 2년

  ◇12월-평대(平臺)에 친히 나아가 복시(覆試)하고 강은천(姜殷川)에게 갑과 급제를 내려 주었다.

  

<현충사와 강감찬 장군의 묘>

 

고려 건국의 의의

  후삼국 통일의 의의는 단순히 고려가 다른 두 나라를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다는데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계기로 한민족이 완전하게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에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큰 의의를 지닌다. 따라서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 왕조를 수립한 고려는 우리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

  통일 신라 말기부터 성장한 지방 세력이 고려 왕조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고려 건국의 주역은 왕건(王建)을 포함한 지방 세력이었다.

  고려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여 개방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민족 문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민족 통일의 출발점이라면,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옛 삼국 출신의 다양한 세력과 발해인까지 포용한 실질적인 민족 통일의 완성이었다.

 

994년 성종 13년

  ◇윤 10월-서희가 여진을 물리치고 장흥, 귀화의 2진(鎭) 및 곽주 구주성을 쌓음

 998년 목종 1년

  ◇7월-서희 죽음, 강주재(姜周載)<계보 미상> 은사를 입고 갑과 급제하였다.

  ◇12월 강현(姜顯)<계보 미상> 문과에 급제하였다.

1009년 목종 12년

  ◇2월-강조(康兆), 목종을 폐하고 대량원군을 순(詢)을 왕으로 세움

1010년 현종 1년 11월

  ◇11월-강주재(姜周載) 기거랑이 되어 거란에 동지(冬至)를 하례했다.

  ◇거란주가 장군 소응을 보내와 친히 쳐들어 올 것을 알리고, 내침하여  강조(康兆)를 죽임.

  ◇강감찬(姜邯贊)이 지공거(知貢擧 ; 고시관)가 되어 진사를 뽑았다.

 

 

[2] 고려의 정치 제도 정비 과정은?

 

왕권의 안정

  혜종이 즉위하자, 여러 왕자와 외척들 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이에 정종은 왕권에 위협적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서경 천도를 추진하였다.

  정종의 뒤를 이은 광종은 여러 가지 시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펴 왕권을 안정시켰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던 노비들을 양인(良人)으로 해방하였다. 이 정책은 호족 세력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켜 왕권 강화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과거 제도를 시행하여 유교의 학식과 능력에 따라 새로운 인재를 채용하고, 이들을 국왕에게 충성하는 관료로 삼아 정치와 행정의 실무를 맡겼다. 광종은 이러한 정책에 불만을 가진 공신과 호족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는데, 그에 따라 중앙에서 이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성종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 정치 사상을 통치의 근본 이념으로 삼고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1011년 현종 2년

  ◇1월-거란군이 개성에 입성, 왕은 나주(羅州)로 몽진, 거란군이 물러갔다.

  ◇6월-강감찬(姜邯贊) 한림학사로 승지가 되었다.

 1012년 현종 3년

  ◇5월-동여진이 청하, 영일, 장기현에 침략하니 도부서(都府署)의 강민첨(姜民瞻), 문연 등을 보내 주군(州郡)의 병사를 독려하여 적을 격퇴시킴.

  ◇6월-감찰어사 이인택(李仁澤)과 동북면 행영병사(東北面行營兵使) 강감찬이 서로 틈이 생겨 비난하기를 그치지 않거늘 이인택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1014년 현종 5년

  ◇5월-중추사 강감찬(姜邯贊)이 청하기를 "사직단을 수축하고 예사(禮司)로 하여금 의주(儀註)를 찬정(撰定)토록 하소서."라 하니 이를 듣고 따랐다.

  ◇흥화진(興化鎭)에서 거란군 격퇴.

 1015년 현종 6년

  ◇1월-거란군이 흥화진·통주(通州) · 용주(龍州)에 침입.

 

정치 제도의 정비

  고려의 중앙 정치 기구는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받아들였지만, 고려의 실정에 맞게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친 중서 문하성과 상서성의 2성(省)으로 운영하였다. 중서 문하성은 국정 전반을 관장하고 정책을 심의, 결정하였고 상서성은 6부를 거느리고 행정을 담당하였다.

  이 밖에 중추원, 어사대, 삼사(三司) 등의 관청을 두었다. 한편, 중서 문하성과 중추원에 소속된 고관이 함께 모여 국방문제와 같은 중요한 정책을 의논하는 도병마사(都兵馬司)라는 회의 기구도 있었다.

  고려 초기의 지방 행정은 중앙 정부가 인정한 지방 세력이 주로 맡았으나, 점차 중앙 정부가 지방을 장악하면서 성종 때에는 12목(牧)을 설치하고,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가 수령으로 내려가 지방 행정을 맡았다. 이에 따라 지방 제도도 점차 정비되어 현종 때에 그 골격이 완성되었다.

  고려는 전국을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누었다. 이민족과 국경을 이룬 지역을 각각 동계(東界)와 북계(北界)라 부르고 양계(兩界) 지역이라 하였다. 이 지역의 주요한 군사 요충지에는 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방어군, 진 등의 군사적인 행정 기구를 두었다.

 

1016년 현종 7년

  ◇1월-강민첨(姜民瞻)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을 삼았다. 거란의 야율세광 등이 곽주에 침입하였다.

  ◇병부가 주청하기를 "낭장 강효(姜孝)<계보 미상>등 76인에게 청컨대 작 1급씩 더  하여 국경을 수비한 공을 상주소서" 하니 이를 받아들였다.

 

1018년 현종 9년

  ◇5월-강감찬(姜邯贊)으로서 서경유수(西京留守)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삼았다.

  ◇10월-강감찬(姜邯贊)으로서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삼았다.

  ◇12월-거란의 소배압이 10만군으로 침입하였다. 강감찬(姜邯贊)으로서 상원수(上元帥), 강민첨(姜民瞻)으로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흥화진에 이르러 크게 싸워 이기니<귀주대첩> 소배압(蕭排押)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서울로 나아가려 하거늘 강민첨(姜民瞻)이 자주(慈州)에서 추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자주대첩> 

 

  수도인 개경과 주변의 군, 현을 묶어경기 지역이라 하였다. 또,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西京),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동경(東京)이라 하여 개경과 함께 3경(京)이라 하였다.

  양계(兩界) 이남 지역은 5도로 나누었는데, 그 중에서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한 지역에는 목(牧)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군(郡), 현(縣) 등을 두었다.

  이러한 여러 행정 단위에는 수령을 파견했는데, 수령은 행정 단위의 격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였다.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屬縣)은 수령이 파견된 주현의 행정 지배를 받았다.

  뒤떨어진 지역을 개발하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기 위해 향, 부곡, 소 등의 특수 행정 구역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수륙의 요충지에는 진(鎭)과 역(驛)이라는 교통 행정 기관을 두었다.

 

  

 

 

1019년 현종 10년

  ◇2월-거란병이 귀주(龜州)를 통과할 때 강감찬(姜邯贊) 등이 맞아 싸워 크게 패배시키니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 천 명이었다.

  ◇강감찬(姜邯贊)이 개선하니 왕이 친히 영파역(迎波驛)에서 맞이하였다.

   ◇3월-강민첨(姜民瞻)을 응양 상장군(鷹揚上將軍) 주국(柱國)으로 삼았다.

   ◇11월-강감찬(姜邯贊)으로서 문하시랑(門下侍郞) 동내사 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로 삼았다.

   ◇12월-강민첨(姜民瞻)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삼았다.

 

1020년 현종 11년

  ◇3월-강민첨(姜民瞻)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삼았다.

  ◇4월-왕이 임간하여 문하시랑 최사위와 지중추사(知中樞事) 강민첨(姜民瞻)을 보내어 아들 흠(欽)을 책하여 연경군(延慶君)으로 봉하였다. 

 

  하나의 주현에는 여러 개의 속현과 향, 부곡, 소 등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넓은 행정 단위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과거에 합격한 자를 속관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보좌하게 하였다. 지방 행정의 실무는 속관과 향리층(鄕吏層)이 담당하였다.

  군대는 중앙의 2군 6위와 지방의 주현군으로 이루어졌다. 2군은 왕궁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고, 6위는 개경과 국경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지방의 주현군은 치안 업무와 잡역을 맡았고, 양계의 상비군은 변경 지역의 방비를 맡았다.  

 

교육과 과거 제도

  고려 시대에는 문관을 뽑는 과거 시험으로 제술과와 명경과가 있었다. 또 과거 외에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이나 고위 관료의 자제를 시험 없이 관리로 뽑는 음서(蔭敍) 제도도 발달하였다. 그 밖에 기술관을 뽑는 잡과와 승직자를 뽑기 위한 승과도 있었다. 한편, 무관을 뽑는 무과는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무예나 신체 조건이 뛰어난 사람을 따로 뽑아 무반으로 충원하였다.

  고려는 일찍부터 개경과 서경에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장차 나라를 이끌어 갈 능력이 있는 관료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개경에는 국자감(國子監), 지방에는 향교를 세웠다.

 

 

 

 

 

 

1021년 현종 12년

  ◇5월-강감찬(姜邯贊), 흥국사 석탑을 쌓음

  ◇11월-지중추사(知中樞事) 병부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이 졸(卒)하였다.

1030년 현종 21년

  ◇5월-강감찬(姜邯贊)에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더하였다.

1031년 덕종 즉위년

  ◇6월-강감찬(姜邯贊)으로 검교태사시중(檢校太師侍中)을 삼았다.

  ◇8월-시중(侍中)으로 치사(致仕)한 강감찬(姜邯贊)이 졸(卒)하매 3일동안 철조하고 인헌(仁憲)이라 시호를 내리고 문무 양반에게 명하여 회장(會葬)케 하고 조뢰(弔賴) 부증(賻贈)하여 예를 더 하였다.

1033년 덕종 2년

  ◇10월-강감찬에게 대승(大丞)을 최항(崔沆)에게 정광(正匡)을 추증하였다.

1034년

    ◇덕종 죽고(1016∼), 정종(靖宗) 즉위(∼1046).

안국사 경내 석탑|서울 봉천동 인헌공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에 세워진 사리 석탑이다

 

[3] 고려의 북진 정책이 거둔 성과는?

 동북 아시아의 정세

  10세기 초, 중국 대륙과 만주, 한반도에는 크고 작은 여러 왕조가 들어섰으나 이후 송나라, 거란, 고려가 각 지역의 강력한 통일 왕조로 등장하여 동북 아시아 세계를 주도하는 다원적인 국제 질서가 형성되었다.

  거란이 만리장성 이북 지역을 점령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거란의 북진정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은 사신을 보내어 고려와 친교를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야만의 나라로 여겨 이를 거절하였다.

  한편, 송나라와 거란은 중국 대륙의 패권을 둘러싸고 대치하고 있었다. 거란은 고려가 송과 연합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송나라는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관계 개선을 꾀하였다. 고려는 이러한 대륙의 정세를 이용하여 외교적으로 송과 관계를  맺고  거란을 견제하였다. 정종 때에는 광군을 조직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국경 지대에 성을 쌓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1037년

  거란의 병선이 압록강에 침입.

1044년

  장주(長州)·정주(定州)·원흥진(元興鎭)에 축성함으로써 천리장성 완성.

1046년

  정종 죽고(1028∼), 문종(文宗) 즉위(∼1083).

1049년

  동번(東蕃) 해적이 임도현(臨道縣)에 침입. 동여진 해적이 금양현(金壤縣) 진명(鎭溟)에 침입. 소굴을 소탕함.

1055년

  최충(崔沖)이 사학(私學)을 일으킴(12公徒).

 

1058년

  승려 해린(海鱗)을 국사(國師)로, 난원(爛圓)을 왕사(王師)로 함. 사면기광군(四面奇光軍)을 설치. 

     강동 6주와 천리장성

 

거란의 침입과 격퇴

  거란의 원래 공격 목표는 송나라였다. 그러나 먼저 배후 세력을 없애기 위하여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을 정벌하고, 이어서 성종 때 고려를 침략해 왔다. 거란이 1차로 침입했을 때 고려 조정에서는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주고 화평을 맺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거란의 침략 의도가 고려와 송과의 관계를 끊는데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서희(徐熙)는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서희는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는 대신 거란으로 가는 길목인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을 돌려 받기로 하고 화약을 맺었다.

  고려는 이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 내고 6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강동 6주를 회복하였고,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대하였다. 거란은 나중에 이 지역이 전략의 요충지임을 알고 반환을 요구했으나 고려는 거부하였다.

  그 후, 거란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킨 강조(康兆)의 정변을 트집 잡아 다시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였다. 거란의 2차 침입 때에는 개경이 함락되기도 하였으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강화를 맺고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3차 침입 때에는 강감찬(姜邯贊)이 지휘한 고려군이 귀주(龜州)에서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1019년). 이 승리를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

 

1060년 문종 14년

  ◇8월-좌부승선(左副承宣) 강원광(姜源廣), 좌습유 최석 등에게 가을 장마로 인해 화기를 잃은 죄인들을 돌보게 하였다.

1061년

  내사령(內史令)을 중서령(中書令)으로,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으로 고침.

1062년

  호경(鎬京)을 다시 서경으로 고침.

1063년

  국자감의 규율과 직제를 정비 강화. 거란, '대장경(大藏經)'을 보내옴.

1066년

  거란, 국호를 요(遼)로 고침.

1067년 문종 21년

  ◇3월-임금이 말하기를 "고 문하시중 최항, 강감찬과 참지정사 김맹은 청절과 직도로 여러 왕대를 역보하여 그 공이 방책 문서에 실려 있고 이제 사이가 편안하고 안락하여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게 됨은 모두가 제공들의 힘인지라 가히 최항과 강감찬은 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中書令)을 김맹은 태자태사 문하시중을 추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의천(義天)을 우세승통(祐世僧統)으로 삼음. 흥왕사(興王寺) 준공.

 

   이후 두 나라는 전쟁을 중단하고 강화를 맺어 사신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방 강화에 힘썼다. 현종 때에는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주위에 나성을 쌓았고, 그후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아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동북 9성의 축조

  12세기에 거란이 쇠퇴하자 여진족이 동북 아시아 지역에서 점차 강성하기 시작하였다. 여진족은 원래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말과 화살 등을 바쳤  

 

강사미(姜士美) 문서비서감(文書秘書監)

강희경(姜希經) 문하시중(門下侍中)

강행경(姜行經) <인헌공의 아들> 사재경(司宰卿) 역임

강단(姜旦) <은렬공의 아들> 태자태부(太子太傅) 역임.

 

1068년 문종 22년

  ◇8월-강원광(姜源廣)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양주(楊州)를 남경(南京)으로 하고 신궁을 건립. 최충(崔沖)이 구제학당(九齊學堂) 건립.

 

1070년 문종 24년

  ◇8월-문종 19년 왕자 후(煦=義天)에 이어 왕자 징이 중이 됨 

  

은렬공 유허지|경남 진주

 

고, 고려는 식량과 농기구 등을 주어 그들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완옌부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그 세력이 천리장성 부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는 숙종 때 윤관(尹琯)의 지휘 아래 여진 정벌군을 파견하였으나실패하자, 별무반이라는 특별 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리하여 예종 때 윤관은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면 지역에 9성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이 간청하는 데다 방비하기도 어려워 9성을 돌려주었다.

  그 뒤 강성해진 여진족은 금(金)을 세우고 거란을 공격하였다. 거란은 금과 싸우기 위해 고려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고려는 이를 거절하고 금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여 거란이 점령했던 압록강 유역의 보주(의주)를 획득하였다.

 

강항(姜恒)<은열공 손자>

강보(姜輔)<은열공 손자>  

 

1070년 문종 24년

  ◇어사대부(御史大夫) 강원광(姜源廣)이 졸(卒)하였다.

1071년 문종 25년

  ◇3월-강원광(姜源廣)을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추증하였다.

  ◇김제(金悌)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국교를 회복.

 

1073년

  동여진 15주, 서여진 2진, 여진족 12촌 등을 편입.

 1076년

  등과자(登科者)의 급전제(給田制)를 정함.

 1080년

  보병과 기병 3만으로 정주성 외곽의 여진족을 토벌함.

 

  금(金)은 거란을 멸망시키고 만주와몽고, 중국의 북부를 지배하게 되자 고려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해 왔다. 이에 고려는 금과 형제 맹약을 맺어 평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북진 정책은 한동안 중단되었다.  

 

활발한 대외 교류

  고려는 건국 이후 문호를 열고 송(宋)을 비롯하여 거란, 여진 등 외국인의 출입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등 개방적인 대외 정책을 폈다.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후 대외 관계가 안정되면서 고려는 송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고려는 사신, 학자, 승려들을 송에 보내어 발달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각종 제도를 완비하였다. 반면에 송은 고려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주변의 이민족을 견제하려 하였다.

  한편, 고려는 대외 무역을 장려했으므로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무역을 하러 고려에 왔다.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는 당시에 국제 무역 항구로서 크게 번성하였다.

  우리 나라가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서방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도 고려 왕조의 이러한 개방적인 대외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의 외교 정책은 거란과 송 등 여러 나라와의 관계에서 온건책과 강경책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실리적인 대외 정책을 통해 국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1083년

  ◇7월-문종 죽고(1019∼), 순종(順宗) 즉위(∼1084).

  ◇10월-순종 죽고(1047∼), 선종(宣宗) 즉위(∼1094).

1094년

  ◇5월-선종 죽고, 헌종(獻宗) 즉위(∼1095).

1095

  ◇중추원을 추밀원(樞密院)으로 고침.

  ◇10월-헌종이 숙종(肅宗)에게 선위.

1097년 숙종 2년 7월

  ◇동여진의 적선 10척이 진명현에 침범하매 동북면 병사 김한충이 판관(判官) 강증(姜拯)<계보미상>을 보내어 그들과 싸워 이겨 배 3척을 얻고 48급(級;목숨)을 베었다.

  ◇국청사(國淸寺) 낙성. 천태종(天台宗) 일어남.

1101년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고, 남경 신궁(新宮) 조영에 착수.

1102년 숙종 7년

  ◇10월-기자(箕子)의 분영(墳塋; 묘)을 찾게 함

  ◇고주법(鼓鑄法)을 제정, 해동통보 1만 5천 관을 주조하여 문무양반˙군인에게 나누어줌.

 

 

2  무신 정권의 성립

 

   고려 중기에 이르러 여러 가지 사회 모순이 쌓이면서 정치와 사회 생활에서 많은 문제점이 나타났다. 이로 인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났으며, 마침내 무신 정변이 일어났다. 고려 중이 이후 여러 가지 사회 모순 아래서 고통을 겪던 농민과 천민들은 무신 정권기에 적극적인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다.

 

 

강화 산성|1232년 몽고의 2차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축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궁궐 터|인천 강화  고려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운문사|경북 청도   무신 집권기에 김사미가 농민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1]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왜 일어났는가?

 

사회 불안

  관료 사회는 12세기 이후 점차 변동하였다.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한 관료 가운데 일부는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거나 뛰어난 학문으로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이나 가문의 사람들을 중요한 관직에 앉혀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따라서,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유능한 신진 세력은 정치에서 소외되어 불만이 많았으며, 이로 인해 불안한 정치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강공간(姜公幹)<인헌공의 증손>

강보문(姜輔文)<은렬공 4세>

강원로(姜元老) 관서대장군 파시조

 

1104년

  윤관, 서북면행영병마도통(西北面行營兵馬都統)에 임명됨. ◇3월-윤관 여진과 싸워 결맹(結盟)하고 돌아옴.

1105년 숙종 10년

  ◇숙종 죽고(1054∼), 예종(睿宗) 즉위(∼1122).

  ◇12월-탐라국(耽羅國)을 폐하고 군(郡)으로 함.

 1107년

  ◇윤10월-윤관을 원수,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여 여진토벌의 군사를 일으킴. 점령지역에 9성(城)을 쌓음.

 1108년 예종 3년

  ◇1월-이자겸(李資謙)의 둘째 딸이 문경태후(文敬太后)가 됨.  

  ◇여진 토벌군이 포위되자 척준경(拓俊京)이 이를 구함. 여진이 웅주성(雄州城)을 포위 공격, 오연총이 구원.

 

  일부 관리와 권세가들은 국가에서 전시과로 받은 토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고리대 등을 통해 일반 백성들의 땅을 빼앗는 등 경제적 기반을  확대해나갔다. 백성들은 권세가들에게 토지를 빼앗겨 생계가 어려운데다가 여진 정벌로 인한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려야 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도는 현상이 전국에 걸쳐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개경은 지덕이 쇠하여 수도로서 적합하지 않으니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풍수지리설이 성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위기 의식이 널리 퍼졌다.

  

강정협(姜貞협)<은 4세> 상서성(尙書省) 좌승(左丞) 역임 

강정길(姜貞吉)<은 4세> 판사(判事) 역임

강홍(姜洪)과 봉바위

강호덕(姜好德)

 

 

1109년

  오연총이 길주를 구(救)함. 오연총이 공검진(公險鎭)에서 패전. 윤관 다시 길주를 구함. 9성을 여진에게 돌려줌.

 

 1110년

  제술(製述)·명경(明經) 등의 과거 과목을 제정.

 

 1119년

  국학(國學)에 처음으로 양현고(養賢庫)를 둠.

 

 1122년

  이자겸(李資謙)이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집권.   

 

이자겸의 난

 경원 이씨 일족은 왕실과 거듭된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가장 유력한 외척 가문이 되었다. 특히 이자겸은 딸들을 예종과 인종의 왕비로 두어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하였다. 이자겸은 왕실에서 많은 토지를 받은 데다가 백성들의 토지까지 빼앗아 백성들의 원성이 매우 높았다. 이자겸의 권력은 국왕의 자리까지 넘볼 정도였다.

  이에 왕위 유지에 위협을 느낀 인종이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이자겸의 반격을 받아 궁궐이 불타는 등 위기에 처했다. 이를 이자겸의 난이라 한다(1126년). 그러나 얼마 후 인종은 이자겸의 부하인 척준경을 시켜 이자겸을 제거하였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자겸의 난으로 왕실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특정 가문이 정치를 독점하는 현상에 대한 반성의 기운도 일어났다. 또 이자겸의 주도 아래 고려가 금나라와 형제 맹약을 맺은 데 대한 불만도 상당하였다.

 

 

 

 

 

강진보(姜晉寶)

 

1125년 인종 3년

  ◇1월-이자겸(李資謙), 또 다시 넷째 딸을 왕에게 바침.

 

1126년 인종 4년

  ◇12월-이자겸(李資謙) 죽음.

 

1128년 인종 6년

  ◇4월-척준경(拓俊京)을 전리(田里)에 귀양 보냄.

 

1135년 인종 13년

  ◇1월-묘청(妙淸)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킴.

 

1140년 인종 18년

  ◇6월-공상악인(工商樂人)의 자손은 유공자라도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함.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 때,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과 문신 정지상 등은 이러한 민심을 이용하여 인종에게 '고려를 황제국이라 칭하고 독자의 연호를 사용하며 금나라를 정벌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서경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인종은 이들의 말에 따라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자주 행차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정치 세력이 서경 천도에 반대하자, 묘청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135년). 이들은 나라 이름을 '대위국'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을 사령관으로 한 중앙군이 서경을 공격하여 1년 여 만에 반란은 진압되었다. 묘청 등의 서경 천도 운동은 개경 정치 세력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을 통해 당시의 민심이 문벌 세력의 정치적 독점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으며 고려인의 자주 의식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복민(姜福民) 판금천군사(判錦川郡事)

강구명(姜丘鳥冥) 판자정전 판참리사

 

 

 

 

 1145년 인종 23년

  ◇12월-김부식(金富軾) 삼국사기 50권을 편찬

 

1165년 의종 19년

  ◇2월-강문준(姜文俊)을 전중감흥위위집 상장군(殿中監興威衛輯上將軍) 태자우청도수 부(太子右淸道率府率)로 삼았다.

 

무신 정권기의 지배 기구 

  1170

  1179

  1183

  1196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중   방

  1219

  최충헌 

교정도감

  1249

  최  우

교정도감

·

정방

  1257

  1258

  1268

  1270

  1271

  최  항

  최  의

  김  준

  임  연

  임유무

 

[2] 무신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신 정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진압되었으나, 문신 중심의 정치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무신들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차별 대우와 문신 위주의 정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낮은 대우와 각종 잡역에 시달린 하층 군인들의 불만도 컸다.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책을 폈다. 이로 인해 국왕과 문신들 사이에 정치적인 갈등이 자주 일어났다.

  의종은 문신 세력의 견제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말년에는 측근들에 의지해서 왕권을 겨우 유지하였다. 정치에 뜻을  잃은 의종은  놀이와  연회를 위해 별궁과 정자를 지었고, 백성들은 이를 위한 공사에 동원되어 노역에 시달렸다.

 강신근(姜臣謹)<인 5세>

강정우(姜貞祐) <관 2세>

강위용(姜渭庸) 소감공파 파시조

 

1170년 의종 24년

  4월-왕이 너무 자주 놀러 다녀서 대장군 정중부(鄭仲夫)가 난을 일으키고 9월 왕 및 태자를 내쫓고 왕의 동생 익양공을 왕으로 세움

1174년 명종 4년

  2월-강우문(姜遇文)<계보 미상> 안주도령(安州都領)으로 있으면서 연주장리(延州將吏)에게 글을 보내 24성의 도령과 함께 북면 여러 성을 평정했음. 그후 상을 받고 서울에 살게 되었다.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의 난. 서북방 40여 성이 호응. 정중부,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됨.

  겨울 이의방(李義方), 서경군대가 다시 모여 성을 굳게 지키므로, 성밖에서 한 달 정도 주둔하다가 모진 추위로 더 싸우지 못하고 패하여 돌아왔다.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승(僧) 종참(宗참) 등을 시켜 이의방(李義方)을 살해하였다.

1175년

  관군, 연주(漣州)를 함락, 서경을 포위.

 

  의종이 개경 부근의 보현원에서 놀이를 즐길 때를 이용하여 정중부 등의 무신들이 마침내 정변을 일으켰다(1170년).

  정중부 등은 문신들을 제거하고 의종을 귀양 보낸 다음 정권을 독점하였다.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김보당 등 일부 문신 세력이 의종을 복위시키려고 봉기했으나 실패하여 도리어 의종과 많은 문신들이 살해되었다. 그 후, 무신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정중부가 피살되고 경대승, 이의민이 차례로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강운익(姜雲翼)<은 5세> 문과급제, 한림원 시강

강여익(姜呂翼)<은 5세>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중익(姜仲翼)<은 5세> 전한(典翰)

 

1176년

  1월-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 남부지방에 민란 성행. 대규모 관군 조직.

1177년

  1월-망이·망소이의 난을 평정.

1179년

  9월-경대승(慶大升), 정중부를 죽이고 반대파를 처형. 도방(都房)을 설치.

1180년

  무신(武臣)들이 사병(私兵)을 두기 시작.

1184년

  2월-이의민(李義旼)이 경주에서 돌아 와 정권을 장악.

1193년

  김사미(金沙彌)의 난 일어남. 

무신정변(武臣政變) 원인

  문신에 의한 무신의 차별이 정변의 원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의종의 실정,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문벌 귀족 사회 내부에 동요를 초래했던 것도 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최씨 정권의 성립(1196년)

  최충헌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이후 4대 60여 년간 최씨 정권이 지속되었다. 최씨 정권은 다른 정권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전형적인 무신 정권이었다.

  당시에도 국왕은 있었으나, 무신 집권자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좌우하였다. 종래의 정치 기구도 있었으나, 무신들이 만든 새로운 권력 기구가 정책을 집행하였다. 최씨 정권 이전에는 중방(重房)이 최고 권력 기구였으나, 이때부터는 교정도감(敎定都監)이 대신하게 되었다. 최고 집권자는 교정별감이 되어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였고, 이 기구가 각종 정책을 집행하였다.

  최씨 정권은 사병으로 조직된 도방(都房)과 함께 삼별초를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리고 정방(政房)을 두어 정부의 모든 인사 행정을 처리하였다.

 

강서공(姜瑞公)<관서공 3세>

강철영(姜哲永) 수군삼도도통사

강문로(姜文老)<소감공 아들> 문과급제, 검교

 

1196년

  4월-최씨 무신정권(崔氏 武臣政權) 성립.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李義旼)을 죽이고 그 삼족을 주멸하고 정권을 장악.

 

1197년 명종 27년

  9월-최충헌(崔忠獻) 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의 아우 평량공을 왕으로 세웠다. 신종(神宗)(∼1204).

  ◇11월-두경승(杜景升) 적소 자연도에서 죽음.

 

1198년 신종 1년

  5월-만적(萬積)의 난.

 

1200년

  최충헌, 사저에 도방(都房) 설치.

 

1203년 신종 6년

  9월-부석사, 부인사 승도들이 난을 꾀하다가 섬으로 유배됨.  

 

[3] 무신 정권기에 농민과 천민의 저항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까닭은?

 

저항 운동의 배경

  고려 중기 이후 권세가, 지방관, 향리 등은 백성들에게 조세를 거둔다는 명목으로 각종 생산물을 지나치게 빼앗았다. 또, 고리대 행위나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는 일도 많았다. 이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살던 곳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유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었다.

  무신 정권이 수립된 후 무신 집권자들은 백성들을 심하게 수탈하였다. 또 무신 집권자 가운데에는 노비 출신도 있어서 신분 질서가 흔들리고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부곡이나 소 등 특수 행정 구역에 사는 주민들은 일반 백성에 비해 더 많은 세금과 부역에 시달렸는데 이에 반발한 하층민들이 저항 운동을 일으켰다.

  

강우창(姜遇昌) 도염서령(都染署令)

 

1211년 희종 7년

  ◇10월-강창서(姜昌瑞)에게 갑과 급제를 하사.

  ◇12월-최충헌, 왕을 폐하고 한남공 정(貞)을 세움(강종).

1216년

  ◇8월-몽골군에 쫓긴 거란 유민이 영삭진(寧朔鎭)·정계진(定戒鎭)에 침입하여 재물을 약탈.

  ◇9월-김취려, 연주에서 거란병을 대파.

1217년

  ◇3월-5군(軍), 태조탄(太祖灘)에서 거란병에게 대패.

1218년

  ◇3월-거란병 재침. 조충 등이 거란병을 강동성(江東城)으로 패주시킴. 

 

농민과 천민의 봉기

  무신 정권이 성립된 후 농민, 천민 등 하층민의 저항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서경에서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서북지방 일대의 주민들이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이들 농민의 저항 운동은 수년 동안 지속되다가 진압되었다.

  공주 명학소에서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망이, 망소이 형제를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이들은 한때 충청도 일대를 점령했으며, 개경까지 공격하려고 하였다.

  경상도의 운문(청도)과 초전(울산)에서는 김사미와 효심이 저항 운동을 일으켜 연합 세력을 형성하였고, 경주와 강릉 지역 또한 연합하여 그 세력을 크게 확대하였다.

  경주 지역에서 신라의 부흥을 내세운 이후 서경이나 담양에서도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을 외치면서 삼국 부흥 운동이 일어난 것은 이 시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어 부곡이나 소 등 특수 행정 구역의 주민과 노비의 봉기가 활발하게 일어난 점도 하층민 봉기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강극충(姜克沖) 문하시중

 

1219년 고종 6년

  ◇1월-조충·김취려(金就礪), 몽골 및 동진(東眞)과 함께 강동성을 공략.

  ◇9월-최충헌 죽고, 아들 최우 집권.

 1222년

  ◇1월-몽골에 대비하여 선주(宣州)·화주(和州)·철관(鐵關)에 축성.

 1223년

  처음으로 융기도감(戎器都監)을 둠. 금주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격퇴.

1225년 고종 12년

  최우, 정방정치(政房政治)시작(∼1249).

1226년

  ◇1월-경상도 거제(巨濟)에 침입한 왜구를 현령 진용갑(陳龍甲)이 격파.

1227년

  경상도 웅신현(熊神縣)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5월-왜국이 국서를 보내어 사죄하고 수호 통상을 청함.

1228년

  ◇7월-동진(東眞), 정주(定州)·장주(長州)에 침입.

1231년

  18월-제1차 몽골군 침입. 살리타[撒禮塔]를 원수로 삼아 평주(平州)를 치고 개경에 육박.

 

신분 해방을 꿈꾸다

  특히 개인이나 관청에 예속되어 각종 잡역에 시달리던 노비들의 저항 운동이 유례 없이 치열하게 일어났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그들의 저항 운동이 신분 해방을 부르짖고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전주에서는 지방관이 가혹한 사역에 반발하여 관노비들이 봉기하였다. 그리고 개경에서는 최충헌의 사노비인 민적이 중심이 되어 신분 해방 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이와 비슷한 형태의 신분 해방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30여 년간 전개되었다.  

 

 

 

  

농민과 천민의 저항 운동

 

1232년 고종 19년

  ◇6월-강화도(江華島) 천도.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축출. 김윤후(金允侯)가 지휘하는 부곡민이 처인성(處仁城)에서 항전. 살리타를 사살.

1233년

  필현보(畢賢甫)·홍복원(洪福源) 등이 모반. 필현보는 처형되고, 홍복원은 요양(遼陽)으로 달아나 반고려세력을 형성.

1234년

  최윤의(崔允儀)의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50권)을 주자(鑄字)로 인행(印行).

1235년

  ◇8월-몽골군, 용강(龍岡), 삼등(三登),용진진(龍津鎭), 동주성(洞州城) 등을 함락, 동경(東京)까지 침입. 야별초군(夜別抄軍)이 지평(砥平)에서 몽골군 격파.

1238년 고종 25년

  ◇윤 4월-몽고병, 경주 황룡사탑을 불태웠다.

1249년 고종 36년

  ◇8월-몽고, 또다시 왕의 출륙(出陸) 친조(親朝)를 조유하다.

  ◇11월-최이(崔怡=崔瑀) 죽음

1251년 고종 38년

  ◇9월-대장경의 조판을 끝냈다.

 

  

3  몽고와의 전쟁과 자주성의 회복

 

   고려는 몽고의 침략을 받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40여 년간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특히, 농민과 천민들이 용감히 싸워 큰 성과를 거두었다. 고려 정부가 몽고와 강화를 맺자 삼별초는 몽고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고려는 원과 강화한 뒤 원의 압력과 간섭을 받았으나, 공민왕은 원과 명의 교체기를 틈타 원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주적인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다.

 

    

                       처인성 전투(민족 기록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고군을 격퇴하였다.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판|경남  합천

부처의 힘으로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공민왕릉|경기 개성  공민왕은 반원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1] 고려는 몽고의 침입에 어떻게 맞섰는가?

 

몽고와의 접촉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 대륙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몽고 초원에서 칭기즈 칸이 몽고 제국을 건설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 금나라에 복속되었던 거란족이 몽고의 침입을 계기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몽고군에 쫓겨 고려에 침입해 왔다.

  고려는 몽고군과 연합하여 서경 부근의 강동성에서 이들을 물리쳤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몽고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고, 이후 몽고는 고려에 많은 물자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던 몽고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와 몽고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

 

몽고에 맞서 싸우다

  고려와 몽고는 한동안 긴장 상태를 유지했으나 결국 몽고의 침입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1231년). 당시 고려는 백성들과 관군이 하나가 되어 몽고군에 맞서 싸웠다. 특히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고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켰다.

  충주 지방에서는 몽고군이 침입하자 관리들은 도망했으나, 관노비들은 끝까지 싸워 성을 지켰다.  정부에  반기를들었던 초적들도 몽고군이 침입하자 맞서 싸웠다. 최씨 정권은 모든 주민이 섬이나 산성에 들어가서 몽고군에 항전하도록 하고,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1258년 고종 45년

  ◇8월-몽고, 쌍성총독부를 두었다.

 

1259년 고종 46년

  ◇유경(柳璥) 등이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왕에게 돌려주었다.

 

  ◇5월-보문각 교감 강도(姜度)이 자운사 못에 붉은 거품이 일자 "신라 호경왕 때도 대관사 못이 붉었는데 그해 왕이 서거하였다. 지금 임금의 병환이 위중하다"고 예언하였는데 이듬해 고종이 붕어했다.

1261년 원종 2년

  ◇몽골, 안무 고려군민총관부(安撫 高麗軍民摠管府)를 둠.

1262년 원종 3년

  ◇5월-강위보(姜渭輔)<계보 미상> 대장군(大將軍), 삼별초의 우두머리 배중손이 전사하고 여당(餘黨)이 탐라에 도망가서 반항함으로 삼별초(三別抄) 잔당을 토벌하러 갔다가 적에게 잡혔다가 간신히 살아 나왔다.

 

1269년 원종 10년

  ◇원종이 몽고에 가 있는 동안 임연(林衍)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 창(창)을 세움

 

 

 

대몽 항쟁기의 강화도 일대

 

  같은 해에 몽고군이 다시 침입했으나, 광주 주민들은 이에 맞서 몽고군을 격퇴했으며, 특히 처인성 전투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고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이에 몽고군은 철수하였다.

  몽고는 금나라를 정복한 후, 남송(南宋)과 고려 정벌에 본격적으로 나서 여러 차례 고려에 침입하였다. 이 때에도 김윤후는 노비들과 함께 끝까지 충주성을 지켰다.

  최씨 정권은 민심을 모으고 부처의 힘으로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해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 조성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16년간의 대역사 끝에 완성되었다. 팔만대장경은 대몽 항쟁의 산물이며, 우리가 자랑하는 문화 유산의 하나이다. 그러나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탑 등은 몽고군에 의해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1269년 원종 10년

  ◇11월-원종이 다시 복위  

   ◇12월-이때 최탄(崔坦)1>, 한신이 반란하여 성수(城守)를 죽이고 오직 박주성수(博州城守) 강빈(姜)<계보 미상>, 연주성수 권천(權闡)만을 예로 대우하며 말하기를 "김공(김방경)의 덕을 내가 어찌 잊으리오"하였다. 이것은 강빈(姜), 권첨(權闡)은 김방경(金方慶)의 매서(妹서)인 까닭이다.

1270년 원종 11년  

  ◇6월-배중손 등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반란하다가 8월 진도(珍島)로 들어감

1271년 원종 12년  

  ◇5월-김방경, 몽고군과 진도를 함락, 삼별초 나머지 무리가 탐라로 들어감.

1272년 원종 13년

  ◇8월-대부주부(大府主簿) 강위찬(姜渭贊)<계보 미상>과 문습규 등이 대부가 허갈하여 징책을 감당하지 못 하였다.

  ◇10월-김방경은 원나라 장수 흔도(흔都)와 함께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돌아옴

1273년 원종 14년

  ◇2월-김방경(金方慶)이 원군(元軍)과 함께 탐라의 삼별초군을 공략. 탐라에 다루가치총관부[達魯花赤摠管府]를 둠.

1> 崔坦(최탄)-고려 시대의 역신(逆臣)

 

 

강화천도(江華遷都)

  1206년 몽골이 건국한 1217년에 몽골의 침입에 쫓긴 대요수국(거란족)이 2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으나, 1218년 강동성(江東城)에서 여·몽(麗蒙)연합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를 계기로 몽골은 일방적으로 형제관계의 협약을 맺고, 무리한 공물을 요구함으로써 고려 군신의 분노를 샀다.

 

<박사공파 파시조 봉단>

 

1274년 원종 15년

  ◇1월-원, 고려에 사신을 보내 전함 3백 척을 만들게 함

   ◇5월-원의 정동군(征東兵) 1만 5천 명이 옴

   ◇8월-강계용(姜啓庸)1> 국자박사(國子博士) 김방경(金方慶)의 서장관으로 일본 정벌에 참전함

1278년 충렬왕 4년

  ◇2월-김방경을 유배하다

  ◇10월-김방경을 다시 등용

  ◇강훤(姜暄)<계보 미상>  과거에 갑과 급제

1279년 충렬왕 5년

  ◇4월-원, 고려에 전함 9백 척을 만들게 함

 

 

  더구나 1225년 공물을 받아가던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변에서 피살되자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고, 몽골 침입의 원인이 되었다. 1231년 살리타이撤禮塔〕가 이끄는 몽골군이 침입해 오자 고려 조정은 화의를 요청하였다.

  그 후  원(元)나라는  서경(西京) 및 서북면 지방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파견하는 등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권신(權臣) 최우(崔瑀)는 단호히 항몽 투쟁을 결의하고, 1232년 6월 장기적인 항전을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이후 몽골군은 1258년까지 6차례나 침입하였다.

 

강원길(姜元吉) 밀직부사(密直副使)

강원감(姜元鑑) 검교태자첨사

강원찬(姜元鑽) 보문각직학사(直學士)

 

1281년 충렬왕 7년

  5월-김방경, 흔도, 홍다구 등이 일본을 침. 전중(殿中) 내급사(內給事) 강인문(姜引文), 서장관(書狀官)으로 참전함

  8월-일본 정벌에 나섰던 동정군 패하고 돌아옴

  10월-원의 세조는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설치하고 제2차 일본정벌을 준비, 실행하였으나 실패함

 

 

                <내급사공(휘 인문) 봉단>

 

  고려는 최우·최항(崔沆)·최의(崔의)의 집권기와 뒤이은 김인준(金仁俊)·임연(林衍)·임유무(林惟茂)의 집권기인 70년까지 강화에서 장기 항전을 하였다. 강화도로 천도한 것은 강화도는 개경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수전(水戰)에 약한 몽골군을 능히 막을 수 있는 요새지로 보았기 때문이다.

 

강원전(姜元鐫) 전라어사(全羅御使)

강원함(姜元咸) 사평 첨의평리사

강원익(姜元益) 전의판서(典議判書)

 

1288년 충렬왕 14년

  10월-판사(判事) 강거실(姜居實)<계보 미상>, 반야의 친족이라 해서 교수형을 당함

 

1289년 충렬왕 15년

  강취(姜就)<계보 미상> 안렴사(安廉使)를 지냄

   ◇1월-중 일연(삼국유사 저자) 죽음 

 

 

 

  천도 당시의 개경 인구는 약 10만이었으며, 천도의 결행은 일반 민중에 대한 보호책이 강구되지 않아 이통(李通)의 난이 일어나는 등 분규가 있었다. 이는 대몽 장기 항전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또한 몽골과 화의한 원종(元宗)이 개경 환도를 선포하자 최우 집권 때 설치한 삼별초군(三別抄軍)은 자주성을 잃은 정부에 대항하여 강화도 출륙을 반대하고 원과 투쟁하였다. 이것이 삼별초의 난(1270년)이다.

 

몽고와의 강화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 피난해 있으면서도, 몽고군의 침입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외면한 채 사치한 생활을 하고 정권 유지를 위해 조세를 더 거두어 들이는 등 무리한 정책을 펴 민심을 잃었다.

강득주(姜得珠) 시승(侍丞)

강충(姜沖)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

 

1294년 충렬왕 20년

  ◇1월-원(元)의 임금이 죽고 동정(東征)을 중지함.

1296년 충렬왕 22년

  ◇첨의시랑 찬성사 정가신(鄭可臣)<어사공(휘 사첨) 장인>이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 옴.

1298년 충렬왕 24년

  ◇9월-중원후 온과 대장군 김천석(金天錫)<박사공 5세 문경공(휘 군보) 배위의 조부>을 원나라에 보내어 복위한 것을 하례함

1298년 충선왕 즉위년

  ◇2월-총랑(摠郞) 강용정(姜用丁)<계보 미상>을  경상도 안렴사(慶尙道 按廉使)로 삼음

  ◇ 충선왕이 세자 때 강보(姜保)<계보 미상> 원나라에서 수시력법(授時曆法)을 본 충  선왕의 명으로 <수시력첩법입성(授時曆捷法立成)>을 편찬했다.

1307년 충렬왕 33년

  ◇3월-낭장(郎將) 강습(姜褶)<계보 미상> 원(元)나라에 곡물의 매출(賣出)을 통고하였다.

  

이러한 때에 최고 권력자 최의가 피살되고 최씨 정권은 무너졌다. 몽고에 대한 항전을 주도해 온 최씨 정권이무너지자 몽고와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왕과 문신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무신들은 강화의 조건인 개경으로 환도하는 일을 거부하였으나, 무신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가 피살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강태(姜泰) 대상(大相)

강건(姜健) 봉익태사(奉翊太史)

강여위(姜汝渭) 상서(尙書)

강영년(姜永年) 첨의정승(僉議政丞)

강사첨(姜師瞻) 감찰어사(監察御史)

 

1308년 충렬왕 34년/충선왕 복위년

  ◇왕이 풍수를 본 자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치사(致仕)한 강헌(姜軒)<계보 미상>과 죽은 찬성사 오윤부(伍允孚)1>의 사위 강미(姜美)<계보 미상> 및 외손 2인을 순군(巡軍)에 가두었다.

1309년 충선왕 1년

  ◇3월-검교중호 배정과 내부령(內府令) 강융(姜融)에게 명령하여 강안, 연경 2궁(宮)을 중수하게 하였다.

 

 

<어사공(휘 사첨) 봉단>

 1> 부흥 오씨 시조   

 

삼별초의 항쟁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강화도에서 멀리 진도로 내려가 여·몽 연합군과 싸웠다.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인의 자주 정신을 보여 준 것이었다. 이로써 40여 년간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은 끝났다.

 

원의 내정 간섭

  삼별초의 항쟁이 진압되면서 고려는 이후 80여 년 간 원의 간섭을 받는 원간섭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오랜 전쟁의 결과 각각 정치 체제가

 

강유로(姜惟老)상호군

강정(姜靖) 부사

강윤지(姜允祉)  공조전서

강윤평(姜允平)  형조전서

 

1311년 충선왕 3년

  ◇7월-경상도 제찰사(慶尙道 提察使) 강원(姜瑗) 등을 파직하였다.

1314년 충숙왕 1년

  ◇1월-강방언(姜邦彦)<계보 미상> 좌상시(左常侍)로 삼았다.

  ◇2월-강방언(姜邦彦)을 상호군(上護軍)으로 삼아 원(元)나라에 보내 절일(節日)을 축하하였다.

1325년 충숙왕 12년

  ◇5월-상왕(충선왕)이 연경에서 죽었다. 만호(萬戶) 강융(姜融)을 보내 관을 평양에서 맞이하였다.

1327년 충숙왕 14년  

  ◇11월-충절을 다한 상호군으로 치사한 강언(姜彦) 등에게 공을 기록하였다.

1328년 충숙왕 15년

  ◇여름 4월-강융(姜融)>찬성사로 삼았다.

    1> 계보 미상, 1328년 안동목사 역임

 

크게 변화되었다. 고려에서는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국왕 중심의 정치가 회복되어 국왕과 문신 세력이 다시 정치를 주도하였다. 몽고에서도 권력다툼 끝에 쿠빌라이(세조)가 왕위에 올라 국호를 원나라로 바꾸고, 수도를 대도(베이징)로 옮겼다.

  이후 원나라는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인정하면서도, 고려에 대해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원나라는 일본정벌을 계기로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강자문(姜自文) 나주목사

강섭(姜燮) 호조전서

강염(姜炎) 문하시중  

강원(姜源) 부윤

 

1328년 충숙왕 15년

  ◇강언(姜彦)을 안동목사로 삼았다.

  ◇강원길(姜元吉) 중추밀직부사(中樞密直副使; 정3품)

 

1335년 충숙왕 복위 4년

  ◇4월-강융(姜融)을 첨의좌정승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았다.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제주 북제주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에게 마지막까지 항전한 곳이다.

 

 

  고려 국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하였고, 태어난 왕자는 원나라에서 성장하면서 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왕이 되었다.

  이처럼 원나라는 국왕을 자기들의 통제 아래에 두고 그를 통해 고려를 간접적으로 지배하려는 정책을 폈다.

 

 

 

 

강계년(姜桂年) 현덕궁 부사

강우(姜祐) 형조전서

강위경(姜渭卿) 판도판서(版圖判書)

강창부(姜昌富) 대장군(大將軍)

 

1335년 충숙왕 복위 4년

  ◇12월-강호례(姜好禮)와 정천좌를 원나라에 보내 신년을 축하하였다.

 

1339년 충숙왕 후 8년

  ◇2월 22일-강시(姜蓍) 출생

 

  ◇전법사(典法司) 정랑(正郞) 강군보(姜君寶)는 신예(辛裔)의 동년우(同年友)인 까닭으로 신예의 매서(妹壻) 고용보(高龍普)를 놓아주었다.

 

1340년 충혜왕 후 1년  

  ◇4월-원, 고려인 기씨(奇氏)를 제2황후(第二皇后)로 봉하였다. 

 

개혁 정치의 시작

 고려 국왕은 국내에 정치적인 기반이 없었으므로 즉위 후에는 원나라에서 자신을 보필했던 측근들을 관리로 임명하는 정치를 폈다. 원의 간섭으로 왕위가  자주 바뀜에 따라 정치 세력의 교체가 빈번하여 지속적인 정책을 펼 수 없었다. 이에, 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군인, 역관, 환관 출신 인물이나 그 친척들이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을 권문 세족이라 한다.

 

강창귀(姜昌貴) 계림판관

강창수(姜昌壽) 삼사우윤

 

1343년 충혜왕 후 4년

  ◇11월-만호 강호례(姜好禮) 창에 맞고도 대항하여 왕을 보호하였다. 

 

1344년 충목왕 즉위년

  ◇윤 2월-왕이 정승 채하중, 사공(司空) 강호례(姜好禮), 정당문학 정을보 등에게 명령하여 국정에 참의케 하였다.

  ◇10월-강우(姜祐)<계보 미상>로 참리(參理)를 삼았다.

 

 

 

  권문 세족은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경영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노비로 만들어 농장을 경작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조세를 내야 할 백성들이 줄어들고 국가의 조세 수입도 감소되어 나라의 재정이 매우 궁핍해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선왕은 정치·경제 제도를 개혁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충목왕도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는 고려의 국왕이 원의 조종과 간섭을 받고 있었으므로 개혁을 철저하게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치 세력이 자주 바뀌어 개혁 추진 세력이 미약하였던 것도 개혁이 성공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원인이었다.

 

 

강천명(姜天命) 예의판서

 

1347년 충목왕 3년

  ○강서(姜筮) 출생

 

1349년 충정왕 1년

  ◇강융(姜融)이 졸(卒)하였다

  ◇10월-강릉대군(江陵大君) 기(祺 - 공민왕), 원에서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했다.

 

1350년 충정왕 2년

  ◇5월-강득룡(姜<康>得龍)<계보 미상>으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삼았다.

1351년 충정왕 3년

  ◇8월-강득룡(姜得龍)으로 삼사좌우사(三司左右使)로 삼았다. 

 

성리학의 수용

  원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는원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충선왕이 원의 수도에 세운 만권당을 통해 고려와 원의 유학자들이 빈번하게 접촉하여 안향, 이제현 등 고려의 지식인들이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성리학적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충선왕과 충목왕 등이 시행한 개혁 정치에 동참하면서 고려의 현실에 눈을 뜨고, 비판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세력을 신진 사대부라 한다.

  이들은 원나라의 세력을 빌려 권력을행사하는 권문 세족의 불법성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와 사회 건설을 주장하였다.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이들은 권문 세족을 대신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

  원나라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는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려 사회에는 개혁의 기운이 크게 일어났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원(反元) 개혁을 추진하였다.

  공민왕은 정동행성을 없애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또, 원의 간섭으로 바뀐 관제를 복구하고, 몽고식 생활 풍습을 금하였다. 이어서 친원파(親元派)를 숙청하고, 정방을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1352년 충정왕 4년

  ◇1월-강보(姜保)>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로 있었다.

  ◇6월-밀직부사 강천유(姜千裕)를 수종공신 1등으로, 상호군 강중경(姜仲卿)을 2등으로 삼았다.

  ◇10월-강득룡(姜得龍)으로 삼사좌우사(三司左右使)로 삼고, 강천유(姜千裕)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삼았다.

 

1352년 공민왕 1년

  ◇상장군(上將軍) 강석(姜碩)을 원나라에 보내어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였다.

  ◇박수년(朴壽年)1>으로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삼았다.

 

1353년 공민왕 2년

  ◇1월-상호군 강중경(姜仲卿), 김성보를 원나라에 보내었다.

 

1354년 공민왕 3년

  ◇1월-밀직부사 강천유(姜千裕)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았다.

  ◇2월-강중상(姜仲祥)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강석(姜碩)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삼았다.

 

 

1> 소감공 6세 우(佑)의 장인으로 1355년 찬성사를 지냈다.

 

  그리고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불법적인 농장을 없애고 토지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농장의 노비들을 양인으로 해방시켰다. 

  공민왕의 개혁 조치는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권문 세족의 반발로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도 시해당하였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실해한 것은, 당시에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세력이 미약했고,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국내외 정세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강윤보(姜允輔) 전객령

강황보(姜璜寶) 합문지후(閤門祗侯)

강전보() 낭장(郎將)

 

1354년 공민왕 3년

  4월-강석(姜碩)을 지밀직사사로

  6월-강중상(姜仲祥)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삼고 강중경(姜仲卿)을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삼았다.

  7월-강천유(姜千裕)를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에 봉했다.

  ◇강득룡(姜得龍)을 평리(評理)로, 강중경(姜仲卿)을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삼고, 강석(姜碩)을 영창군(永昌君)에 봉했다.

  11월-강석(姜碩)을 지밀직사사

  12월-강인백(姜仁伯)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강득룡(姜得龍)을 삼사좌우사(三司左右使)로 삼았다.

  강중경(姜仲卿)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삼았다.

 

1355년 공민왕 4년

  윤 1월-강중상(姜仲祥)을 진원군(晉原君)으로 봉했다.

  4월-강인백(姜仁伯)을 내성부원군(奈城府院君)에 봉했다.  

 

 

 

 

1356년 공민왕 5년

  ◇5월-상호군 강중경(姜仲卿)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신순, 유홍, 최영(崔瑩)2>, 최부개를 부사(副使)로 삼아 압록강 이남의 8참(站)을 공격케 하였다.

   ◇11월-강중상(姜仲祥)을 전라도 도순문사(全羅道 都巡問使)로 삼았다.

 

 

 

 

 

1357년 공민왕 6년   

  ○강회백(姜淮伯) 출생

  ◇강시(姜蓍) 문과급제

  10월-3년상(三年喪)을 행하게 하였다.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

 공민왕 때에는 홍건적과 왜구가 고려에 자주 침입하였다. 홍건적은 원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군이었다. 홍건적이 개경까지 침입해 오자 공민왕은 멀리 안동까지 피난을 가기도 하였으나, 정세운, 이방실 들이 나아가 격퇴하였다.

  한편, 왜구는 일본의 쓰시마 섬에 근거를 둔 해적으로, 일찍부터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다. 공민왕 때에는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하고, 개경이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

 강회중(姜淮仲) 출생

 

1359년 공민왕 8년

  ◇6월-임금이 기철(奇轍)을 죽인 강중경(姜仲卿)에게 녹권을 하사하고 그 부모에게 작위를 주고 음직을 자손에게 미치게 함

 1360년 공민왕 9년

  ◇강천수(姜天守), 전서(典書)를 역임.

 1361년 공민왕 10년

  ◇5월-전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 강중상(姜仲祥)을 경상도도순문진변사(慶尙道都巡問鎭邊使)로 삼았다.  

  ◇11월-공민왕이 남행할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강석(姜碩)을 교주 강릉도 도순문사겸  병마사(交州江陵道都巡問使兼兵馬使)로  삼아 적을 방어케 했다.  

 

   왜구의 침입으로 조세의 해상 운송이어려워져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까지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최영, 이성계 등이 나서서 왜구를 토벌하였고, 최무선은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서, 박위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그 기세를 꺾었다.

  이와 같이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 이성계 등의 무인 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다.

 

 

 

 

1363년 공민왕 12년  

  ◇12월-문익점이 원에서 목화씨를 가져왔다.

 1364년 공민왕 13년

  2월-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 죽음  

  ○강손기(姜孫奇) 출생

  ○강회계(姜淮季) 출생

 1365년 공민왕 14년

  5월-강중서(姜仲瑞)를 진령군(晋寧君)에 봉했다.

  강수(姜) 상장군(上將軍) 역임.  

 

공민왕의 개혁 정치

 원나라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는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려 사회에는 개혁의 기운이 크게 일어났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원 개혁을 추진하였다.

  공민왕은 정동행성을 없애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또, 원의 간섭으로 바뀐 관제를 복구하고, 몽고식 생활 풍습을 금하였다. 이어서 친원파를 숙청하고, 정방을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불법적인 농장을 없애고 토지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농장의 노비들을 양인으로 해방시켰다.

 

강손수(姜孫壽) 현령

강손교(姜孫喬) 사인

강손명(姜孫命) 첨사

 

1367년 공민왕 16년

  11월-상호군 조린, 윤승순, 유인재, 강원보(姜元甫)1>, 대호군 한덕경을 외지에 유배하였다.

 

1368년 공민왕 17년

  1월-오나라왕 주원장(朱元璋)이 황제가 되어 국명을 명(明)이라 함

1369년 공민왕 18년 갑진

  강일화(姜日華) 문과 급제 후에 강은(姜隱)으로 개명하였다.

1370년 공민왕 19년 7월

  7월-삼사좌사(三司左使) 강사찬(姜師贊)을 경사(京師) 명경(明京)에 보냈다.

1371년 공민왕 20년

  6월-강중상(姜仲祥)>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삼았다.

 1> 계보 미상

 

공민왕의 개혁 조치는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권문 세족의 반발로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도 시해당하였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실해한 것은, 당시에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세력이 미약했고,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국내외 정세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강순(姜珣) 상주목사

강연(姜璉) 부사

강진보(姜眞保) 공조전서(工曹典書)

강희령(姜希齡) 상장군(上將軍)

강인검(姜仁儉) 상호군(上護軍)

강우(姜佑) 증좌의정

강사근(姜思近) 개성소윤

 

1371년 공민왕 20년

  ◇7월-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강중상(姜仲祥)을 경사(京師) 명경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축하하였다.

   ◇유탁과 신돈(辛旽) 일당이 사형되었다.

   ◇강여(姜餘) 태상시(太常寺)의 아곡을 거느리고 귀국했다.

 ◇신돈(辛旽)의 이부제(異父弟)인 판사(判事) 강성을(姜成乙)을 참하였다.

 

1372년 공민왕 21년

  ◇8월-찬성사 강인유(姜仁裕)를 경사(京師) 명경(明京)에 보내었다.

 

전제 개혁과 고려 왕조의 멸망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와 고려는 처음에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그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해 오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고려는 이를 거부하고, 나아가 명나라가 차지한 요동 지역까지 수복하려 하였다.

  5만의 고려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향해 출정한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을 점령하고, 우왕을 폐위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주도한 최영을 제거하였다. 이를 위화도 회군이라고 한다(1388년).

  이성계 일파는 정도전, 조준 등 신진 사대부 세력과 손잡고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당시 사회 모순의 근원인 문란한 토지 제도를 바로잡기 위한 전제 개혁을 주요한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권문 세족 등 구세력의  토지를 몰수하여 신진 관료들에게 재분배하는 과전법을 제정하였다.

 

강보충(姜輔忠) 병조판서

강용리(姜用鯉) 상서(尙書)

 

1373년 공민왕 22년

  ◇7월-찬성사 강인유(姜仁裕), 서장관(書狀官) 정몽주(鄭夢周) 등이 명(明)나라 서울로부터 돌아왔다.

  ◇찬성사 강인유(姜仁裕) 등이 바쳐온 사은의 표문(表文)과 공헌한 방물인 마필을 임금이 받았다.

  ◇8월-강중상(姜仲祥)을 경상도도순문사로 삼았다.

1374년 우왕 즉위년

  ◇4월-강서(姜筮)  군기시 소윤

  ◇7월-찬성사 강인유(姜仁裕)가     계품사(啓稟使)로 북원(北元)에서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

  ◇7∼8월-탐라, 명나라에 헌마(獻馬)하는 것에 불응, 최영(崔瑩)3> 등에게 탐라를 치게 하여 탐라를 평정하였다.

  ◇9월-환자(宦者) 최만생이 공민왕을 살해, 강녕대군 우가 즉위하였다.

  ◇강사경(姜思敬) 문과급제, 나중에 公延(공연)으로 개명

1376년(병진) 우왕 2년 7월

  ◇강회백(姜淮伯) 문과 급제

3> 통계공(휘 회중)이 15∼16세 나이로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경제적인 기반을 상실한 권문 세족은 정치적으로 몰락하였고, 정몽주 등 개혁에 소극적인 세력도 제거되었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무인 세력과 개혁에 참여한 정도전, 조준 등 신진 사대부들이 새로운 지배 세력이 되어 마침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년).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

  1388년(우왕 14) 5월 요동정벌(遼東征伐)에 나선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

  1388년 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하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에서 최영(崔瑩)이 중심이 되어 명(明)의 대(對)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정벌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는 정벌군이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①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 운반이 곤란하며, ② 습기로 활이 풀려 싸움을 할 수 없고, ③ 소국은 대국을 섬기는 것이 나라를 보호하는 길이니 요동정벌은 불가능하다고 상서(上書)하였다.

 

1377년 우왕 3년 5월

  ◇5월-강유(姜木柔)1>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부임하여 이듬해 임지로 떠남.

  ◇8월-계품사 진천군(晉川君) 강인유(姜仁裕)를 북원에 보냈다.

  ◇강거정(姜居正)를 판사 역임

1379년 우왕 5년  

   ◇강회중(姜淮仲) 문과급제

1382년 우왕 8년

  ◇4월-전 밀직부사 강서(姜筮) 등을 보내어 경상도 영해군에 침입한 화척(禾尺)들을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1384년 우왕 10년  

  ◇4월-북방에 경보(警報)가 있으므로 판밀직(判密直) 강서(姜筮)와 정몽주 등을 동북방에 보내어 사변을 탐정케 하였다.

1385년 우왕 11년

  ◇2월-밀직부사(密直副使) 강회백(姜淮伯)을 경사(京師) 명경(明京)에 보내었다.   

  ○강우덕(姜友德) 출생

  ◇강인유(姜仁裕)의 딸을 안비(安妃)2>로 봉하였다.

 1> 계보 미상  2> 고려 시대에 강씨가 처음으로 후궁에 오른 예이다.

 

   그러나 이를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5월 20일 회군을 결행하여 군대를 국내로 돌이켰다. 최영은 이성계에게 붙잡혀 고봉현(高峰縣 지금의 고양시)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우왕도 강화도로 쫓겨났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한 손에 잡아 조선 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융)  가계(家系)는

欽庄-融-好禮(문하찬성사)-仲祥(삼중대광)-世孫(판서)-輔(좌랑)-處貞(상호군)-貴復-自渭(선전)-長孫-克仁이란 기록도 있다.

 

 

 

 

 

 

 

 

 

 

 

 

 

 

1387년 우왕 13년

  ◇6월-원복제(元服制)를 폐하고 명복제(明服制)를 따랐다.

 

1388년 우왕 14년 창왕 즉위년

  ◇5월-이성계 위화도에서 회군

 

  ◇강인유(姜仁裕) 등 6비(妃)의 아버지들이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해  우왕이 폐위될 때 유배되었다가 창왕의 즉위 뒤에 방면되었다.

 

  ◇8월-창왕의 생일을 맞아 죄수들을 석방하고 강인유(姜仁裕) 등을 방면하여 전리로 돌아가게 하였다.

  ◇10월-강로(姜魯) 생원에 합격한 후 진사 병과에 급제

  ◇11월-밀직사(密直使) 강회백(姜淮伯)과 부사(副使) 이방우(李芳雨)를 경사(京師) 명경(明京)에 보내어 조견(朝見)을 청하였다.

 

1389년 창왕 1년/ 공양왕 1년

  ◇3월-밀직사 강회백(姜淮伯)이 경사(京師) 명경(明京)으로부터 돌아왔다.

  ◇11월-이성계가 정창군 요를 왕으로 삼았다.

  ◇10월-강회계(姜淮季) 문과 급제

  ◇12월-이성계가 우, 창왕을 죽였다.

                                             

 2> 1402년(태종 2) 사간원 정언 역임.

 

 

1390년 공양왕 2년

  ◇1월-밀직사 강회백(姜淮伯) 등에게 공신호를 내렸다.

  ◇고공좌랑(考功佐郞) 강회계(姜淮季)로 세자시학(世子侍學)을 삼았다.

  ◇2월-밀직사(密直使) 강회백(姜淮伯)을 사부(師傅)로 삼았다.

  ◇7월-목은 이색(李穡)3>이 공목공(휘 시)의 양진재기(養眞齋記)>를 지음

   ◇8월-고공좌랑(考功佐郞) 강회계(姜淮季)를 진원군(晉原君)으로 봉함

  ◇9월-밀직부사(密直副使) 강은(姜隱)을 경사에 보내어 종마(種馬)를 바침

  ◇12월-강회중(姜淮仲)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삼음

1391년 공양왕 3년  

  ◇5월-찬성사 강인유(姜仁裕), 이임(李任) 등을 다시 풍주(豊州)로 유배함

  ◇12월-밀직사 강회백(姜淮伯)을 정당문학 겸 사헌부 대사헌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 강은(姜隱)을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로 삼음

 1392년 공양왕 4년

  ◇4월-정몽주(鄭夢周) 피살됨

  ◇단양군 우성범(禹成範)과 진원군(晉原君) 강회계(姜淮季)를 회빈문(會貧門) 밖에서 참하였다.

                                               

3> 이색(李穡)-고려시대[1328-1396(충숙왕15-태조5)]의 문신, 학자. 자는 영숙(穎叔)이고,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한산(韓山)임.

4>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문신이며 학자. 자는 달가(達可)이고,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영일(迎日)임. 정몽란(鄭夢蘭)/정몽룡(鄭夢龍)으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