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
昌貴(창귀) 고려 증 문하시중 진원부원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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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寶(군보)<박 5세> 진주강씨 중흥조(中興祖), 두 아들을 재상으로 키워 ?∼1380, 1336년(고려 충숙왕 5) 남궁민(南宮敏) 방 진사(문과)에 등재하여 1344년(고려 충목왕 즉위년) 정랑(正郞), 1377년(우왕 3) 중추원첨서, 그후 정당문학(政堂文學), 첨의평리 예문관 대제학, 삼중대광 문하좌시중에 오르고 봉산군(鳳山君)에 피봉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으로 이문제인(以文濟人) 지신이경(持身以敬)에서 비롯되었다. 17세손 첨지사 호부(浩溥 1690∼1778)가 지은 장후서(狀後序)에 의하면 문경공은 천성이 영민하고 풍채가 늠름하며 학문을 좋아해 군의 향교에 나아가 공부하여 학문을 성취하였다. 대각(조정)에 나아가서는 5조(충목, 충정, 공양, 우, 창)를 역임하면서 경(敬:예)으로서 수신(守身: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몸을 지킴)하고 효로서 부모 모시고 인(仁:어진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였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90 노모를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상을 마치고 별세하였다. 목은 이색(李穡), 양촌 권근(權近)이 지은 만사가 유사에 실려 있다. 신도비명은 안동 김윤동(金潤東)이 짓고 이창헌(李昌憲)이 썼다. | ||
배위 |
계림군부인 경주 金氏(김씨), 1392년에 별세했다. 아버지는 전객령 여진(呂珍), 할아버지는 태자첨사 천석(天錫), 증조할아버지는 은공(殷公)이다. 묘는 경기도 임강현 대곡촌이며 지금은 실전했다. 단이 공의 우측에 있다. 군부인은 생전에 매양 둘째 아들 서(筮)에게 "점장이가 네 나이 삼십을 넘지 못하고 벼슬은 4품을 지나지 못한다 하였으니 너는 근신하여 이 어미에게 근심을 끼치지 말도록 하여라"하여 둘째 아들은 항상 겸손하고 세상을 두려워하여 조금도 함부로 행동하지 아니하여 벼슬은 좌의정에 78살까지 살았다.<왕조실록 2집 633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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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
경북 고령군 성산면 어곡리 병좌(丙坐)에 있다. 한때 실전하였으나, 후손 동래부사 필리(必履 1713∼?)가 적성을 다해 다시 찾았다. 묘를 봉심한 기록인 어곡실기(御谷實記)가 있다. | |
아들 |
목은 이색이 지은 문경공 만사 年將七十侍慈顔 칠십 나이 다 되도록 어머님 모셨으니 省宰庭中無袖斑 재상 집 뜰 안에 색동소매 춤을 추네 此時古今稀有事 이야말로 고금에 드문 일이 아닌가 凜然風采照鄕山 늠름한 그 풍채는 고향 산천 비추네 斐英臺閣躍氷顔 정승댁 노인당에 환한 얼굴 빛나고 암鍊非徒管豹斑 몰래 익힌 건 한갓 대롱 속의 표범 무늬만이 아니네 晩拜政堂封食邑 만년(晩年)에 정당받아 식읍을 봉하니 一時高議重於山 한 때의 높은 이론 산보다 중하네 我生甫冠識公顔 내 나이 약관에 공의 얼굴 알았는데 鏡裏吾今兩빈斑 거울 속 내 귀밑 희끗희끗 변해졌네 千里末由親執불 천리 길 멀고 멀어 상여 줄 못 잡으니 如聞해曲動雲山 해로곡 구름 산 움직이는 것처럼 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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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공 묘 아래에 있는 연못
교관 석하가 지은 문경공 찬사
陳孺子之讀書 한나라 진평같이 글읽기 좋아하고
杜元凱之好學 진나라 두예같이 학문을 잘 하셨네
早鵬騫於雲露 (지위가) 일찍이 봉새가 구름 속 날 듯 했고
逐鴻漸於天衢 (지위가) 드디어 기러기 하늘거리 가는 듯 해
體道經邦贊新化於合席 도 닦아 나라 위해 정승자리 새로웠고
疎封列爵食舊德於名卿 높은 벼슬 봉해 받아 이름 높고 덕이 크다 |
양촌 권근이 지은 문경공 만사 立身行有度 몸을 세우는 몸가짐 법도 있고 養志孝彌豊 뜻 받들며 효도를 다 하였네 老矣方哀毁 늙어서 모친상 애통하더니 俄然已令終 얼마 있다 자기도 세상 떳네 沙堤猶昨日 모래 언덕 놀던 일 어제 같아 廊廟有遺風 낭묘에 유풍만 남아 있네 積善傳家遠 적선하여 가문에 전해 가니 綿綿慶不窮 길이길이 경사가 끝이 없어라 吾生雖已晩 나는 비록 뒤늦게 태어났지만 常及老成人 이제는 늙은 사람되었네 勤愼持身德 조심스레 몸가짐 덕이 있고 溫恭待物仁 공손하게 어진 마음으로 남 대접했네 黃扉初罷相 높은 벼슬 정승 자리 내놓으시고 綠野欲怡神 녹야당에서 몸 편히 하고 싶었네 豈意騎箕速 어찌 이리 빠르게도 떠나셨나 終令愴恨新 마침내 슬픈 마음 새로워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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