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君寶(군보)○고려 문하좌시중, 문경공

동생-筮(서) 좌의정

(시)<박사공 6세/1-7> 다스리는 곳마다 칭송이 자자 두 아들을 경상으로 키워

  1339년 12월 22일생∼1400년 11월 26일 별세, 자는 매(某), 호는 양진당(養眞堂). 8세에 집안 음덕으로 연릉직(延陵直)에 보직받고, 정당문학 이인복(李仁復)과 함께 첨서추밀원사 김희조(金希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19세 되던 1357년(공민 6) 정유 성균시  염흥방(廉興邦) 방에 급제하고 1362년(공민왕 11) 대관서승을 거쳐 낭장을 두 번 지내고 감찰규정을 겸직, 전공좌랑과 광흥창사를 역임하면서 번거로운 일을 신속 민첩하게 다스리어서 가는 곳마다 칭송이 자자하였다. 합문인진부사가 되어서는 행동을 예법에 맞도록 하여 조열대부의 품계를 더했으며, 외직으로 봉성대부 지합주사(知陜州事)에 부임하여 선정을 펴 전법판도전리(典法版圖典理), 모두 총랑이 되고 중현대부로 위위윤(衛尉尹), 중정대부로 삼사좌윤, 봉순대부로 군기시 판사를 지냈다. 1378년(우왕 4) 강릉도 안렴사(江陵道 按廉使), 이듬해 통헌 판선공시에 제수되고 봉익대부(종2품)에 승진되었고 이듬해인 1380년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가 되었을 때  아버지 문경공이 세상 떠나 장례를 마치고 겨우 일년만에 좌상시에 기용되고 1382년 판도전서로 전직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밀직부사가 되고, 단성보리추충보조공신의 호를 하사받았다. 그해 겨울에 광정대부 판후덕부사로 옮기어 판의전시사 상호군을 겸직하고 1383년 봄에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에 배명되고 겨울에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니 품계는 중대광(종1품)이다.

      안동대도호부사 재직중 아버지 문경공 세상 떠나

  1390년(공양왕 2) 여름에 광정대부 판자혜부사 상호군 동판도평의사사사가 되고 겨울에 추충보조공신 대광상의문하찬성사와 동판도평의사사사 판선공시사 좌우위 상호군의 직첩을 더하였다. 1392년 어머니가 별세하니 나이 54세에 3년을 시묘살이를 하여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었다. 양촌 권근(權近)이 지은 묘지명에 의하면 천성이 신중하고 정성스러웠으며 풍채가 엄중하며 언어와 처사를 예법에 따라 행하고 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집안을 검소하게 다스렸으며 내외직 벼슬을 지냈으나 법을 지켜 아첨하지 않아 사람마다 엄격함을 두려워하고 존경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이색과 일찍부터 교유하여 우의가 깊어 공목공이 만년에 거처하던 양진재(養眞齋)의 기(記)를 쓰기도 했다. 정몽주와도 교분이 두터워 공목공이 강릉도안렴사로 있을 때 정몽주가 밤마다 친구를 그리는 꿈을 꾼다는 시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고려말에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와 뜻을 같이하여 고려왕조를 끝까지 지키려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성석린(成石璘), 이원굉(李元紘) 등과 더불어 유배되었으며 이때 막내아들 진원군 회계(淮季)가 죽음을 당했다.

  조선이 개국된 뒤 맏아들 회백(淮伯), 둘째 회중(淮仲)이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과 고려 말기에 도당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했다고 직첩을 회수 당하고 먼 지방에 유배되었으나 뒤에 풀려 나왔다.<왕조실록 1집 22, 107면> 이후 수 차례에 걸쳐 태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상중(喪中)이라 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400년(태종 즉위년)에 별세하니 향년 62세였고 공목(恭穆)이란 시호를 내렸다.<왕조실록 1집 187면> 안동도호부사 재임시 거처하던 양진재가 경북 안동시에 있다. 저서로는 農桑輯要(농상집요)가 있다. 농상집요는 합주지사로 있을 때 지은 책으로 농업과 양잠, 가축의 축산법을 포함한 다양한 농경기술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배위

정신택주(貞愼宅主) 진주 河氏(하씨), 1338∼1399, 아버지는 진천군(晉川君) 원정공(元正公) 송헌(松軒) 즙(楫), 할아버지는 정용위 호군 직의(直수의), 증조할아버지는 사직 보(保), 외할아버지는 판밀직 철성군(鐵城君) 고성 이우(李瑀)이다. 파주 봉일천 공릉(恭陵)이 진주 하씨의 묘터였다(아래 글 참조). 묘는 경기도 파주군 보시리(普施里 지금의 파주군 조리면 봉일천리)에 있었으나 1462년(세조 8년) 장순왕후 한씨가 이곳(공릉)에 장사지내자 진주 하씨 묘를 대자암(大慈菴) 산록으로 옮겼으며 지금은 실전했다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나부리 황학산 유좌(酉坐)에 있다. 양촌 권근(權近)이 묘지명을 짓고 목은 이색(李穡)이 養眞齋記(양진재기)를 지었다. 고려사에 이 사실이 실려 있다. 묘가 휴전선 안에 있으므로 연천군 왕징면 맏아들(휘 회백)의 묘가 잇는 곳에 단을 세웠다.

  1979년에 양진재를 안동시 수상동에 복원하였으며 순천 김희철(金喆熙)이 양진당기를 짓고 진성 이가원(李家源)이 유허비문을 지었다. 상량문은 후손 대묵(大墨)이 지었다.

아들

淮伯(회백), 淮仲(회중), 淮順(회순), 淮叔(회숙), 淮季(회계)

 

<양진당>

공목공 유운(遺韻)

久負江湖約  오래 강호의 언약 저버리고

紅塵四十年 홍진에 묻힌 사십년이었네

白鷗如欲笑 백구는 웃고 싶어 하는 듯

來近釣磯邊 가까이 낚시터까지 오네

 

寄姜廉使-정몽주 지음

憶昔同登竹嶺關

옛날 그대와 함께 죽령관에 올랐던 일 생각나네

高歌一曲動雲間

  소리 높여 한 곡 부르니 구름 사이에 진동하였지

至今夜夜相思夢

  이제까지 밤마다 그대 그리는 꿈을 꾸었지

千望相尋七點山 천리 밖 칠점산을 찾곤하였지

공목공 찬(교관 석하 지음)

氣度恢弘     기개와 도량이 넓고 크며

風采嚴重     풍채가 엄정하도다

蒼門建節     동북면 관찰사로

范孟博之澄淸 범맹박의 청렴이오

紫樞柄機     자추 병기는

司馬光之勳業 사마광의 훈업이로다

제于廊廟     낭묘에 올라

重新晉國之封 진국(진원군) 봉함에 거듭 새롭게 했고

大其門閭     그 문려를 크게 하니

果驗于公之德 우공의 덕이 과연 징험 있도다 

 

  

 봉양사

동별사에는 공목공과 아드님 5형제분이 배향되어 있다

  

 

사적명

오룡골(五龍谷)

사적명

원정공 하즙(河楫)공 유허비

소재지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소재지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도로변

교통편

 

교통편

기타

통정공 5형제(휘 회백, 회중, 회순 회숙, 회계)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오룡골이라 부르며 봉양사가 중건되었다.

기타

원정공은 우리 공목공(강 시)의 장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