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명

박사공 7세 통계공(휘 회중) 산소

사적명

경덕재(통계공 재실)

소재지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교통편

구파발 전철역에서 봉일천행 버스를 타고 관산동(서울아파트 다음 정거장)에서 하차(14분 소요) 다시 도보로 4분거리

기타

양군을 감싸고 있는 산천을 살펴보면 북으로는 장령산이 솟아있고 동쪽으로 대자산 서쪽에는 견달산과 고봉이 있으며 남으로는 여현이있다. 하천은 심천과 덕수천이 각각 동서로 흘러간다. 산세를 살펴보면 조산은 금성체로 둥근 달이 떠오르는 듯한 기상이며 그 뒷산에 기이한 봉우리와 수려한 묏부리는 시동이 서있는 듯 멀리 솟아있어 만대가 꽃이 활짝 피는 기이한 형국이다.

景德(경덕)은 큰 덕이란 뜻으로 선조님의 위업을 뜻하므로, 후손들은 마땅히 선조의 묘당을 우러러보고 선조님의 아름다운 가르침을 이어받아 후손들도 큰 덕업을 일으키라는 뜻이다. 시향-음 10월 4일

아버지

 蓍(시)

 형-淮伯(회백) 동생- 淮順(회순) 淮叔(회숙) 淮季(회계)

 淮仲(회중)<박 7세>  불사이군의 표상, 고려 보문각 대제학 지내

 ?∼1421 자는 중보(仲父), 호는 통계(通溪). 1373년(공민왕 22) 군자시승(軍資寺丞)으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최영장군을 따라 염흥방(廉興邦), 이희필(李希泌), 변안렬(邊安烈) 등과 함께 탐라도를 토평하였다. 이 사실이 탐라지(耽羅誌)에 실려 있다. 1379년(우왕 5) 전농시승(典農寺丞)이 되었다.목은 이색(李穡)에게 사사(師事)하였으며, 순흥군 안종원(安宗源)과 판후덕부사 윤진(尹珍)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382년(우왕 8) 유량(柳亮) 방에 진사문과에 급제하였다.  

  1685년 처음 간행된 남한보를 비롯한 현존하는 모든 보에는 봉익대부 보문각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면서 한 때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다가 지금의 묘소가 있는 관산동 지척에 고봉산 배록동(排祿洞)에 은거하였다. 조선 태조가 형조참판, 병조참판, 병조판서에 임명했지만 불응하였으며, 1421년 세종대왕이  총제(摠制)에 임명했지만 역시 출사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717년 도정공(휘 필효)가 지은 경덕사기(景德祀記)에 의하면 승지공(휘 彙玉)이 정조(正祖) 임금을 모실 때 임금이 "너의 조상이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으니 왕의 말은 반드시 증거가 있어 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후인들이 제나라 왕촉(王촉)과 한나라 엄자릉(嚴子陵)의 충절에 비겨도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1390년(공양왕 2) 12월 사헌부 집의, 1392년 군자윤(軍資尹)이 되고 4월 정몽주가 살해되자 김진양(金震陽 좌상기상시 역임,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실패한 고려 충신)의 옥사에 연루되어 형과 함께 유배되었으며, 조선이 건국되자 이색과 더불어 결당모란(結黨謀亂)하였다는 죄로 본향에 안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392년(태조 원년) 7월 정도전의 교서를 유사(有司)가 상고하기를 "우현보, 이색, 설장수, 강시, 강회중 등 56인이 고려 말에 도당(徒黨)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해 서 화단(禍端)을 일으켰다"하여 통계공의 직첩을 회수하고 본향에 정배(定配)하였다.

  7년간 네 차례나 유배당해

  1399년 임금이 또 출사를 권했지만 불응하자 태형(笞刑)에 처하고 다시 본향에 정배하고 동년 4월에 3번째 출사를 권했지만, 역시 불응하자 이번에는 외방(外方)에 귀양보냈다. 같은  해 5월 조선이 개국한지 7년이 지나도록 통계공의 절의를 꺾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유사(宥赦)하였다.

  저서로는 전해고문진보지(箋解古文眞寶誌)가 있다.    

배위

군부인 의령 南氏(남씨), 아버지는 판사(判事) 남징(南徵), 1남을 낳았으며 묘는 통계공의 왼쪽에 있다. 

군부인 전주 崔氏(최씨) 통정대부 성주지사(星州知事) 최영(崔寧)의 따님이다. 할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 완성군(完城君) 최을의(崔乙義), 증조할아버지는 전교서승 최사검(崔思儉), 외할아버지는 판사 남양 홍보현(洪普賢)이다.  묘는 고양군 덕수(지금의 고양시 오금동 일대)인데 실전하여 통계공 우측에 봉단을 세웠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자좌(子坐)에 있다.   묘는 오랫동안 실전되어  후손 응교 세백(世白 1748∼1824)이 상주시 신봉동 241번지에 사우를 세우고 경덕사(景德祠)로 이름지었고 후손 세마 필효(必孝)가 글을 짓고 썼다. 그러나 1958년 두영(斗永), 재락(在洛), 석희(奭熙), 도희(道熙)가 적성으로 지석(誌石)을 찾아 다시 환봉하였다. 

아들

安壽(안수),  安福(안복) 安命(안명)

재각

1960년 통계공파보를 발간하여 비와 재각을 다시 세웠다. 신도비명은 안동 김윤동(金潤東)이 짓고 묘표(墓表)는 후손 맹희(孟熙)가 지었다. 행장은 후손 신혁(信赫), 경덕재기는 욱원(旭元), 재각 상량문은 봉희(鳳熙)가 지었다. 1977년 경덕사(景德祠)는 봉강서원(鳳崗書院)으로 승격되어 인주 장병규(張炳逵)가 글을 지었다. 1990년 후손들이 힘을 모아 서원을 중건하여 묘역을 정화하고 석의를 갖추었으며 진성 이원영(李源榮)이  중건기를 지었다. 1998년 11월 22일 후손 민창(玟昌), 신복(信福), 신홍(信洪) 등이 앞장 서고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묘소 앞에 경덕재(景德齋)를 중건하였다.

  

 

사적명

숭의문

사적명

신도비

소재지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소재지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通溪公(휘 淮仲) 유운(遺韻 남긴 시)

旅창첨雨故難聽 여관에서 빗소리 듣기가 괴로운 것은

況復斑衣趨鯉庭 색동옷 입고 부모님 계신 곳에 가고파서다

夢似秋雲歸不住 꿈은 가을 구름같이 돌아가기를 멈추지 않으니

愁隨春酒醉無醒 시름은 봄 술에 취하여 깸이 없어라.

江山此日頭將白 이곳에서 오늘날 나의 머리 희려하니

骨肉何時眼更靑 형제를 어느 때에 다시 반갑게 볼 것인가

宦路險夷曾歷識 벼슬길 험난한 줄 일찍 알았다면

是身天地一浮萍 이 몸은 천지의 한낱 부평초인걸. 

 경덕재 마루 

  

 

사적명

 경덕재 중건 기념비

사적명

통계공 시제 올리는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