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명

박사공 8세 참판공(휘 안복) 산소

사적명

참판공 배위 인천 이씨 산소

소재지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소재지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판서공 묘 위

교통편

교통편

기타

시향-음 10월 5일

기타

시향-음 10월 5일

아버지

 淮仲(회중)

 형-安壽(안수) 동생-安命(안명)

 安福(안복)<박 8세> 문과 급제자만 50여 명 조선조에 배출시켜

 1457년(세조 3) 8월 주부(主簿)를 역임하고  원종 3등공신(原從三等功臣)이 되었다. 그후 조봉대부(朝奉大夫) 형조도관(刑曹都官) 정랑(正郞)을 역임했고 손자 지(漬)의 귀(貴)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고  다시 손자 징(징)의 귀(貴)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위

증 정부인 인천 李氏(이씨)이며 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판서를 지내  이효례(李孝禮), 조부는 찬성 대제학 증 영의정  공도공(恭度公) 이문화(李文和), 증조부는 전공판서 이심(李深), 외조부는 부윤 안동 권숙(權肅)이다.

묘는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손좌(巽坐)에 있으며 묘석이 있다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내서산 감악동에 있다.

  한때 실전하여 11세손 필복(必復)이 이곳에서 훈장을 하면서 묘를 찾는데 성심을 쏟아 1749년 다시 묘를 찾았다. 7년 뒤인 1756년 11세손 문헌이 문중에  알리고 다시 봉축하였으며  옛 비가  훼손되어  다시 비를 세웠다. 11세손 관찰사 윤(潤)이 묘음기를 짓고 효헌공 유(游)가 글씨를 썼다.   묘음기 보기    사적비명 보기

 1970년대에 묘역 태반이  군부대에 징발되고 재사를 옮기었다. 1980~85년 9파(九派) 후손이 파보를 발간하였으며, 1985년 가을 묘역을 정화하고 비를 다시 세웠다. 13세손 계흠(桂欽)이 추도문을  짓고  방후손 성균관 전학 정희(正熙)가 글을 썼다. 1998년 대대적으로 묘역을 정화하여 전국에서 참배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묘소 앞에 서면 멀리 도봉산 뒷자락이 보인다.  

아들

利纘(이찬) 利仁(이인) 利誠(이성) 利敬(이경) 利順(이순)

 利行(이행) 利興(이흥) 利溫(이온) 利恭(이공)

  

 

사적명

참판공(휘 안복) 산소 전경

사적명

사적비(1999년 입비)

소재지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소재지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