贈 兵曹參判 晉州 姜公 安福 世蹟碑

  증 병조참판 진주 강공 안복 세적비

公의 성은 姜씨요 이름은 安福이며 본관은 晉州로 태종 때에 태어났다. 1457년 8월 主簿(주부)로 좌익원종 3등공신이 되고 그후 朝奉大夫(조봉대부) 刑曹都官(형조도관) 正郞(정랑)을 지냈다. 돌아가신 뒤 나라에서 장손 漬(지)의 공적을 귀하게 여겨 吏曹參議(이조참의)에, 다시 손자 징(징)의 공적을 귀하게 여겨 종2품 兵曹參判(병조참판)으로 추증하였다. 이로 인하여 공을 참판공이라 부른다. 세조 때 이곳 가마골 남향에 잠드시었다. 묘소는 여러 번의 전란 때문에 실전되어 오랫동안 돌보지 못하다가 1749년 11세손 必復(필복)의 지성으로 다시 찾았다. 1756년 옛 비가 훼손되어 다시 세우면서 11세손 관찰사 潤(윤)이 墓陰記(묘음기)를 짓고 오늘에 이르렀다.       

  배위 증정부인 仁川李氏이며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판서를 지낸 孝禮(효례)의 따님이며 찬성 대제학 증 영의정 恭度公(공도공) 文和(문화)의 손녀이다.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따로 모셨다.

  公의 시조는 598년 고구려 영양왕 9년 수 나라와의 제1차 전쟁인 임유관 전투에서 수나라 30만 대군을 무찌른 고구려 병마도원수 姜以式(강이식) 장군이다. 박사공파조 1세는 啓庸(계용)으로 1274년 고려 원종 15년 국자박사를 역임하고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진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공의 7대조다. 6대조는 내급사공 引文(인문)으로 문과 급제하였으며 전중내급사를 역임했다. 5대조는 어사공 師瞻(사첨)이며 감찰어사를 지냈다.

  공의 고조부는 진원부원군 昌貴(창귀)이며 판도정랑을 역임하고 아들의 공적으로 중대광 문하시중의 증직을 받았고, 진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증조부는 문경공 君寶(군보)이며 1336년 고려 충숙왕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 문하좌시중을 역임하고 봉산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文敬(문경)이다. 조부는 공목공 蓍(시)이며 1357년 공민왕 6년에 성균시에 급제하고 삼중대광 상의문하찬성사에 오르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恭穆(공목)이다. 안동도호부사 재직시에 거처하였던 양진재와 유허비가 경북 안동에 있다.

  공의 아버지는 통계공 淮仲(회중)이며 1374년 공민왕 23년 젊은 나이에 군자시 승에 임명되어 최영장군이 탐라를 평정할 때 함께 참전하였다. 1382년 우왕 8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보문각 대제학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개성 두문동을 거쳐 고양 배록동 고봉산에서 은거하였다. 태조 즉위 후 7년 동안 형조, 병조참판, 병조판서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조는 1392년 7월 통계공을 본향에 안치시켰고, 1398년 태조 7년 3월에는 태형에 처했고, 4월에는 외방으로 귀양보냈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충절을 끝까지 꺾지 못하고 1398년 5월 17일 풀어주었다. 1421년(세종 3) 6월 4일에 별세하였다. 이러한 통계공의 道學節義(도학절의)가 훗날 우리 강씨가 조선조에서도 명문 벌족이 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상주 봉강서원과 전남 장성 경현사에 배향되었고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경덕재 뒤편에 있다.    

  공의 어머니는 전주최씨 통정대부 성주지사 영(寧)의 따님이며, 밀직사동지사 完城君(완성군) 乙義(을의)의 손녀이다.

  公은 아홉 아드님을 두었는데 항렬자가 "이(利)"자이기에 후세인이 구리파(九利派)라 하고 1963년에 세운 재각을 九慕齋(구모재)라 부른다.

  장남 영선군(永善君) 이찬(利纘)은 1477년 생원에 오르고 이조정랑을 역임했으며 아들 지(漬)의 공적으로 증 순충보조공신 이조판서 영선군(永善君)에 봉해졌고, 배위는 경주이씨 승지 문환(文煥)의 따님과 연일정씨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인 直長 순(恂)의 따님이다.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함께 모셨다. 차남 사직공 이인(利仁)은 사직(司直)을 지냈고 배위는 전주이씨 전주현감 윤(潤)의 따님이다. 3남 별좌공 이성(利誠)은 어모장군 예빈시 별좌(別座)를 지냈으며 배위는 창녕성씨 문과급제한 문치(文治)의 따님과, 전주이씨 사직 백창(伯昌)의 따님이다. 묘소는 전주시 덕진구 호성동에 쌍분으로 모셨다. 4남 군위공 이경(利敬)은 1459년 진사에 오르고 남이장군과 함께 여진족을 토벌하고 돌아와 통훈대부 군위현감이 되었으나 1468년 남이장군 옥사에 연루되어 역모죄로 참화를 당했다. 이때 나머지 8형제도 전국 각처에 유배당했으나 1484년(성종 15)에 모두 사면되었다. 배위는 거창신씨 이조판서 후갑(後甲)의 따님이다. 묘소는 함양군 유림면 국계리 화장산 동쪽 산기슭에 함께 모셨다. 5남 주부공 이순(利順)은 어모장군 훈련원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배위는 하양허씨 부사 경(敬)의 따님이다. 묘소는 파주군 광탄면 혜음현 북쪽 산기슭에 쌍분으로 모셨다. 6남 판서공 이행(利行)은 현신교위 충무위 부사맹을 지냈으며 아들 징(징)의 공적으로 이조판서 오위도총부 도총관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배위는 양천허씨 군수 증 영의정 양천부원군 손(손)의 따님이다.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어머니 묘소 아래에 있으며 쌍분이다. 7남 생원공 이흥(利興)은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배위는 음성박씨 판사 계금(繼金)의 따님과 연일정씨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인 司果(사과) 신(愼)의 따님이다. 묘소는 실전하여 강화도 도감동에 단을 모셨다. 8남 진천군 이온(利溫)은 진사에 합격하고 이조참의 겸 경연참찬관을 지내고 승정원 도승지로 1495년 연산 원년 왕의 혼정을 직언, 관직을 박탈당했다가 다시 임명되었다. 1504년 연산 10년 왕이 집현전에서 흥청한 일을 任채홍사에게 직언한 것이 왕을 능멸한 죄, 즉 승명패를 범했다하여 참형을 당하였으나 중종반정 후에 사면되고 순충보조공신에 봉해졌으며 전주 용진사(龍津祠)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전주시 구이면 무악산 아래 두방동에 모셨다. 배위는 언양김씨 현령 효진(效震)의 따님으로 묘소는 오금동 선영 아래에 있었으나 실전되어 두방동에 단비를 세웠다. 9남 판관공 이공(利恭)은 돈령부 판관을 지냈으며 배위는 남양홍씨 무과급제 지사 임(任)의 따님이다.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영내에 모셨으나 찾지 못하여 단을 세웠다.

  公은 손자를 25명을 두셨는데, 장남 영선군의 아들 지(漬)는 고산리첨절제사로 고산리에서 대적을 평정하여 절충장군 정평부사가 되었으며 중종반정 후 정국공신이 되어 영선군(永善君)에 봉해지고 강계, 삼척부사, 중추부동지사를 역임했다. 사후에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소정(昭靖)이며, 부조묘가 오금동에 있다. 흡(흡)은 무과급제 절충장군 司直(사직)으로 연산조에 화를 당해 진주에 은거했다. 차남 사직공의 아들 유신(惟信)은 유생이며, 형(泂)은 중직대부 김해부사이다. 3남 별조공의 아들 황(璜)은 통훈대부 성환찰방이다. 4남 군위공의 아들 금재공 한(漢)은 16세 때 성종에게 아버지의 무고함을 고하여 사면되게 하였고, 학식과 예모를 갖춘 명필가로 백의로 사신접반사를 지내고 장례원 판결사를 지낸 후 함양에 은거하였으며 귀천서원에 배향되었다. 5남 주부공의 아들 호(灝)와 제(濟)는 유생이며, 섭(涉)은 주부를 지내고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증직되었고, 빈(濱)은 진사에 오르고 연산조에 해주로 낙향하였으며 후에 통례원 좌통례에 증직되었다. 6남 판서공의 아들 징(징)은 문과급제 후 부제학을 역임하고 좌부승지 때 연산군에게 직간하다가 낙안으로 유배되었고 중종반정으로 정국원종공신이 되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성절사와 하정사로 명나라에 두 번 다녀왔으며 지중추부사, 예조참판에 올랐다. 연(淵)은 진사로 전연시 별제, 인(인)은 18세에 진사가 되고 20세에 현감을 역임했다. 7남 생원공의 아들 문달(文達)은 진사에 오르고, 문우(文遇)는 사과를 지냈다. 8남 진천군의 아들 숙(淑)은 진사에 올라 수안군수를 역임하고 부친이 화를 당하자 곡성에 은거했다. 담(澹)은 진사에 올라 참봉을 지내고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홍(洪)은 문과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교리를 지내고 중종반정후 정국공신 청원군에 봉해졌다. 부(溥)는 좌랑, 옥(沃)은 문과급제하여 홍문관 좌랑, 사간원 대사간을 지내고,  수(洙)는 무과급제 사과를 역임하고 필(泌)은 생원에 오르고, 잠(潛)은 진사에 오르고 현령을 지냈다. 9남 판관공의 아들 식(湜)은 한성부 판관, 유(洧)는 창신교위 충무위 부사직을 지냈다.       

  참판공은 많은 선덕을 쌓아 후손들이 번창하여 현재 무려 30여 만 명을 헤아리며, 문과급제자만도 52명이나 배출되었다. 공의 5세손 개암공 익(翼), 6세손 태백오현 정민공 흡(洽) 등은 학덕으로, 5세손 충렬공 위빙(渭聘), 증참의공 흥업(興業) 등은 병자호란 때 공훈으로, 6세손부 남평문씨는 시아버지 위귀(渭龜)와 남편 봉령(鳳翎)이 임란 때 순절하자 자결하여 나라에서 충효렬을 기려 정려를 내리니 삼강문이 세워졌다. 15세손 승지공 휘옥(彙鈺) 등은 이름난 청백리로 문중을 빛냈다. 이외에도 수많은 영걸들이 배출되었지만 아쉽게도 그 이름을 다 적지 못하고 손자 대까지만 적었다.

  진주강씨가 고려시대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서도 빛나는 문중이 되었고, 오늘날 동방의 큰 성씨로 자리하게 된 것은 후손들이 참판공의 효경(孝敬)을 배우고 윤기(倫紀)를 바로 세워 조상의 얼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1998년 봄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공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묘역을 정화하면서 아홉 그루 나무를 심어 구리수(九利樹)라 하고, 숭조 돈목을 위해 전 후손들이 뜻을 모아 공의 세적을 만대에 알리고자 이 비를 세운다.

               1999년 11월 12일

                                             진주강씨 참판공(휘 안복)파종회

이 비는 尙求(秀吉), 政求(秀東), 東求(秀一), 命求(秀榮) 4형제의 헌성금으로 건립되었고 세적비문은 종회장 희설(熙卨)을 비롯한 세적비건립추진위원들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