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 병조참판공(휘 안복) 묘비음기

   우리 10대 조고 증직 참판부군 휘 안복(安福)은 진주 강씨로 아버지는 대제학 통계(通溪) 휘 회중(淮仲)이시고, 조부는 공목공 휘 시(蓍)이오, 증조부는 문경공 휘 군보(君寶)이시며 원수공(元帥公) 휘 이식(以式)은 시조(始祖)이시다. 어머니는 전주 최씨(全州 崔氏)이시며 성주사를 지내신 휘 영(寧)의 따님이시다. 공은 도관정랑(都官正郞)의 벼슬을 지내셨는데 손자 지(漬)의 귀(貴)로 하여금 증직으로 이조참의를 받으시고, 후에 또 손자 징(징)의 귀(貴)로 말미암아 증직을 더하여 병조참판을 받으셨다. 배위는 인천 이씨(仁川 李氏) 예조판서 휘 효례(孝禮)의 따님이니 서산(西山) 오금리(梧琴里)에 각각 장사하였다.

  아들이 아홉인데 이찬(利纘)은 증직 이조판서요, 이인(利仁)은 사직이요, 이성(利誠)은 별좌요, 이경(利敬)은 현감이요, 이순(利順)은 주부요, 이행(利行)은 증직 이조판서이니 즉 불초의 선조고(先祖考)이요, 이흥(利興)은 생원이요, 이온(利溫)은 증직 이조참의요, 이공(利恭)은 판관이시다. 여러 번의 전란을 겪음으로 인하여 분묘를 돌보지 못하여 자손된 사람의 부끄러움이 오래였다. 숭정(崇禎) 기사(己巳)년에 10세손 필복(必復)이 여러 해동안 지성으로 살펴서 분 묘를 찾아뫼셨다.

  그 후 7년이 지난 을유(乙酉)년에 20세손 문헌(文憲)이 문중에 통고하여 옛빗돌을 없애고 다시 고쳐 세웠다. 옛 비에는 글자가 뭉크러지고 흐려서 글자의 획을 근근히 알수 있었으나 빗돌 앞면 글에는 조봉대부 도관정랑이라 새겨져 있었다. 도관정랑은 우리 국조의 관제(官制)를 보건대 그를 상고할 바를 볼 수 없었다.

  선묘(宣廟)시에 관제를 고쳤으나 형조도관 정랑을 장례원 판결사로 고쳐졌다. 또한 옛 비석에 있는 조봉의 벼슬은 확실히 상고할 바 주저됨이 있다. 가승(家乘)에 형조정랑으로 지금의 비석에는 형조정랑으로 쓰여 있는고로 지금의 비석에는 형조정랑이라 쓰고 또한 불초가 나이 많고 항렬이 높은 탓으로 비음기를 쓰도록 촉탁하거늘 불초 생각하니 부군의 어질고 아름다운 행실을 연대 멀고 상고할 수 없어 감히 한 말도 기록을 못하며 삼가 그 당시 연원한 근본과 자손의 경사스럽고 번창함을 기록하니 부군의 후손들은 참고할지어다.  

                                                                              후손 관찰사(觀察使)  潤(윤) 지음

                                                                                            전  좌승지   游(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