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閥族 진주강씨 박사공파 |
공목공 연보 ㅣ 강씨 상계 ㅣ공목공 묘지명 ㅣ 발간사 및 축간사 ㅣ 편집후기 ㅣ 문과급제 ㅣ ㅣ 계보도 ㅣ ㅣ용어 ㅣ 항렬 ㅣ |
||
|
|
도시조 以式 대동보 1-1 |
파시조 啓庸계용 박사공파조 국자박사(지금의 중앙국립대 교수) |
||
문과(文科)
급제, 국자(國子) 박사(博士) 역임. |
|
(휘 사첨)은 증조부, 진원부원군(휘
창귀)이 조부로 기록된 것을 전거로 소목을 세웠다. 묘는
잃어버려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증손 진원부원군 묘가 있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마을 뒤 용덕산 임좌에 봉단과 비를 세웠다.
|
2世 引文인문 하(河) 좌복야와 교우 |
||
문과(文科)
급제, 전중(殿中) 내급사(內給事) 역임 |
|
10만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은 일본 하까다(博多)에 상륙하려다 1차에
이어 또다시 폭풍우를 만나 싸우지도 못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고 돌아왔다. |
3世 師瞻 사첨 아버지 유훈따라 벼슬 사양, 감찰 어사에 머물러 |
||
고려
충렬왕 때 전중(殿中)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역임했다. 손자
군보(君寶)의 공적으로 판내의령참리부사(判內議令叅理副使)에
증직되었다. |
|
나 병란으로 잃어버렸다. 1776년(영조 52) 17대손 응교(應敎) 세백(世白)이 비문을 짓고 단을 세웠다. 1801년(순조 1) 진주 봉산사(鳳山祠)에 배향하고 경신년에 구비의 자획 다수가 희미하여 단 옆에 묻고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묘정을 정화하고 단비를 고쳐 세웠다. |
4世 昌富 창부 박사공의 3대 사손 고려 말 무신 |
||
고려
말 무신(武臣), 음직으로 정용위(精勇衛)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
|
영에 단을 세웠다.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묘정을 정화하고 옛 비를 계단 아래 묻고 봉단하였다.
|
5世 璜寶황보 5世 畋寶전보 *국자
박사:국자감 교수 |
|
파시조 啓庸계용 일본원정전(日本遠征戰) 제1차 정벌 |
||
원나라는 1274년(충렬왕 즉위) 25,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제1차 일본원정을 단행하였다. 고려도 군사 8,000명, 뱃사공 6,700명이 동원되었고, 전함 900척과 군량미를 부담하였다. 합포(合浦: 마산)에서 출발한 여·원 연합군은 쓰시마·이키섬을 정벌한 뒤 다시 기타큐슈(北九州)의 다자이부를 |
|
공략하기 위해 히젠에 도착하여 하카타·하코자키·이마쓰
등지에 상륙하였다. 연합군은 도처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마침 강한 태풍이 불어 연합군은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고 합포로 철수하였다. |
2세 引文인문 원(元)의 일본 정벌 때 죽을 고비, 유학(儒學)을 일삼지 말라 훈계 |
||
그처럼 위험한 일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들은 다시는 선비의
재주를 나타내지 말라”하여 자손들이 과거를 보지 않았다.
공목공(휘 시) 묘지명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이 사실이 실려
있다. |
|
묘는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손자 진원부원군 묘가 있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마을 뒤 용덕산 임좌(壬坐)에 봉단과 비를 세웠다.
17세손 교관 석하(錫夏 1644~1707)가 지은 찬사가 전해져 온다.
|
3세 師瞻 사첨 배위는 문정공 나주 정가신(鄭可臣)의 딸 |
||
배위(配位)는 금성군부인(錦城郡夫人) 나주정씨(羅州鄭氏), 아버지는 삼한삼중대광 수사공 금성부원군 문정공 가신(可臣), 할아버지는 증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장군 송수(松壽)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증중봉대부 예빈경 종산(宗産), 외할아버지는 대부(大府) 소경(少卿) 죽산 안홍우 |
|
(安洪祐)이다.
옛날 보책에는 배위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았으나 나주정씨(羅州鄭氏)
병진, 계묘 양보책에 실려 있어 대동보편찬위원회의 결의에
의거 실었다. 16대손 교관 석하(錫夏 1644~1707)가 지은
찬사가 전해져 온다. |
4世 昌貴 창귀 선세 가업 계승토록 아들에게 과거 응시토록 허락 |
||
1360년
별세, 음직으로 판도정랑(版圖正郞)에 오르고, 1346년(고려 충목왕
2) 계림판관(鷄林判官)으로 부임하여 경북 영천(永川)으로 이거하였다.
아들 군보(君寶)의 공적으로 삼중대광 문하시중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증직되었다. |
|
15일(향년 86), 아버지는 합문지후 윤보(允保), 할아버지는검교장군 금자광록대부 상서 좌복야에 봉해진 자여(子輿), 증조할아버지는 상서 좌복야 상장군 수홍(守洪)이다. 묘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마을 뒤용덕산 임좌(壬坐)에 쌍분
|
5世 君寶군보 *음직(蔭職):공신 또는 5품 이상의 신하의 자손에 게 주던 관직, 3품 이상 신하에게는 사위, 동생 등에게 벼슬을 내리던 제도. *부원군(府院君):종친 및 정1품 공신에게 내리던 작호 *증직(贈職):공신, 충신, 효자, 학덕이 높은 사람 등에게 사후에 관직을 주거나 높여 주는 벼슬 제 도 |
|
|
|
|
2세
引文인문 일본원정전(日本遠征戰)
제2차 정벌 |
|
900척은 모두 고려의 부담이었다. 중국 강남지역에서 차출된 강남군은 중국총 병력 10만 명에 전함 약 3,500척이었다. 동로군은 1차 때와 같이 합포를 출발, 이키도를 비롯하여 규슈 연안의 여러 섬을 공략하고 하카타를 향했으며, 강남군은 중국 강남을 출발 |
3세 師瞻 사첨 敎存鯉庭
貴含光而混世 가르침은 이정에 있고 혼세에 빛 감추는
걸 귀히 여겨 |
||
4세 昌貴 창귀 묘는
쌍봉이며 후손 교관 석하(錫夏)가 찬사(贊辭)를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묘역을 정화하고 구비는 계단
|
어사공(휘 사첨) 봉단 |
|
쌍매당
이첨(李詹 1345~1405)이 지은 강정당모씨합장제문(姜政堂母氏合葬祭文)에서
|
파시조 啓庸계용 경남 합천 갑산 도선영 ▼
|
||
2세 引文인문 하여 규슈 연안의 오지마(應島)에서 동로군과 합세하여 다자이부를 향하여 공격하였다. 하지만 다시 태풍을 만나 인명과 함선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제2차 일본원정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
|
|
진양 하씨 경태보에 내급사공이 하정승과 교우한 사적이 실려 있음 박사공(휘 계용)의 아드님인 내급사공(內給事公)이 복야(僕射 고려 정2품직)를 지낸 진양(晉陽) 하공(河公)과 종유(從遊: 학덕이 있는 사람과 사귐)한 기록이 진양 하씨(晉陽 河氏) 景泰譜(경태보 1451년 문종 1년 간행)서문에 실려 있다. |
|
……有姜給事 贈詩我先世 稱之以河僕射 諱亦不知 悲嘆也…… ……姜給事(내급사공 姜引文)라 하는 분이 우리 선조에게 시(詩)를 지어 주면서 河僕射(하복야)라 일컬은 일이 있는데 (하복야의) 이름자를 모르니 한스럽다.…… |
진원군(휘 창귀) 찬--교관 석하 지음 |
|
4世 昌壽창수 |
先志克遵
선대 뜻을 잘 따라
|
|
삼사(三司) 좌윤(左尹)을 역임했다. 1381년 지어진 딸의 시;아버지인 윤구생(尹龜生)의 처 묘지명에는 우윤(右尹)으로 기록되어 있다.
|
|
사위 尹紹宗 윤소종 무송인(茂松人) 병조전서 수문전학사(修門殿學士)를 역임했다. 아버지는 효자 판전농시사 구생(龜生), 할아버지는 찬성사 율정(栗亭) 택(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