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閥族 진주강씨 박사공파

공목공 연보  강씨 상계 공목공 묘지명  발간사 및 축간사  편집후기  문과급제    계보도   용어  항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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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조 以式    대동보 1-1

파시조 啓庸계용   박사공파조 국자박사(지금의 중앙국립대 교수)

  문과(文科) 급제, 국자(國子) 박사(博士) 역임.   
   1274년(충렬왕 즉위) 여몽 연합군의 1차 일본 정벌시 아들 내급사공과 함께 일본을 다녀왔다.
 1401년 겨울 대제학 양촌 권근(權近)이 지은 공목공(휘 시) 묘지명에 박사공은 공목공의 5대조부, 내급사공(휘 인문)은 고조부,  어사공

 

(휘 사첨)은 증조부, 진원부원군(휘 창귀)이 조부로 기록된 것을 전거로 소목을 세웠다.   묘는 잃어버려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증손 진원부원군 묘가 있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마을 뒤 용덕산 임좌에 봉단과 비를 세웠다.
 

2世 引文인문   하(河) 좌복야와 교우

  문과(文科) 급제, 전중(殿中) 내급사(內給事) 역임
  1281년(고려 충렬왕 7) 5월 원나라가 2차 일본을 정벌할 때 길과 방향을 잘 안다하여 고려군 도독사(都督師) 김방경(金方慶)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다시 기용되어 일본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10만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은 일본 하까다(博多)에 상륙하려다 1차에 이어 또다시 폭풍우를 만나 싸우지도 못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고 돌아왔다.
  공은 수차 죽을 고비를 겪고 본국으로 돌 아와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후손들에게“내가 학자가 아니었더라면

3世 師瞻 사첨  아버지 유훈따라 벼슬 사양, 감찰 어사에 머물러   

  고려 충렬왕 때 전중(殿中)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역임했다. 손자 군보(君寶)의 공적으로 판내의령참리부사(判內議令叅理副使)에 증직되었다.
  묘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마을 뒤 용덕산 임좌(합천군지에 기록 있음)에 있었으

 

나 병란으로 잃어버렸다.   1776년(영조 52) 17대손 응교(應敎) 세백(世白)이 비문을 짓고 단을 세웠다. 1801년(순조 1) 진주 봉산사(鳳山祠)에 배향하고 경신년에 구비의 자획 다수가 희미하여 단 옆에 묻고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묘정을 정화하고 단비를 고쳐 세웠다.  

4世 昌富 창부   박사공의 3대 사손 고려 말 무신

  고려 말 무신(武臣), 음직으로 정용위(精勇衛)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방손 교관 석하(錫夏 1644~1707)가 찬한 비음기(碑陰記)가 있다.
  묘는 실전되어 1776년(영조 52) 17세 방손 응교(應敎) 세백(世白)이 비문을 짓고 합천 선

 

영에 단을 세웠다.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묘정을 정화하고 옛 비를 계단 아래 묻고 봉단하였다.


 대장군공(휘 창부) 봉단

5世 璜寶황보

5世 畋寶전보

*국자 박사:국자감 교수
*군(君):종친과 신하에게 주던 존호, 품계는 정1품   에서 종2품까지 있다.

 

 

파시조 啓庸계용  일본원정전(日本遠征戰) 제1차 정벌

 원나라는 1274년(충렬왕 즉위) 25,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제1차 일본원정을  단행하였다. 고려도 군사 8,000명, 뱃사공 6,700명이 동원되었고, 전함 900척과 군량미를 부담하였다. 합포(合浦: 마산)에서 출발한 여·원 연합군은 쓰시마·이키섬을 정벌한 뒤 다시 기타큐슈(北九州)의 다자이부를

 

공략하기 위해 히젠에 도착하여 하카타·하코자키·이마쓰 등지에 상륙하였다. 연합군은 도처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마침 강한 태풍이 불어 연합군은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고 합포로 철수하였다.
 

2세 引文인문  원(元)의 일본 정벌 때 죽을 고비, 유학(儒學)을 일삼지 말라 훈계

그처럼 위험한 일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들은 다시는 선비의 재주를 나타내지 말라”하여 자손들이 과거를 보지 않았다. 공목공(휘 시) 묘지명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이 사실이 실려 있다.
 

 

  묘는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손자 진원부원군 묘가 있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마을 뒤 용덕산 임좌(壬坐)에 봉단과 비를 세웠다. 17세손 교관 석하(錫夏 1644~1707)가 지은  찬사가 전해져 온다.
 

3세 師瞻 사첨   배위는 문정공 나주 정가신(鄭可臣)의 딸   

  배위(配位)는 금성군부인(錦城郡夫人) 나주정씨(羅州鄭氏), 아버지는 삼한삼중대광 수사공 금성부원군 문정공 가신(可臣), 할아버지는 증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장군 송수(松壽)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증중봉대부 예빈경 종산(宗産),  외할아버지는 대부(大府)  소경(少卿) 죽산 안홍우

 

(安洪祐)이다. 옛날 보책에는 배위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았으나 나주정씨(羅州鄭氏) 병진, 계묘 양보책에 실려 있어 대동보편찬위원회의 결의에 의거 실었다.   16대손 교관 석하(錫夏 1644~1707)가 지은 찬사가 전해져 온다.  
 

4世 昌貴 창귀   선세 가업 계승토록 아들에게 과거 응시토록 허락

  1360년 별세, 음직으로 판도정랑(版圖正郞)에 오르고, 1346년(고려 충목왕 2) 계림판관(鷄林判官)으로 부임하여 경북 영천(永川)으로 이거하였다. 아들 군보(君寶)의 공적으로 삼중대광 문하시중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영가군부인 안동 권씨(權氏) 1293년~1378년 5월

 

15일(향년 86), 아버지는 합문지후 윤보(允保), 할아버지는검교장군 금자광록대부 상서 좌복야에 봉해진 자여(子輿), 증조할아버지는 상서 좌복야 상장군 수홍(守洪)이다.

 묘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마을  뒤용덕산 임좌(壬坐)에 쌍분


진원부원군공(휘 창귀) 묘

5世 君寶군보

*음직(蔭職):공신 또는 5품 이상의 신하의 자손에   게 주던 관직, 3품 이상 신하에게는 사위, 동생    등에게 벼슬을 내리던 제도.

*부원군(府院君):종친 및 정1품 공신에게 내리던   작호

*증직(贈職):공신, 충신, 효자, 학덕이 높은 사람    등에게 사후에 관직을 주거나 높여 주는 벼슬 제   도

 

 


박사공 봉단

 


      갑산재<박사공 재실>             

2세 引文인문

일본원정전(日本遠征戰) 제2차 정벌
  원나라 세조는 1281년 제2차 일본원정을 단행하였다. 이때 원정군은 동로군(東路軍)과 강남군(江南軍)으로 편제되었다. 원·고려 연합으로 편성된 동로군은 총 4만 명이었는데, 그 중 1만 명이 고려인이었으며 전함

 

 

 

900척은 모두 고려의 부담이었다. 중국 강남지역에서 차출된 강남군은 중국총 병력 10만 명에 전함 약 3,500척이었다. 동로군은 1차 때와 같이 합포를 출발, 이키도를 비롯하여 규슈 연안의 여러 섬을 공략하고 하카타를 향했으며, 강남군은 중국 강남을 출발

3세 師瞻 사첨

敎存鯉庭 貴含光而混世   가르침은 이정에 있고 혼세에 빛 감추는 걸 귀히 여겨
仕止烏府 諒辭尊而居卑   오부의 벼슬 그쳐 높은 자리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있었네

小雅篇中 休歌鹿鳴之什  소아편 속의 아름다운 노래는 녹명장이요  

長安市上 競興馬悤馬之謠   장안 저자엔 총마 노래 흥겹네

4세 昌貴 창귀    

  묘는 쌍봉이며 후손 교관 석하(錫夏)가  찬사(贊辭)를
지었고 후손 진형(震馨)이 묘지(墓誌)를 지었다.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묘역을 정화하고 구비는 계단
아래에 묻고 비를 고쳐 세웠다.

 

          어사공(휘 사첨) 봉단

쌍매당 이첨(李詹 1345~1405)이 지은 강정당모씨합장제문(姜政堂母氏合葬祭文)에서
진산부원군공(휘 창귀) 졸년과 배위 영가군부인 출생년도와 졸년이 확인되었다.

파시조 啓庸계용                                                 경남 합천 갑산 도선영 ▼

              

2세 引文인문

하여 규슈 연안의 오지마(應島)에서 동로군과 합세하여 다자이부를 향하여 공격하였다. 하지만 다시 태풍을 만나 인명과 함선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제2차 일본원정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내급사공(휘 인문) 봉단

진양 하씨 경태보에 내급사공이 하정승과 교우한 사적이 실려 있음

 박사공(휘 계용)의 아드님인 내급사공(內給事公)이 복야(僕射 고려 정2품직)를 지낸  진양(晉陽) 하공(河公)과 종유(從遊: 학덕이 있는 사람과 사귐)한 기록이 진양 하씨(晉陽 河氏) 景泰譜(경태보 1451년 문종 1년 간행)서문에 실려 있다.

 

……有姜給事 贈詩我先世 稱之以河僕射 諱亦不知 悲嘆也……

……姜給事(내급사공 姜引文)라 하는 분이 우리 선조에게 시(詩)를 지어 주면서 河僕射(하복야)라 일컬은 일이 있는데 (하복야의) 이름자를 모르니 한스럽다.……

진원군(휘 창귀) 찬--교관 석하 지음

 

4世 昌壽창수

先志克遵     선대 뜻을 잘 따라
恥隨貢於計吏 계리된 것을 부끄러워 했으나
下位終屈     낮은 지위도 마침내 굽혀
甘晦跡於潛郞 잠랑으로 기꺼이 자취 감추었네
張侯之官不成 장후의 벼슬 이루지 못한 것이
豈非天意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랴
王氏之福未艾 왕씨의 복이 끊이지 않아
大昌雲仍     후손이 대창했네.

 

 

 

  삼사(三司) 좌윤(左尹)을 역임했다.

  1381년 지어진 딸의 시;아버지인 윤구생(尹龜生)의 처 묘지명에는 우윤(右尹)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위 尹紹宗 윤소종   무송인(茂松人)

  병조전서 수문전학사(修門殿學士)를 역임했다. 아버지는 효자 판전농시사 구생(龜生), 할아버지는 찬성사 율정(栗亭) 택(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