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강씨 도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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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姜以式 장군

                                    경남 진주시 상봉동 봉산사

                       강씨(姜氏) 종사(宗史)

연대 및 국사대사전   

 수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 구국의 명장

 

  도시조(都始祖) 姜以式(강이식) 장군은 서기 598년(고구려 영양왕 9) 수나라와의 「임유관(臨渝關) 전쟁」에서 정병 5만을 이끌로 수나라 군사 30만명을 섬멸시킨 고구려 장수였다.  

598년 고구려 영양왕9

*임유관:지금의 산해관 서북쪽에 있는 곳으로 고구려와 수나라가 서로 차지하려던 군사적 요충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의하면 「임유관 전역(전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진(陳)을 합병하고 중국을 통일한 다음 17년 동안 풍년이 들고 군대가 넉넉하자 고구려를 침략할 야욕으로 590년(평원왕 32년) 국서(외교문서)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이 지극히 모욕적이고 위협과 야유로 차있었다.

  “짐(수나라 문제)이 하늘의 명을 받아 온 천하를 다스리면서 고구려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긴 것은 백성을 잘 다스려서 사람으로서 그 천성을 다하게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使節)을 보내 조공하였으나 비록 번부(藩附 떨어진 지방)라 일컫기는 하지만 성의가 부족하다.

  고구려왕은 이미 짐의 신하로 짐의 덕을 배워야 함에도 말갈족을 핍박하고 거란족을 등용치 아니하고 신첩(臣妾)으로 만들고 짐에게 조공하는 일을 막다니 이 어찌도 해가 심한가, 작년에는 몰래 병사를 늘리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은 무엇을 뜻함인가?

  고구려가 영토가 좁고 백성이 소수이니 고구려왕을 내쫓고 반드시 다른 속관(屬官)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씻고 행동을 바르게 하면 짐의 충신이니 어찌 속관을 두랴. 고구려 왕은 다시 한 번 생각하라, 요수(遼水 고구려 영토 안에 있는 강)가 넓다한들 장강(長江 양자강)과 비교할 것이며, 고구려 병사가 많다한들 진(陳)나라 병사만도 못하다.

  짐이 마음만 먹으면 한 명의 장군을 보내어 힘 들이지 않고 고구려를 멸할 수 있지만 순순히 타이르니 고구려 왕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중국은 이웃나라 제왕의 별세는  매번  그 사실을 보고 받은 해에 기록하므로 그 사실이 발생한 연도를 틀리게 기록하는 것은  춘추시대 이래의 습관이므로 수나라 역사책에 이같이 잘못 기록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평원, 영양왕 두 본기의 연대는 고기(古記)를 쫓고 서로 관계된 사실은 오로지 수나라 책에서 뽑았기 때문에 수나라 책에서 이 글이 평원왕에게 보낸 글이라 했으므로 삼국사기에서는 이 글을 평원왕 32년에 옮겨 기재하여 연대를 그르치는 동시에 관계된 인물까지 잘못 기록한 것이다.

 

 강이식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해야”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을 받고 몹시 노하며 여러 대신들을 모아놓고 회답할 글을 의논하였으나 강이식(姜以式) 장군이 “이와 같은 모욕적이고 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할 글이다”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왕이 쾌히 따르며 강이식 장군을 병마원수로 삼아 정병 5만 명을 거느리고 임유관으로 향하게 하고 예(濊:수나라 역사책에서는 말갈) 군사 1만 명으로 먼저 요서(遼西)를 침공하여 수나라 병사를 유인하며, 거란병 수천 명으로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에 두 나라 사이에 첫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듬해(598년) 고구려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수나라 요서총관 위충(韋沖)과 접전하다가 임유관(臨渝關)으로 유인하기 위해 거짓 패하니 수나라 문제가 30만 명 대군을 동원하여 한왕(漢王) 양량(楊諒)으로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임유관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주라후(周羅睺)를 수군총관으로 삼아 바다로 나아가게 하여 평양을 치려한다고 소문을 내었으나 실은 군량미를 실은 배를 이끌고  요해로 들어와 30만 양량(楊諒)의 대병에게 군량을  대어주려 함이었다.

  강이식이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바다 가운데로 수군을 거느리고 들어가 주라후를 맞아 양선을 완전 격파한 다음 군사에게 성벽을 지키고 싸우지 말라고 명하였다.

  수나라 병사들은 양식이 바닥이 나 굶어죽고 6월에 장마를 맞아 질병으로 사망자가 어지럽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퇴군하자 강이식이 이를 임유관 상류에서 추격하여 수나라 병사를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를 얻고 개선하였다.

597년 고구려

영양왕 8년

 

*신채호(申采浩):독립운동가, 언론인, 1929년 일제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별세했다.

 

*짐:임금이 자신을 칭하는 대명사

 

 

 

 

 

 

 

*삼국사기:고려 김부식이 지은 역사책

 

*평원왕:재위 기간

(559~ 590)

                       강씨(姜氏) 종사(宗史)

연대 및 국사대사전   

수나라 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해 다시는 출병치 않아

 

  수나라 역사책에서는 “양량의 군사는 장마철에 질병을 만났고, 주라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퇴각할 때 사망자가 10중에 9”라 하여 “자연의 불가항력에 의해 패한 것이요, 고구려 군사에 의해 패한 것이 아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체면을 숨기기 위한 춘추필법이니 임유관 전쟁은 물론이요, 살수전쟁의 기록도 이 같은 춘추필법으로 기록한 것이 많다.

  

  여하간 임유관 전쟁 이후에 수나라 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출병치 않았다. 두 나라가 휴전 조약을 맺고 상품 무역을 재개하고 10여 년 동안 양국 사이에 싸움이 없었다.

  604년에 수나라 문제가 죽고 양제(煬帝)가 즉위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어 각지의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였다. 607년 양제는 마침 돌궐에 와 있던 고구려의 사신에게 “고구려의 왕이 입조하지 않으면 짐이 마땅히 출순(出巡:침입한다는 뜻)할 것이다”라고 야유했다. 613년 11월 동양 역사 이래 일찍이 없던 1,133,800명의 대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양제는 살수대전에서 대패하고 만다. 이로써 양대 전쟁인 임유관, 살수 전쟁에서 패한 수나라는 결국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국내에서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역사책에서는 임유관에서 고구려 군사가 수나라 30만 대병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은 기록하면서도 마땅히 그 전쟁에서 고구려 군사를 지휘하여 대승을 거둔 장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수나라가 수륙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했는데 가     만히 있을 고구려가 아니다. 필시 이에 맞서 싸웠을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고구려 군사를 지휘한 장군이 있었을 터인데 이 부분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다만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지은 조선상고사에서만 강이식 장군이 임유관 전쟁에서 대승한 고구려 장군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건무:영양왕의 이복 형제로 다음에 영류왕이 되었다.

*요서총관:요서지역 사령관

*한왕:황제 아래 지역별로 왕을 두었다.  

*행군대총관:보병총사령관

*수군총관:해군사령관

*춘추필법:중국의 체면을 위하여 치욕스러운 역사적 사실은 적지 않는 필법  

613년 영양왕 24년

                       삼국사기와 수서, 자치통감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평원왕 32년 조()에 이와 관련된 기록을 참고로 옮겼다.

三十二年(삼십이년) 王聞陳亡(왕문진망) 大懼(대구) 理兵積穀(리병적곡) 爲拒守之策(위거수지책) 隋高祖賜王璽書(수고조사왕새서) 責以雖稱藩附(책이수칭번부) 誠節未盡(성절미진) 且曰(차왈) 彼之一方(피지일방) 雖地狹人少(수지협인소) 今若黜王(금약출왕) 不可虛置(불가허치) 終須更選官屬(종수갱선관속) 就彼安撫(취피안무) 王若洒心易行(왕약쇄심역행率由憲章(솔유헌장) 卽是朕之良臣(즉시짐지량신) 何勞別遣才彦(하노별견재언) 王謂遼水之廣(왕위요수지광) 何如長江(하여장강) 高句麗之人(고구려지인) 多少陳國(다소진국) 朕若不存含育(짐약불존함육) 責王前愆(책왕전건) 命一將軍(명일장군) 何待多力(하대다력) 殷勤曉示(은근효시) 許王自新耳(허왕자신이) 王得書惶恐(왕득서황공) 將奉表陳謝而未果(장봉표진사이미과) 王在位三十二年冬十月薨(왕재위삼십이년동십월훙) 號曰平原王(호왈평원왕)  

32년 진() 나라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평원왕은 대단히 두려워하였다. 왕은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국방을 강화할 대비책을 세웠다. () 나라 고조(高祖)는 평원왕에게 조서를 보내 "비록 스스로 번방이라고 하면서도 성의와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라고 책망하였다. 그리고 또한 이르기를 "그대의 나라가 비록 국토가 좁고 인구도 적지만 이제 내가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그대로 비워둘 수는 없을 것이므로 결국은 다시 관리를 선택하여 그곳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씻고 행동을 고쳐서 우리의 법도를 따른다면 그 때는 곧 나의 좋은 신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왜 힘들여 다른 인재를 보내겠는가? 요수(遼水)의 넓이가 장강(長江)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고구려 인구가 진() 나라와 비교하여 어떠한지를 왕은 말하여 보라. 내가 왕을 용서하려는 심정이 없고 왕의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기로 한다면 한 사람의 장군에게 정벌을 명령해도 될 것이니 어찌 큰 힘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간곡한 말로 타이르는 뜻은 왕이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바꾸도록 하려는 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평원왕이 이를 보고 황공하여 표문(表文)을 올려 사의(謝意)를 표하려다가 실행하지 못하고 재위 32년 겨울 10월에 붕어하였다. 호를 평원왕(平原王)이라 하였다.

是開皇十年(시개황십년) 隋書及通鑑書高祖賜璽書於開皇十七年(수서급통감서고조사새서어개황십칠년) 誤也(오야) 이 때는 개황 10년이다. 수서(隋書)와 통감(通鑑)'高祖開皇 17년에 조서를 주었다'는 기록은 잘못이다.

<의견>위의 전문(全文)은 수서(隋書) 려전(麗傳)에 실려 있는 것을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일부 인용한 것이다. 빠진 것을 살펴보면 고구려가 병기를 수리하기 위하여 몰래 수 나라 노장(弩匠)을 재화를 주고 데려갔다. 수나라 사신을 공관에 감금하다시피하여 정탐을 막았다. 고구려가 자주 기병(騎兵)을 동원하여 수나라 변방 사람들을 죽였다.

개황 10년은 590년에 해당한다. 수나라가 581년에 북주(北周)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나라는 5()16() 중에서 마지막 진()을 평정하여 한()나라가 망하고 약 400여 년간 계속되었던 혼란과 분열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 통일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