恭穆公(휘 蓍)派譜  자료집

공목공 연보  강씨 상계 공목공 묘지명  발간사 및 축간사  편집후기  문과급제  진사생원   계보도  관직표 용어  항렬 

 

 

발간사

會長 姜 昌 秀

박사공파 역사는 공목공 묘지명에서 출발

족보는 동일 혈족의 원류를 밝히고 계보(系譜)를 이어 종적으로는 시조로부터 현재의 동족원까지의 세계(世系)와 관계를 알 수 있고, 횡적으로는 현재의 동족 및 상호간의 혈연적 친소원근(親疎遠近)의 관계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대대로 조상의 사적을 기록한 족보는 후손들은 가통의 계승을 명예로 삼아 자신의 정체성을 성취해 가는데 중요한 길잡이가 되는 역사서입니다.    박사공파 역사는 1400년에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공목공(휘 蓍)의 묘지명에서 비롯됩니다. 공목공은 고려 말 문하좌시중을 지내신 文敬公(휘 군보)의 맏 아드님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찬성사에 올랐습니다. 다섯 아드님을 두었으며, 장자는 통정공이오, 차자는 통계공이며, 소감공, 재신공 그리고 막내 아드님 공민왕 부마 진원군공입니다.

  공목공은 박사공 6세로 우리 문중을 동국 제일의 문벌로 자리 매김하신 위대한 선조님이십니다. 그러나 해방 직후 남북 분단으로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공목공의 묘소가 비무장지대에 위치하게 되어 지금까지 근 60여 년간 묘소를 살피지 못하고 연천 강내리 통정공 묘역에 단비를 세우고 시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인공위성 사진을 통하여 비무장지대에 있는 공목공 묘소 위치를 확인하였습니다. 공목공 묘가 있는 산지가 공목공파 종중 소유임에는 틀림없으나 현재 그것을 증명할만한 증빙서류가 없으며 북한 측에 그 근거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통일 후 산지를 매입하거나 불하를 받아야 합니다. 이때를 준비하여 80만 후손들은 모름지기 심기일전하여 2008년 12월 27일 발기인대회를 거쳐 2009년 1월 18일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공목공파 종중을 구성하였습니다. 1927년 공목공파보를 발간한 이래 80년만에 첫 번 째 사업으로 공목공파보(한글, 한문 병행 책자와 인터넷 전자 족보)를 발간하고 그 잉여금으로 다음과 같은 사업을 추진하고자 한다.

   1. 공의 향화제전소(香火祭典所) 탐방

   1. 공의 위업(偉業)을 발굴 창달

   1. 공의 사우(祠宇)인 옛 유산재(酉山齋) 중건(重建)

  아울러 진주강씨 최초 한글판 족보인 목공파보는 우리 후손들이 누구나 쉽게 읽고 선조님들의 위업을 알 수 있도록 하여 일가간의 화목을 돈독히 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첨언합니다.

  끝으로 본 파보 발간에 불철주야 노고가 많은 임원진과 협조를 아끼지 않는 전국 각 지파 관계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발간에서 오자(誤字)∙탈자(脫字)를 비롯해 누락되었거나 본의 아니게 사실이 왜곡된 부분이 있으면 계속 수정ㆍ보완해 올바른 선조님의 사적이 계승되기를 바랍니다.

     2012년 7월  일

                             진주강씨 공목공(휘 시)파종중 회장 昌秀 근서     

한글족보와 인터넷 전자족보는 시대적 사명

 

족보란 한 씨족의 혈연관계를 알기 쉽게 도표식으로 나타낸 한 문중의 혈통 계보(系譜)입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은 족보를 집안의 가보(家寶)로 여겨왔으며, 병란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족보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의 발달로 나타난 종족의 족보에 관한 지식이나 학문 즉 보학(譜學)이 등장하여, 사림과 양반들은 친족

都廳 姜 信 權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고 신분적 우위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것을 필수 교양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정보 산업의 발전으로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다보니 사람들이 혈연(血緣) 공동체의 가치를 등한시하게 되었고 20세기 말을 정점(頂點)으로 문중 발전은 내리막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양 국면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혈연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기고, 애족(愛族)의 당위성을 일깨워 주는 데는 문중의 역사서인 족보만한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IT 기술을 응용하여 인터넷 상에서 전자족보를 보고 책으로 된 한글 족보를 읽게 되면 그동안 무관심했던 선조님의 사적(事蹟)을 알게 되어 후손들이 문중에 관심을 갖게 되어 강한 진주강씨를 만들 수 있으며, 문중(門中)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박사공 6세 공목공을 빼놓고 박사공파를 일러 말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공목공 선조님은 동방대성 진주강씨의 중흥조(中興祖)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세기 이상 동안 공목공파 문중이 구성되지 않아 박사공파 90% 이상 차지하는 공목공 후손들이 이 분의 아드님이신 통정공, 통계공은 알면서 정작 아버지 되시는 공목공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셈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뒤 늦게나마 공목공파 종중을 구성하고 아울러 공목공을 현창하기 위해 공목공파보를 발간하여 공목공 선조님이 남기신 위업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글 족보와 인터넷 전자족보는 일찍이 없던 획기적인 대역사로 문중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며 문중의 역사 교과서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80만 공목공 후손들은 진주강씨 최초 한글 족보인 공목공파보 발간에 참여하여 후손된 도리를 다 합시다.  

 

     2012년 7월  일

                                   진주강씨 공목공파보청 도청 信權 근서     

축간사

전 중앙종회장

姜 太 秀

 

 

 

 

 

 

 

 

 

 

 

 

 

 

 

 

 

 

 

 

축하합니다.

 

박사공파 중흥조 문경공 장자 공목공 파보 발간

 

一千四백여년 전 고구려 영양왕에게 中國 수나라 문제는 모욕적인 서신을 보내왔다. 고구려 영양대왕이 참석한 百官(백관) 회의 석상에서 고구려 구국聖將(성장)이신 以자 式자 시조님은 書答不要(글로 답할 것이 아니라) 以劍可答 (칼로 답할 것을) 주장하시었다.

이 어찌 萬古壯語 (만고장어) 가 아니겠는가!

시조님은 병마원수로 고구려 정예군 五萬을 거느리고 수나라 三十萬 대군을 맞아 임유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시고 살수대첩에서는 병마 도 원수 되시어 30만 병력을 지휘하여 수륙양면에서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무찌르셨다.

휘 운기 선조님을 위시하여 강감찬, 강민첨 장군에 이어 고려사에 姜門은 찬란하고 영롱한 빛이 되시었다. 후손인 우리는 그처럼 위대한 구국공신의 시조님과 명문거경의 후예다.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듯이 門中 족보 역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고 다양한 문헌연구와 단일본이란 씨족 정신이 함축된 결정체이다. 이와 같이 선조님들의 업적과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하는 작업을 쉼 없이 이어오는 승조상문의 맥을 수많은 역대 선조님들의 헌신과 忍苦(인고)의 결실로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이 時代는 70세 이하의 기준으로 보면 한문의 퇴폐로 눈뜬 봉사 시대다. 하여 한글과 한문은 양비론에 휩싸여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많이 읽고 이해하는 것이다. 한글로 표기된 강감찬 장군의 비명(碑銘)이 그와 같은 이유다.

현대는 한글이 정착된, 인터넷 시대다.

공목공 휘 시(蓍) 할아버지의 종중에서 「공목공(휘 시)파보」를 한글화하는 책을 만드는데 축사 요청을 받고 보니 가을 햇살처럼 姜門의 후손들은 후예의 의무를 다 한 듯 반가움이 앞선다. 공목공 종중에서 만드신 한글판 족보는 새로운 역사적 시각으로 뜻있는 책이 되기를 축원하며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2012년 7월  일

전 중앙종회 회장   강 태 수 근식

종사(宗史)나  족보를  키보드만  누르면  볼  수  있는  세상

 

요즘 우리는 저녁에 태어난 이이들이 아침에 태어난 아이들과도 대화가 안 통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격변의 시대를 살면서도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한자를 중시하는 구세대와 한글∙영어를 중시하는 신세대 간의 양극화 현상입니다. 구세대는 컴퓨터 사용을 못하는 컴맹이고, 신세대는 한자를 모르는 한맹(漢盲)이 바로 그것입니다. 광복과 함께 밀어닥친 서구문물을 여과 없이 수용함으로써 우리민족 고유의 윤리도덕과 미풍양속은 물론 한자까지도 저버린 결과 3세대가 지나는 지금 가정과 학교교육이 무너지고, 전통과 문화는 물론 뿌리와 민족의식까지 실종되어 엄청난 내홍을 앓고 있습니다.  

  현대과학의 산물인 컴퓨터가 나오면서 인터넷을 통한 ‘가상 사이버’ 안에 각종 기록들이 무한정 저장되어 누구라도 손쉽게 열어볼 수가 있고, 자기만의 공간(Homepage)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모든 기록들이 전산화됨으로써 각종 보존문서나 서적들까지도 서고(書庫)와 같이 저장이 가능해 마음대로 열람할 수가 있어 사무실에는 캐비넷, 가정에는 책장(冊欌)이 사라지고 심지어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사무를 보는 세상이 됐습니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인 기기사용의 미숙과 무지무식(無知無識)의 부작용 또한 만만치가 않습니다. 가정마다 소중히 보존해 오던 한자족보(漢字族譜)나 선조님들의 사적자료(事蹟資料)들이 쓰레기로 사라지고 있지만 그 심각성마저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요즘 젊은 이 들입니다.

  이에 위기의식(危機意識)을 통감하고 젊은 세대들을 위해 인터넷 족보의 개발로 종사(宗史)나 족보(族譜)들을 컴퓨터 키보드만 누르면 손쉽게 찾아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가 명문벌족(名門閥族)의 후손으로 분수를 지키고 전통을 이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지 되돌아 볼 일입니다.

  조상의 음덕(蔭德)은 최소 3대까지 미친다고들 합니다. 후손들이 위선(爲先)과 선덕(善德)을 베풀어야 그 음덕을 받아 나와 자손들이 잘되고, 그래야 조상님도 빛이 나는 법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가 일심협력하여 명문을 이어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2012년  9월   일

                                    喜壽를 맞은  秀巖 熙 卨  

 

전 중앙종회장 대행

姜 熙 卨

 

 

 

 

 

 

 

 

 

 

 

 

 

 

 

 

 

 

 

 

 

 

신방문중

화수회장

姜 大 鎭

 

 

 

 

 

 

 

 

 

 

 

 

 

 

 

 

 

한글인터넷 족보는 청소년을 문중 주인으로 만들 것

 

천 갈래 갈렸어도 근원은 하나이며, 만 가지 뻗었어도

뿌리는 한 가지라. 항상 진주강씨임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천 여년이 지나도록 돈독스러운 친목으로 뿌리를 지켜 오면서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시대에 걸 맞는 한글족보 발간을 환영하고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시대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고, 지금도 변하고 앞으로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의 방식을 고집하지 말고 변화의 환경에 적응하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성공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번 한글족보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경사입니다.

 

  사실, 우리 가정에 있는 한문족보는 보관용으로서 몇몇 어르신들의 전유물 이었는데, 이번에 발간되는 한글족보는 인터넷 족보와 연결되어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친근하게 다가 갈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어, 아들ㆍ손자 온 식구가 같이 할 수 있는 가족 역사 백과사전의 역할을 다 할 것으로 여겨지며, 이를 계기로 우리 종중이 더욱 번창 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간 어려운 여건에서 오직 문중의 발전을 위하여 성심을 다하여

자료를 집대성하고 편집하신 편찬위원님들의 노고에 찬사와 감사를 드리며, 이룩하신 업적이 역사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8월

 

영천시 신방문중 화수회장  姜 大 鎭 근서

전자족보는 문중 발전의 새로운 동력이다!

 

저는 어려운 여건에서 시대의 사명감과 의지를 갖고 인터넷 전자족보 사업을 추진해주신 공목공(휘 시)파 종중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1956년생입니다만 70년대 말부터 전자공학을 전공하면서 일찍이 PC 등 H/W를 개발하고 S/W 프로그램을 연구개발한 경험을 갖게 되었으며, 90년 초부터 인터넷을 사용하게 된 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책이나 그림 등의 유형 자료 및 정보를 컴퓨터에서 입력하고 수정ㆍ편집ㆍ저장ㆍ관리하는 과정을 전자화 혹은 정보화 한다고 하며, 저장하는 매체는 디스켓ㆍCDㆍUSBㆍ하드디스크 등이 있으나 이것들은 자료를 재생하거나 검색하려면 물리적으로 갖고 이동해야 하는 단점이 있으며, 자료가 깨지거나 손상 우려가 있어 많이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인터넷을 이용한 웹하드ㆍ파일박스ㆍ클라우드 등의 가상서버에 보관 사용함으로써 이동성이나 편리성이 있어 빈손으로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 인터넷만 되면 입력ㆍ편집ㆍ갱신ㆍ저장관리가 보편화되어 많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터넷 이용환경에서 단순한 전자족보를 CD나 USB등으로 저장, 배포 관리하는 것보다 인터넷 기반의 전자족보가 진보되고 발전된 단계이며, 앞으로 기술은 단순한 한글, 한자 등의 텍스트 자료 이외에도 이미지, 동영상 등의 자료까지 자유롭게 편집ㆍ저장ㆍ관리되는 도구가 많이 활용되어 가족사나 일기ㆍ기사ㆍ앨범 등으로 전자족보가 발전될 것입니다.

  저는 40대 초반에 아버님(姜仁遠)을 따라 통정공, 문량공 시제에 참석하면서 족보에 눈을 뜨게 되어 왕징면 강내리, 시흥시 하상동, 아산 신수리 등 종산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자료와 사진 등을 컴퓨터 문서 파일(워드ㆍ엑셀ㆍ파워포인트 등)로 정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인터넷 전자족보사업의 장점과 내용 설명을 듣고, 통정공 1대로부터 22대까지 한글 혹은 한자로 족보 구축을 완료하였으며, 집안사람들이나 미국의 숙부님들, 사촌들에게 http://kangssi.kr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족보를 찾는 방법을 알려주어 지금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족보를 볼 수 있어 친척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문중의 새로운 세대들에 의한 인터넷전자족보 기술개발이 되고 문화가 되어 후손들에게 IT강국의 한국, IT 문중의 진주강씨에게 창조적 영광과 자랑스러운 문화를 물려주기 위해 우리 모두 전자족보사업의 확산에 참여하고 협조하는 데 앞장서 나가기를 제안드립니다.

     2012년 8월

문량공 후손

강호흔

(기가코리아 통신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