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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明朝鮮國贈諡恭穆姜公墓誌銘 幷序 공목공(恭穆公) 묘지명(墓誌銘) 좌찬성 陽村 權近(1352~1409)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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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文二年 冬 晉陽姜公淮伯以 其先子恭穆公行歷 來徵予墓碑之文曰 吾先君律己以勤 守官以愼 名實茂著而 可傳者 苟不於金石焉鑱之 是吾爲不子矣 因投杖稽顙而泣請 予以附葭 知公父子久 義不辭 謹按 公諱蓍 字某 晉陽之望族也 五世祖國子博士諱啓庸 其子殿中內給事諱引文 皆以儒顯 初 博士爲日本通信使書狀官 給事 從行 及至元東征之役 以給事曾知道里 又擧爲書狀 風濤險艱 且因兵交 瀕於死者屢矣 及還 不復仕 每戒子孫曰 吾非文士 不至歷險如此 爾輩毋復業儒也 故其子監察御史諱師瞻 孫版圖正郞諱昌貴 皆仕于吏 御史卽公之曾祖也 正郞後贈門下侍中晉原府院君卽公之祖也 鳳山君諡文敬諱君寶 卽公之考也 文敬性敏好學 晉原亦以儒術爲先世家業 許令登科 遂復爲儒 位至宰輔 以興其家吁 給事之戒子孫 特懲於一時之困爾 東征之士 葬魚腹而不返者何限 是豈儒哉 晉原之敎其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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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문(명 혜제의 연호) 2년(1400년) 겨울에 진양강공(晉陽姜公) 회백(淮伯)이 그 선친 공목공(恭穆公)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묘비문(墓碑文)을 청하면서 ‘우리 선친(先親)께서 자신을 다스림에 부지런했고, 관직을 수행함에 근신함으로써 그 명실(名實)이 드러나 후세에 전할 만하되, 실로 금석(金石)에 새기지 못한다면, 나는 자식노릇을 못하는 사람이다.’하고, 곧 지팡이를 놓고 엎드려 울며 간청하였다. 나는 먼 친척으로 공의 부자를 안 지 오래되므로 의리상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시(蓍)요 자는 매(某)이니, 진양의 명망 있는 집안이다. 5대조인 국자박사(國子博士) 휘 계용(啓庸)과 그의 아들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휘 인문(引文)은 모두 유업(儒業)으로 현달하였다. 처음에 박사가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었을 때 내급사공(內給事公)이 종행하였고, 지원(至元) 연간에 원 나라가 동정(東征) 즉, 일본을 정벌하려고 할 때에는 내급사공이 길을 잘 안다 하여 다시 서장관으로 기용(起用)되었는데, 풍파가 험악한데다가 전쟁까지 겹쳐 여러 번 죽을 고비에 빠졌었다. 돌아와서는 다시 벼슬하지 않고 자손에게 훈계하기를, "내가 문사(文士)가 아니었다면 그처럼 위험한 일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들은 다시는 유업(儒業)을 일삼지 말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 아들 감찰어사(監察御史) 휘 사첨(師瞻)과 손자 판도정랑(版圖正郞) 휘 창귀(昌貴)는 모두 관리로 벼슬했으니, 어사는 곧 공의 증조이고, 정랑공은 뒤에 문하시중 진원부원군(門下侍中晉原府院君)에 추증되었으니 곧 공의 조부이고, 봉산군(鳳山君)은 시호가 문경(文敬)이고 휘가 군보(君寶)이니 곧 공의 아버지이다. 문경공은 성품이 영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진원부원군 역시 유술(儒術)을 숭상하는 분이라, 선대의 가업(家業)을 위해 등과(登科)를 허락함으로써 드디어 유업을 회복하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러 그 가업을 일으켰다. 아, 급사공이 자손을 경계한 것은 특히 일시적인 고난을 징계함이다. 동정(東征)하던 사람들로서 물고기의 밥이 되어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매우 많은 데 이것이 어찌 다 유업을 숭상했기 때문이랴. 진원부원군공이 그 아들을 가르치고 |
文敬之興其家 天殆啓之 以雪其恨而昌其慶也歟 文敬娶鷄林金氏 典客令呂珎之女 以後至元己卯冬十有二月二十二日生 公至正丙戌 公年八歲 以門蔭補延陵直 十九中 丁酉成均試 壬寅 拜大官署丞 再遷郞將兼監察糾正 洊歷 典工佐郞,廣興倉使 治繁處劇 所至稱職 爲閣門引進副使 禮容中度加 朝列大夫 出知陜州 政績以著 典法,版圖,典理皆爲摠郞 中顯尹衛尉 中正三司左尹 奉順判軍器 出按江陵道 是洪武戊午秋冬也 明年己未 通憲判繕工 俄加奉翊 又明年 出爲安東大都護府使 文敬考終 丁憂甫及 期 起復左常侍 壬戌 轉版圖判書 未幾 入密直爲副使俄賜端誠輔理功臣之號 冬 遷匡靖大夫,判厚德府事兼判典醫寺事,上護軍 癸亥春 拜門下評理商議 冬 封晉山君 階重大匡庚午夏 匡靖大夫,判慈惠府事,上護軍同判都評議使司事冬 加授推忠補祚功臣,大匡商議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兼判繕工寺事,左右衛, 上護軍 此公歷官也 大夫人尙無恙 公兄弟及公之子 相繼入相府 赫赫耀一世 姜氏旣大振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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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공이 그 가업을 일으킨 것은, 하늘이 자못 길을 열어 주어 그 원한을 씻고 그 경사를 일으켜 줌이었으리라. 문경공(文敬公)이 계림 김씨(鷄林金氏)인 전객령(典客令) 여진(呂珍)의 딸에게 장가들어 그 후 지원(至元) 기묘년(충숙왕 복위 8, 1339) 12월 22일에 공을 낳았다. 지정(至正) 병술년(충목왕 2, 1346)에 공의 나이 8세라, 문음(門陰)으로 연릉직(延陵直)에 보임되고, 19세 때 정유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임인년에 대관서승(大官署丞)에 임명되었다. 낭장 겸 감찰규정(郞將兼監察糾正)에 두 번 옮겼고, 전공좌랑 광흥창사(典工佐郞廣興倉使)를 역임하였는데, 번잡한 일을 다스리거나 어려운 일을 처리함에 있어 이르는 곳마다 직책에 알맞게 하였다. 합문인진부사(閤門引進副使)가 되어서는 예다운 행동이 법도에 맞으므로 조열대부(朝列大夫)를 더하였고, 합주(陜州)의 지사로 나가서는 치적이 현저하였다. 전법(典法)․판도(版圖)․전리(典理)에 모두 총랑(摠郞)을 지냈고,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위위시윤(衛尉寺尹),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삼사좌윤(三司左尹), 봉순대부(奉順大夫)로 군기판관(軍器判官)을 역임한 다음, 강릉도 안찰사(江陵道按察使)로 나갔으니, 홍무(洪武) 무오년(우왕 4, 1378) 추동(秋冬)이었다. 이듬해 기미년에는 통헌대부(通憲大夫)로 선공판관(繕工判官)에 임명되었다가 조금 뒤에 봉익대부(奉翊大夫)를 더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가 되었다. 문경공(文敬公)이 작고하여 상사를 당한 지 겨우 기년(期年)이 되어 좌상시(左常寺)로 기복(起復)하였고, 임술년(우왕 8, 1382)에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전임되었다가 곧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들어왔으며, 얼마 뒤에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의 훈호를 하사 받고, 겨울에 광정대부 판후덕부사 겸판전의시사 상호군(匡靖大夫判厚德府事兼判典醫寺事上護軍)에 전임되었다. 계해년 봄에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에 임명되었다가, 겨울에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으니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이다. 1390년 여름에 광정대부 판자혜부사 상호군 동판도평의사사사가 되었다가, 겨울에 추충보조공신 대광 상의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판선공시사 좌우위 상호군을 더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경력이다. 대부인(大夫人)은 아직 무양하고, 공의 형제와 아들이 연이어 상부(相府)에 들어가 혁혁하게 한 세상을 빛내므로, 강씨가 크게 떨치게 되었다. |
歲壬申 公年五十四 大夫人乃卒 公廬墳三年 人嘉其孝 建文二年庚辰十一月二十六日 以病卒于茅 享年六十二 計聞命有司庇喪事 贈諡恭穆 明年二月甲寅 以禮葬于臨江縣之東原 公天性謹恪 風采嚴重 發言處事 務循禮則 事親以孝 繩家以儉 歷任中外 守法不阿 人多嚴憚之 夫人河氏 重大匡晉山君諡元正公諱楫之女 生男五人 長曰淮伯 丙辰科進士第 歷仕臺諫 以判密直 觀察交州江陵道 陞政堂文學 及還兼大司憲 以言事罷 己卯冬起爲正憲 出尹鷄林庚辰秋 東北面都巡問使 曰淮仲壬戌科進士第 嘉善洪州牧使 曰淮順 司宰少監 曰淮叔 諸衛將軍 曰淮季 己巳科進士第 重大匡晉原君 先公歿 孫男女若干人 政堂再娶鄭氏 重大匡蓬原君諱良生之女 先亡 生男 曰宗德 司憲監察 曰友德 監門衛散員 曰進德 女二人 長適權務金張 次幼 繼室李氏 重大匡平壤府尹 諱存性之女 生男二人 皆幼 牧使娶南氏 判事徵之女 生男 曰安壽 濟用庫注簿 少監 娶內侍全理之女 生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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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년(태조 1, 1392) 공의 나이 54세 때 대부인이 돌아가시었다. 공이 3년 동안 시묘(侍墓)를 살므로 사람들은 그 효행을 가상히 여기었다. 건문(建文 명 혜제(明惠帝)의 연호) 2년 경진(1400년 정종 2) 11월 26일에 본 집에서 병으로 별세하시니 향년이 62세다. 부음을 듣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상사를 돕게 하고 공목(恭穆)이란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듬해 2월 갑인일에 임강현(臨江縣) 동쪽 산기슭에 예장하였다. 공은 천성이 성실하고 풍채가 엄중하며, 발언하고 일을 처리함에 힘써 규칙을 따랐다. 효도로 어버이를 섬기고 검소함으로 집을 다스렸다. 중외의 관직을 역임하면서도 법대로 준행하여 아첨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매우 그를 두려워하였다. 부인 하씨(河氏)는 중대광 진산군(重大匡晉山君)인 원정공(元正公) 즙(楫)의 딸로 아들 다섯을 낳았다. 맏아들 회백(淮伯)은 1376년(병진년)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여 대간(臺諫)의 벼슬을 역임하고, 판밀직(判密直) 교주 강릉도 관찰사(交州江陵道觀察使)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으며, 돌아와서는 대사헌(大司憲)을 겸임하였다가 발언한 일로 파직되었다. 1399년(기묘년) 겨울에 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어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나갔으며, 경진년 가을에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둘째 아들 회중(淮中)은 1382(임술년) 진사과에 합격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홍주목사(洪州牧使)이며, 셋째 회순(淮順)은 사재소감(司宰少監)이며, 넷째 회숙(淮叔)은 제위장군(諸衛將軍)이며, 다섯째 아들 회계(淮季)는 1389년(기사년) 진사과에 합격하여 중대광(重大匡) 진원군(晉原君)이 되었는데, (역성혁명으로)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손자 손녀 몇 명이 있다. 정당(政堂) 강회백(姜淮伯)은 두 번 장가를 들었는데, 중대광 봉원군<蓬原君 이름은 양생(良生)이다>의 딸로서 먼저 세상을 떴다. 그가 낳은 아들 중 종덕(宗德)은 사헌감찰(司憲監察)이고, 우덕(友德)은 감문위산원(監門衛散員)이고, 다음은 진덕(進德)이다. 딸 둘 중 맏딸은 권무(權務)인 김장(金張)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어리다. 계실(繼室) 이씨(李氏)는 중대광 평양부윤(重大匡 平壤府尹) 존성(存性)의 딸로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목사(牧使) 강회중(姜淮中)은 판사(判事) 남징(南徵)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안수(安壽)를 낳았으니 제용고주부(濟用庫注簿)이며, 소감(少監) 강회순(姜淮順)은 내시(內侍) 전이(全理)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 데 |
幼 將軍 再娶安氏贊成事諱沼之女 生男女二人 洪氏無嗣 曾孫若干人 監察娶典書李廷堅之女 生男二人 皆幼 銘曰 維彼晉陽 有姓曰姜 世有儒顯王庭以揚 烈烈博士 海國是使其從以行 乃有孝子 孝子繼征風濤與兵 旣危旣險 瀕死而生戒子若孫 毋儒爾門 吾非以儒豈慄吾魂 子孫承訓 由吏而進三世復始 其家克振 顯允文敬積善之慶 公相承承 門閥之盛偉矣恭穆 威儀抑抑 率履不回邦之司直 有嗣其賢 欲傳可傳謁文大史 于墓是鐫 我辭非諛可以示後 彌千百年 永昭不朽
陽村先生文集卷之三十九
권근 저 양촌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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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며, 장군(將軍) 강회숙(姜淮叔)은 두 번 장가들었는데 안씨는 찬성사(贊成事) 안소(安沼)의 딸로서 아들과 딸 둘을 낳았으며, 홍씨(洪氏)는 후사가 없다. 증손 몇 명이 있다. 감찰(監察) 강종덕(姜宗德)은 전서(典書) 이정견(李廷堅)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저 진양(晉陽)에 강(姜)이란 성씨가 있어, 대대 유업(儒業)으로 현달하여 왕정(王廷)에 드날렸네. 열렬한 박사(博士) 해국(海國)의 사신이 되었는데 그를 따라 종행하는 효자가 있었네. 효자 뒤이어 갈 때 풍파와 군사에 휩싸여, 위태롭고 험난하여 거의 죽다 살아났네. 자손에게 경계하되 유업을 일삼지 말라, 내 유업이 아니었다면 그 어찌 혼비백산하였으랴 하였네. 자손들은 그 훈계를 받들어 관리(官吏)로만 진출하다가, 3대 만에 회복하여 문호를 떨치었네. 훌륭한 문경(文敬)은 적선(積善)의 보답으로 자손이 받는 경사라, 경상(卿相)으로 계승하여 문벌이 번창했네. 거룩한 공목공(恭穆公)은 예법에 맞는 몸가짐으로 장엄하고 실천에 어김없어 나라의 사직(司直)일세. 어진 후사 있어 전하고 본받을 만하니, 태사(太史)에게 글을 빌어 묘도(墓道)에 새기리. 내 아첨하는 말이 아니라 후세에 보일 만하거니, 천백 년이 지나도록 길이 밝아 썩지 않으리.
*양촌집에는 建文 三年으로 되어 있음 발언한 일:정몽주(鄭夢周) 등이 이성계(李成桂)를 제거하려고 간관(諫官) 김진양(金晉陽) 등을 부추겨,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 등이 변란을 꾸며 민심이 흉흉하다고 상소하여 탄핵할 때, 강회백도 대관(臺官)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정도전 등을 논핵한 일을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