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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강씨 고려 공목공(휘 蓍)파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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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공 5세 문경공(휘 군보) 장자 恭穆公(휘 蓍)派譜

                            

  

 

 

 

 

 

 

 

 

 

비무장지대에 있는 공목공(휘 시)묘소

 

찾고자하는 이름이 보이지 않으면 한글이나 한문을 써넣으십시오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7

 

5世 君寶군보      진주강씨 중흥조

  ?~1380년. 1344년(고려 충숙왕 5) 남궁민(南宮敏) 방 진사(문과)에 합격하여 1344년(고려 충무왕 즉위년) 정랑(正郞),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77년(우왕 3) 중추원첨서, 그 후 정당문학(政堂文學), 첨의평리 예문관 대제학, 삼중대광 문하좌시중에 오르고 봉산부원군(鳳

 

두 아들이 모두 재상(宰相)

山府院君)에 피봉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  “문경공은 천성이 영민하고 풍채가 늠름하며 학문을 좋아해 군의 향교에 나아가 공부하여 학문을 이루었다.”라고 17세손 첨지사 호부(浩溥 1690~1778)가 지은 장후서(狀後序)에 기록하고 있다. 대각(조정)에 나아가서는 5

 공목공(恭穆公)파시조

6世 다스리는 곳마다 칭송이 자자

  1339년 12월 22일~1400년 11월 26일, 자는 매(某), 호는 양진당(養眞堂). 8세에 집안 음덕으로 연릉직(延陵直)을 시작으로 19세 되던 1357년(공민 6) 정유 성균시 염흥방(廉興邦) 방에 급제하고, 1362년 대관서승을 거쳐 낭장을 두 번 지내고 감찰규정을 겸직, 전공좌랑과 광흥창사를 역임하

 

아들들을 경상(卿相)으로 키워

면서 번거로운 일을 신속 민첩하게 다스리어서 가는 곳마다 칭송이 자자하였다. 합문인진부사가 되어서는 행동을 예법에 맞도록 하여 조열대부의 품계를 더했으며, 외직으로 봉성대부 지합주사(知陜州事)에 부임하여 선정을 펴 전법판도전리(典法版圖典理), 모두 총랑에 오르고 중현대부로 위위윤

7世 淮伯 회백         고려 말 명신

  1357년~1402년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 1376년(우왕 2) 정총(鄭摠) 방 문과에 급제, 성균관 좨주(祭酒), 밀직제학, 1377년 밀직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첨서사사(簽書司事), 1379년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정몽주, 이숭인과 더불어 호복(胡服)을 화제(華制)로 바꿀 것을 건의

 

정당문학, 대사헌 역임

했다. 1389년 밀직사에 오르고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 호를  받았고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부족하다고 사양했다. 다시 승진되어 판밀지사사 겸 이조판서에 오르고, 교주 강릉도 관찰출척사, 1390년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정몽주가 주살

8世 宗德 종덕        고려가 망하자

  호는 물계(勿溪), 음직으로 감찰 역임, 고려가 망하자 안동 물계촌으로 이거하였다. 조선조에서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할 때 사헌부 장령(掌令)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묘는 경북 예천군 감천면 정전리에 있으며 방손 응교(應敎) 세백(世白)이 비음기를 지었다.

 

안동 물계촌에 은거

  배위는 경주 이씨(李氏), 아버지는 첨서밀직사사 월성군 정견(廷堅), 할아버지는 장작소감(將作少監) 육(毓), 증조할아버지는 월성부원군 경중(敬中), 외할아버지는 밀직부사 광산 김천리(金天利)이다.

 묘는 감천면 현내동 존당현 신좌(辛坐)에 있다.

 

9世 子愼 자신  

9世 子儀 자의  

9世 子保 자보  

9世 子儉 자검  

 

 

사위 鄭豫孫 정예손 목사, 아들 상(常)

사위 李承壽 이승수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7

 

5世 君寶군보 불의에 빠지지 않고 수신

조(충목, 충정, 공양, 우, 창)를 거치면서 경(敬)으로서 수신(守身)하고 효로서 부모 모시고 인(仁)으로 사물을 대하였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90 노모를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상을 마치고 별세하였다.

 

노모 앞에서 어린애처럼 즐겁게 놀아

  묘는 경남 고령군 성산면 어곡리 병좌(丙坐)에 있다. 한때 실전하였으나, 후손 동래부사 필리(必履 1713~?)가 적성을 다해 다시 찾았다.

  목은 이색(李穡), 양촌 권근(權近)이 지은 만사가 유사에 실려 있다.

 

6世 시      안동대도호부사 재직중

(衛尉尹), 중정대부로 삼사좌윤, 봉순대부로 군기시 판사를 지냈다. 1378년(우왕 4) 강릉도관찰사, 이듬해 통헌 판선공시에 제수되고 봉익대부(종2품)에 승진되고 1380년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가 되었을 때 아버지 문경공이 세상 떠나 장례를 마치고, 일 년만에 좌상시에 기용되었다.

 

아버지 문경공 세상 떠나

  1382년 판도전서로 전직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밀직부사가 되고, 단성보리추충 보조공신의 호를 하사받았다. 그 해 겨울에 광정대부 판후덕부사로 옮기어 판의전시사 상호군을 겸직하고 1383년 봄에 문하평리상의에 배명받고 겨울에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니 품계는 중대광(종1품)이다. 1390년

7世 淮伯 회백 정도전과 반목, 귀양 가

당하고 이성계의 일파인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과 반목하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진양에 귀양갔다. 뒤에 이태조의 강권과 멸문(滅門)을 막기 위해 모친 상중에 계림부윤에 나아가고 다시 동북면

 

동북면도순문사 역임

도순문사(東北面 都巡問使) 겸 병마수군절도사 영흥부윤을 지냈다. 손자 희맹(希孟)의 공적으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춘추관 성균관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증직되었다. 인품이 총명하고 의분(義奮)에 격하기를 잘 했다.

8世 友德 우덕        아들이 영의정

  1385년~1439년 자는 자보(子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비길 데가 없었는데, 6세에 어머니를 잃고, 18세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예를 다해 여막생활을 했다. 1400년 감문위산원(監門衛散員), 1415년(태종 15) 승사랑 의영고 주부, 그해 가을에 선무랑으로 예안현감(禮安縣

 

문경공(文景公) 맹경(孟卿)  

監)을 시작으로 5개 현감을 지내고, 내직으로들어 와 사온서령, 의영고사(義盈庫使), 한성판관, 1434년 창녕현사(昌寧縣事)를 거쳐 조산대부에 올랐다. 임지에서 돌아가시자 읍인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듯이 복상(服喪)하였다. 아들 맹경(孟卿)의 공적으로 증 의정부 좌의

9世 孟卿 맹경

9世 叔卿 숙경  

사위 曺 榮 조 영

  남평인(南平人) 참봉, 아버지는 부사(府使) 유인(由仁), 아들 걸(傑), 사위 사용 윤산석(尹

 

山石), 진사 이순(李諄)

사위 朴居謙 박거겸

  밀양인, 중추(中樞), 밀산군(密山君) 시호 평간(平簡), 아버지는 증호조판서 경빈(景斌), 조부는 검교참찬의정부사 의중(宜中). 사위는 군수 지중추 여흥 이증석(李曾晳)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8

 

 

5世 君寶군보 목은 이색, 양촌 권근이

  배위는 계림군부인 경주 김씨(金氏), 1392년에 별세했다. 아버지는 전객령 여진(呂珍),  할아버지는 태자첨사 천석(天錫), 증조할아버지는 은공(殷公)이다.

  묘는 경기도 임강현 대곡촌에 있었는데 실전하여 공의 묘 우측에 단을 세웠다.  

 

 

만사 지어 업적을 기려

6世 시    진산군, 문하찬성사 역임

(공양왕 2) 여름에 광정대부 판자혜부사 상호군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가 되고 겨울에 추충보조공신 대광상의문하찬성사와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 겸판선공시사(兼判繕工寺事) 좌우위 상호군의 직첩을 더하였다.

 

54세에 3년간 어머니 시묘

  1392년 어머니가 별세하니 나이 54세에 3년을 시묘살이를 하여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었다. 천성이 신중하고 정성스러웠으며 풍채가 엄중하며  언어와 처사를 예법에 따라 행하고 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집안을 다검소하게 다스렸다.  내외직 벼슬을 지냈으나 법을 지켜 아첨하지 않아 사람마다 엄격함을 두려워하고 존경하였다.

7世 淮伯 회백  여지승람, 명신열전에

저서로는 통정집(通亭集)이 있다. 경남 산청군 단속사에 어릴 때 형제들과 손수 심은 매화나무가 있는데, 공의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므로 사람들이 이 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고 부르고 정당매각(政堂梅閣)의 글은 진주 하룡(河龍)이 짓고 하원규(河元逵)가 썼다.  

 

사적이 실려 있어

  경주에는 경주부윤 이돈상(李敦相)이 지은 공의 기적비(紀績碑)가 있다. 기아(箕雅) 동문선(東文選), 여지승람, 여사 명신열전(麗史 名臣列傳)에 사적이 실려 있다.

  묘는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능촌산 유좌(酉坐)에 있다. 손자 진산군 희맹(希孟)이

8世 友德 우덕

정에 추증되었다.

  묘는 진양군 진성면 동산리 산16번지 술좌(戌座)에 있있다. 직제학 유의손(柳義孫)이 묘비문을 짓고진주 하동근(河東根)이 신도비명을 짓고 오천(烏川) 정직교(鄭直敎)가 전서를 아울러 썼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재령 이씨(李氏),  아버지는 지보주사 혜(蕙), 조부는 좌우위 중랑장 일상(日詳), 증조부는 보조공신 상호군 소봉(小鳳), 묘는 상하로 있다.

  묘역 사진 ⇒ 206

 

 

 

 

8世 進德 진덕    세종 때 문과급제

  자는 자수(子修), 호조좌랑으로 재직 중인 1427년(세종 9) 정미친시 문과 을과 3등으로 급제하여 1430년 병조정랑을 거쳐 세자필선, 1438년 사헌부 장령, 집현전 직제학 겸 지제교, 좌우부승지를 역임했다.

 묘는 경남 합천군 합천읍 서산리 보림촌 노

 

9世 민  

9世 치  

9世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8

 

5世 君寶군보  

 

 

 

 

장령공(휘 종덕) 묘→

 

 

6世 시           묘가 비무장지대에

  1392년  조선이 개국된 뒤 맏아들 회백(淮伯), 둘째 회중(淮仲)이 우현보, 이색, 설장수등과 고려 말 도당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했다고 직첩을 회수 당하고 먼 지방에 유배되었으나 뒤에 풀려 나왔다. 시호는 공목(恭穆)

  묘는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나부리 황학산유좌(酉坐)에 있

 

있어 안타까움 더해

 다. 양촌 권근(權近)이 묘지명을 짓고 목은  이색(李穡)이 양진당기(養眞堂)記)를 지었다. 고려사에 이 사실이 실려 있다1979년에 양진당을 안동시 수상동에 복원하였으며 순천 김희철(金喆熙)이 양진당기를 짓고 진성 이가원(李家源)이 유허비문을 지었다.

7世 淮伯 회백        하륜(河崙)과는

행장을 지었다.

  배위는 군부인 동래 정씨(鄭氏), 1390년 별세하였다. 아버지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양도공(良度公) 우곡(愚谷) 양생(良生), 조부는밀직 봉산군(蓬山君) 호(瑚), 증조부는 판도진사사 유의(惟義), 외조부는 찬성 문정공 순흥

 

동서지간

안축(安軸)이다.

  묘는 임강현 도원역 뒤에 있었으나 잃어버려 공의 묘 오른편에 단을 세웠다. 3남 2녀를 길렀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성주 이씨(李氏), 1445년에 별세했다. 아버지는 중대광 평양부윤 성

8世 進德 진덕 집현전 직제학 역임한

태산 기슭 묘좌(卯坐)에 여러 기의 봉분이 있으나 확증이 없어 후손들이 계단 아래 단을 세웠다. 방후손 승지 휘옥(彙玉)이 찬한 전의비(傳疑碑)가 있으며 재각이 있다.

  배위는 숙부인 문화 유씨(柳氏)이다. 배위의 아버지는 검한성사 원현(元顯), 조부는 문화군

 

학자로 세종의 치적에 큰 공 세워

진(鎭), 증조부는 찬성 장경공 돈(暾), 외조부는 파평군 윤해(尹侅)

  묘는 합장했다.

 

 

 

사위 鄭祖禹 정조우 광주인, 생원

  아버지는 장령 지하(之夏), 아들 승경(承敬), 승순(承順), 사위 원산군(園山君) 이행(李行)

사위 李貴美 이귀미  

  덕산인, 현감. 아버지는 소윤 사증(師曾), 아들 지간(之幹), 지림(之林), 사위 하여주(河汝

 

舟), 남예손(南禮孫)

사위 李信儉 이신검  

  용인인, 군수. 아버지는 부사 수강(守綱), 계자 현감 숙(塾)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9

 

 

       

어곡재(문경공 재실)

 

 

 

 

 

 

 

                    승지공(휘 진덕) 묘

6世 양촌 권근이 묘지명을 짓었고

  배위는 정신택주(貞愼宅主) 진주 하씨(河氏), 1338년에 태어나 1399년에 별세했다. 아버지는 진천군(晉川君) 원정공(元正公) 송헌(松軒) 즙(楫),  할아버지는 정용위 호군 직의(直漪), 증조할아버지는 사직 보(保), 외할아버지는 판밀직 철성군(鐵城君) 고성 이우(李瑀).

 

양진당기는 목은 이색이 지어

 묘는 경기도 파주군 보시리(普施里)에 있었으나 후에 대자암(大慈菴) 산록으로 옮겨 잃어 버렸다.

 

 

 

7世 淮伯 회백

산부원군 존성(存性), 조부는 낭장 향(嚮), 증조부는 대제학 흥안부원군 문충공 인복(仁復), 외조부는 시중 월성부원군 충렬공 경주 이성림(李成霖)

  묘는 공의 뒤편 유좌(酉坐)에 있다.

 

 

11세손 교관 석하(錫夏)가 지은 찬사

 

華嵩德望 奎璧文章

화산과 숭산 같은 높으신 덕망이

규성과 벽성 같은 빛나는 문장이라

烏堂擊奸秉 金矢而勵節

사헌부서 간신 칠 때 금살 같은 절개지켜

8世 碩德 석덕    시호는 대민(戴慜)

  1395년~1459년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 음보(蔭補)로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된 후 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가 되어 선정을 베풀고 그 공으로 인수부 소윤(仁壽府少尹)에 발탁되었다. 이어 집의(執義)를 거쳐 1416년 공조 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1423년

 

맏아들 희안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

(세종 5)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고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대사성에 오르고 1446년(세종 28) 이조와 형조의 참판, 대사헌를 역임하고, 1448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1449년 자헌대부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사후에 증 추충 충적보조공신 보국 숭록대부  

9世 希顔 희안  

9世 希孟 희맹  

9世 希曾 희증  

 

 

 

사위 南 俊 남준

  의령인, 현감. 아버지는 직제학 간(簡), 아들 증참의 염(恬), 생원 전(恮), 진사 회(恢), 대사간 율(慄), 문과 이조정랑 제(悌), 사위 우수(禹樹) 부사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9

 

공목공 봉단(연천 통정공 묘역 내)

 

            통정공(휘 회백) 묘

정당매

 

광풍정(경북 경주)

 

鳳閣論道調 玉鉉而贊元

정당문학 도를 강논함에 구슬 같은 원리 밝혀

趙靈王胡服之風陋矣

조영왕의 호복풍속을 더럽히니

其舊孔夫子周冕之制

그 옛날 공자님의 주의 예절과

煥然維新禮敎

예법을 교화하는데 환연히 유신했네

 

 

河鄭李 一時同修相業

하, 정, 이와 같이 배워 정승자리 이어감이

祖子孫 三世迭繼

조자손이 삼세였네

滄桑忽變以 明哲而保身

세상이 바뀌어도 밝은 지혜 보신하고

金火遽遷 當廢興而知命

역사가 달라질 때 망할 줄 미리 알았네.

8世 碩德 석덕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진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대민(戴慜)이다. 시(詩)와 글씨에 능했으며 문집이 있고 글이 기아 동문선, 여지승람, 해동명신록에 실려 있다.

  묘는 경기도 연천 능촌 선영 뒤쪽 우록 신

 

   

좌(辛坐)에 있으며 표석이 있다.

 아들 희맹(希孟)이 행장을 짓고 10대손 교관 석하(錫夏)가 찬사를 지었다. 영광 유림들이 세운 이흥사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청송 심씨(沈氏)이며 1458년에 별세,  아버지는  영의정 안효공 온

사위 辛 肅 신 숙  

  영산인, 내사시 소윤, 판사(判事). 아버지는 인(仁), 아들 문과 정랑 건(健), 사위 김수원(金壽元)

 

 

 

 

사위 金元臣 김원신  

  연안인, 부사. 아버지는 감사 수(修), 아들 부사 면(勉), 군수 여(勵), 문과 대제학 감(勘), 부윤 협(協), 참봉 훈(勛), 사위 김호(金濠) 직장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0

 

문경공 만사

 

年將七十侍慈顔

省宰庭中無袖斑

此時古今稀有事

凜然風采照鄕山

斐英臺閣躍氷顔

諳鍊非徒管豹斑

晩拜政堂封食邑

一時高議重於山

我生甫冠識公顔

鏡裏吾今兩鬂斑

千里末由親執紼

如聞薤曲動雲山

 

(목은 이색 지음)

 

칠십 나이 다 되도록 어머님 모시면서

재상집 뜰 안에서 색동옷 입고 춤을 추었네.

이야말로 고금에 드믄 일이 아닌가.

늠름한 그 풍채는 고향 산천 비추고

위엄 있는 얼굴로 조정에서 드날렸네

사리에 정통하여 전체를 못보고 일부만 보는 사람 아니네.

만년(晩年)에 정당 받고 식읍도 받으니

한 때의 높은 이론 태산보다 높았네

내 나이 약관에 공의 얼굴 알았는데

거울 속 내 귀밑 희끗희끗 변해졌네.

천리 길 멀고멀어 상여 줄 못 잡으니

해로곡이 구름 낀 먼 산조차 움직여 들리는 듯하네.

 

7世 淮伯 회백

 

 

 

 

사애각<경북 경주>→

 

 

8世 碩德 석덕

(溫), 조부는 청성백 정안공 덕부(德符), 증조부는 전랑 용(龍), 외조부는 영돈령 소의공(昭懿公) 순흥 안천보(安天保)   

  묘는 합장했다.

 

 

 

           대민공(휘 석덕) 묘

사위 黃 昚 황 신  

  장수인, 장원군. 아버지는 영상 수신(守身). 아들은 현감 근창(謹昌), 첨지 성창(誠昌), 경력 겸창(謙昌), 군수 예창(禮昌), 사지 경창(慶昌), 동지 순창(順昌), 호군 형창(亨昌), 별좌 의창(義昌), 사위 광주 별좌 이세주(李世柱), 외손 영의정 이극배(李克培)

 

사위 朴 楣 박 미  

  밀양인, 문과 대사간. 아버지는 좌참찬 중손(仲孫), 아들은 참의 의영(義榮), 참판 광영(光榮), 문과 교리 증영(增榮), 감사 소영(紹榮), 진사 안영(安榮), 사위 강위손(姜渭孫)

사위 安 訂 안 정  

  호군, 사숙재집과 수월암기에 실려 있음.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0

 

 

문경공 만사(양촌 권근 지음)

 

立身行有度 입신한 몸가짐이 법도 있고

養志孝彌豊 뜻 받들며 효도를 다 하였네.

老矣方哀毁 늙어서 모친상 에 애통해하더니

俄然已令終 얼마 있다 자기도 세상 떴네.

沙堤猶昨日 모래 언덕 놀던 일 어제 같이

廊廟有遺風 조정에 유풍이 남아 있네.

積善傳家遠 쌓은 공덕이 가문에 전해 가니

綿綿慶不窮 경사가 끊이지 않고 끝없어라.

吾生雖已晩 나는 비록 뒤늦게 태어났지만

常及老成人 이제는 늙은 사람 다 되었네.

 

 

 

 

 

 

 

 

 

 

 

 

 

 

 

 

 

 

 

勤愼持身德 조심스레 몸가짐 덕이 있었고

溫恭待物仁 온화 공손한 마음 어질게 사람을 대했네.

黃扉初罷相 정승 자리 내놓으시고 누런 초가집(옛 고향집)으로 되돌아가

綠野欲怡神 벼슬 사양하고 몸 편히 쉬고 싶었는데

豈意騎箕速 어찌 이리도 빠르게 떠나셨나

終令愴恨新 마침내 슬프고도 원통한 마음 새로워지네.

 

 

 

공목공 찬(교관 석하 지음)

 

氣度恢弘     기개와 도량이 넓고 크며

風采嚴重     풍채가 엄정하도다

蒼門建節     동북방 관찰사로

范孟博之澄淸 범맹박의 청렴이오

紫樞柄機     자추 병기는

 

 

司馬光之勳業 사마광의 훈업이로다

躋于廊廟     낭묘에 올라

重新晉國之封 진국(진원군) 봉함에 거듭 새롭게 했고

大其門閭     그 문려를 크게 하니

果驗于公之德 우공의 덕이 과연 징험 있도다.

8世 順德 순덕      

  1398년(태조 7)~1459년. 자는 자윤(子允),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묘는 시흥시 하상동 산 6번지 미좌(未坐)에 묘는 합장했으며, 상석이 있다.

  배위는 의인 안성 이씨(李氏), 1474년에 별세했다. 아버지는 찬성 안성군 숙번(叔

 

 

蕃), 조부는 안성군 경(坰). 증조부는 사정(思正), 외조부는 서원군 청주 정총(鄭摠)

  2005년 12월 7일 청원군 오창면 원리 산21번지 간좌 제일 위쪽으로 이장하여 합장했다.

 

 

9世 希明 희명  

 

 

 

 

 

 

              

감찰공(휘 순덕) 묘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1

 

문경공 찬<13대손 교관 석하(錫夏) 지음>

 

陳孺子之讀書

한나라 진평처럼 글 읽기를 좋아하고

杜元凱之好學

진나라 두예같이 학문을 잘 하셨네

早鵬褰於雲露

(지위가) 일찍이 봉새가 구름 속 날 듯 했고

逐鴻漸於天衢

(지위가) 드디어 기러기 하늘거리 가는 듯 해

體道經邦贊新化於合席

도 닦아 나라 위해 정승자리 새로웠고

疎封列爵食舊德於名卿

높은 벼슬 봉해 받아 이름 높고 덕이 크도다

 

 

 

 

 

 

 

 공목공 유운(遺韻)

 

久負江湖約

 오래 강호의 언약 저버리고

紅塵四十年

 홍진에 묻힌 사십년이었네

白鷗如欲笑

 백구는 웃고 싶어 하는 듯

來近釣磯邊

 가까이 낚시터까지 오네.

 

 

 

 

 

 

 

 

 

 

7世 淮伯 회백

 

 

 

 

 

 

 

통정공(휘 회백) 장인 정양생(鄭良生)

 文科(문과)급제. 禑王(우왕) 丙辰(병진) 1376년에 大司憲(대사헌)이 되고 동년 3월 淸白吏(청백리)에 選入(선입)되었다. 1378년 戊午(무오)에 贊化功臣 蓬原君(찬화공신 봉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良度(양도), 1392년  4월 卒(졸). 일화로는 '대동운부군옥 8권'에

어느 날 우왕이 어느 집에 가서 스스로 다듬이돌 노래를 부르며 묻기를 "이집이 누구의 집이냐"하자, 종자가 "정대부의 집입니다"하니 신우가 곧 말을 타고 떠나며 "그 사람은 두려워 할 만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것은 우왕가 정양생은 굳세고 곧아서 범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위 金 張 김 장  

  상주인, 문과 정언. 아버지는 부사 준(浚), 아들은 직장 극용(克用), 지평 이용(利用), 문과 좌랑 정용(貞用)

사위 南景祐 남경우 의령인

  아버지는 밀직사사 강무공(剛武公) 은(誾)

 

 

 

 

 

 

 

감찰공(휘 순덕) 장인 이숙번(李叔蕃)

1373~1440. 1393년 문과 급제, 1398년에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있으면서 방원(芳遠:뒤의 태종)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으며, 박포(朴苞)가 방간(芳幹)을 충동하여 거병하자 군사를 동원하여 이들을 제거하였다. 태종

 

 

 

 

 

 

 

 

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이 되었다.

 1409년 참찬의정부사․겸지의흥부사(兼知義興府事)를 거쳐, 1412년말에는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 1415년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1

 

5世 君寶군보

 

 

 

통계공(휘 회중) 묘→

 

 

 

6世 蓍

소윤공(휘 안수) 묘

 

             경덕재(통계공 재각)

7世 淮仲 회중

  ?~1421년 6월 4일. 자는 중보(仲父), 호는 통계(通溪). 1373년(공민왕 22) 음보(蔭補)로 군자시승(軍資寺丞)으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최영장군을 따라 탐라도를 토평하였다. 이 사실이 탐라지(耽羅誌)에 실려 있다. 1382년(우왕 8) 전농시승(典農寺丞) 재직 중 유량(柳亮)

 

 

방에 문과 동진사(同進士)에 급제하였다. 1390년 사헌부 집의, 1392년 군자윤(軍資尹), 현존하는 모든 족보에는 봉익대부 보문각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면서 한 때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태조가 형조참판,

8世 安壽 안수

  음직으로 1400년(정종 3) 제용고주부(濟用庫主簿), 1415년(태종 15) 8월 풍저창사(豊儲倉司)를 지내고, 여러 번 벼슬을 거쳐 통훈대부에 승차하여 예빈시소윤(禮賓寺少尹)을 지냈다. 손자 반성위(班城尉) 공안공(恭安公) 자순(子順)의 공적으로 가정대부 호조참판(戶曹

 

 

參判) 겸 의금부동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贈職)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식사리 박사동 산122-1 자좌(子坐)에 있다. 1979년 비의 획이 마모되어 사적을 읽을 수 없어 비를 다시 세우고 상석도 다시 놓았다.

9世 휘  

9世 윤  

9世  

 

 

소윤공(휘 안수) 장인 홍서(洪恕)

?~1418. 고려말에 대호군을 역임하고, 1399년 우군동지총제, 1401년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면서 남성군(南城君)에 봉하여졌다. 1402년 전라도 병마도절제사로 파견되어 왜구를 소탕하였으며, 1407년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남양군에 개봉(改封)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강양(康襄)이다.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2

 

5世 君寶군보

 

 

 

 

 

 

 

 

           

6世

 

 

 

봉강서원(상주 봉대)→

 

 

 

7世 淮仲 회중

병조참판, 병조판서에 임명했지만 불응하였다. 1421년 세종대왕이 총제(摠制)에 임명했지만 역시 출사하지 않았다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392년(태조 원년) 정도전의 교서를 유사(有司)가 상고하기를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 56인이 고려 말에 도당(徒黨)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해서 화단(禍端)을 일으켰다.”하여 통계공의 직첩을 회수하고 본향에 안치(安置)하였다. 1397년 5월 아버지 공목공이 태조 이성계를 만난 후 궁성(宮城) 감축관(監築官)으로 나아갔다가 1398년 3월 왕명을 거역한 죄로 가두었다가 5월 풀어주었다.  

8世 安壽 안수

  배위는 증정부인 남양 홍씨(洪氏), 아버지는 숭정대부 남양군 강양공 서(恕), 할아버지는 충민공 사범(師範), 증조부는 문정공 언박(彦博), 외조부는 직제학 평양 조사검(趙思儉)

  묘는 합장했으며 1997년 3월 묘역 정화시 봉분, 묘도비, 상석, 석등, 장대석을 다시 세웠다.  

 

8世 安福 안복     

  1457년(세조 3) 8월 주부(主簿) 재임 중 좌익(佐翼) 원종 3등공신(原從三等功臣)이 되었다. 그 후 조봉대부(朝奉大夫) 형조도관(刑曹都官) 정랑(正郞)을 역임했고 손자 지(漬)의 귀(貴)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고 다시 손자 징(澂)의 귀(貴)로 병조참판(兵曹叅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사위 溫寧君 온령군 정

  태종대왕의 제7남, 기헌공(寄軒公) 해(楷)의 가승에 의하면 장자는 증병판 휘(徽), 장녀는 온령군, 차자는 정랑 윤, 다음은 군수 혜이며, 성원총록, 1861년 동대문보, 상주보에도 온령군 정(䄇)으로 돼 있으나 배위는 익산 박씨

 

 

 

 

 

9世 利纘 이찬  

9世 利仁 이인  

9世 利誠 이성  

9世 利敬 이경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2

 

5世 君寶군보

 

 

 

 

 

 

 

    참판공(휘 안복) 세적비

         

           참판공(휘 안복) 묘

 

7世 淮仲 회중

  1407년(태종 7) 좌우사간대부(左右司諫大夫)를 지내고, 1412년 의주목사, 1415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 명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다녀왔다. 1417(태종 17)년 함길도 도순문사, 경기도 관찰사 겸 개성부유후,  1418년 11월(세종즉위년) 인수부윤, 1419년 2월 한

 

 

성부윤(漢城府尹), 4월 공조참판, 12월 충청도관찰사, 1421년(세종 3) 4월 4일 총제(摠制)로 재직 중에 작고하니 나라에서 정해진 법에 따라 미두(米豆) 20석을 내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잔해고문진보지(箋解古文眞寶誌)」가 있다.

8世 安福 안복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내서산 감악동에 있었다. 한때 실전하여 11세손 필복(必復)이 이곳에서 훈장을 하면서 묘를 찾는데 성심을 쏟아 1749년 다시 묘를 찾았다. 7년 뒤인 1756년 11대손 문헌(文憲)이 문중에  알리고 다시 봉축하였으며 옛 비가 훼손되어 다시 비를 세웠다.

 

  

11대손 관찰사 윤(潤)이 묘음기를 지었고 승지 효헌공 유(游)가 글씨를 썼다.  

  배위는 증 정부인 인천 이씨(李氏), 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판서를 지낸 효례(孝禮), 조부는 찬성 대제학 증 영의정  공도공(恭度公) 문화(文和), 증조부는 전공판서

9世 利順 이순

9世 利行 이행  

9世 利興 이흥  

9世 利溫 이온  

 

9世 利恭 이공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3

 

파주 공릉(恭陵)이 공목공(휘 시) 배위 진주

  조선 왕조실록에 의하면 박사공 6세 공목공(휘 시) 배위 진주 하씨(河氏)의 처음 묘터는 지금 파주군 조리면 봉일천리에 있는 예종의 원비(元妃) 장순 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의 공릉(恭陵)이었다. 이곳을 족보에서는 파주 보시리로 기록하고 있으며 후에 대자암(大慈庵)으로 이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462년(세조 8) 1월 4일

  임금이 고양(高陽) 뒤의 고개[嶺]에 거둥하여 장지(葬地)를 상지(相地)하고, 전지(傳旨)하기를, “이 산에는 쓸 수가 없다.”하고는

  파주(坡州)에 가서 강회백(姜淮伯)의 어미 무덤을 상지(相地)하게 하였다.<실록 7집 505>

 

 

 

 

 

 

 

 

 

 

 

 

 

 

하씨(河氏)의 묘터였다

1462년(세조 8) 1월 5일

  계양군(桂陽君) 이증 등이 와서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강회백(姜淮伯)의 어미 무덤은 풍수(風水)에 쓸 만한 땅입니다.”하였다.<왕조실록 7 집 505면>

 

1462년(세조 8) 2월 25일

   장순빈(章順嬪) 파주(坡州)에 장사지내다.

 

 

 

 

 

 

7世 淮仲 회중

   묘는 오랫동안 실전되어 종손 응교 세백(世白 1748~1824)이  1817년 경북 상주에 사우를 세우고 경덕사(景德祠)라 이름 지었다. 후손 세마 필효(必孝)가 글을 짓고 썼다. 1824년 후손 주영(冑永)이 상주시 신봉동 현 위치로 중건하였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자좌(子坐)에 있다. 1958년 두영(斗永), 재락(在洛), 석희(奭熙), 도희(道熙)가 적성으로 지석(誌石)을 찾아 다시 환봉하였다.   

  1954년 통계공파보를 발간하여 비와 재각을 다시 세웠다. 행장은 후손 신혁(信赫), 경

8世 安福 안복

심(深), 외조부는 부윤 안동 권숙(權肅)이다.

  묘는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손좌(巽坐)에 있으며 묘석이 있다.

  1970년대에 묘역 태반이 군부대에 징발되고

 

 

재실을 옮기라는 명이 있어 1980년 가을구파(九派) 후손이 파보를 발간하기로 결의하고 1985년 가을 묘역을 정화하고 비를 다시 세웠다. 13대손 계흠(桂欽)이  추도문을  짓고  방후손 성균과 전학 정희(正熙)가 글씨를 썼다. 후손 수동(秀東)의 협찬으로 1998년 한글로 된 세적비를 세우고 세적비문은 진주강씨참판공 세적비추진위원회에서 지었다

  추진위원은 영희(泳熙), 희설(熙卨), 태희(泰熙), 한신(漢信), 석찬(錫燦), 대희(大熙)이며, 비문은 영희(泳熙) 위원이 취합 작성한 문안을 대희(大熙)가 현대문으로 다듬었다.

←인천 이씨 묘

 

9世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3

 

通溪公(휘 淮仲) 유운(遺韻 남긴 시)

 

旅牕簷雨故難聽 여관에서 빗소리 듣기가 괴로운 것은

況復斑衣趨鯉庭 색동옷 입고 부모님 계신 곳에 가고파서다

夢似秋雲歸不住 꿈은 가을 구름같이 돌아가기를 멈추지 않으니

愁隨春酒醉無醒 시름은 봄 술에 취하여 깸이 없어라.

江山此日頭將白 이곳에서 오늘날 나의 머리 희려 하니

骨肉何時眼更靑 형제를 어느 때에 다시 반갑게 볼 것인가

宦路險夷曾歷識 벼슬길 험난한 줄 일찍 알았다면

是身天地一浮萍 이 몸은 천지의 한낱 부평초인걸.

 

7世 淮仲 회중 1998년에 경덕재 중건

덕재기는 욱원(旭元), 재각 상량문은 봉희(鳳熙)가 지었다. 1977년 경북 상주 경덕사(景德祠)가 봉강서원(鳳崗書院)으로 승격되어 인천 장병규(張炳逵)가 글을 지었다. 1990년 후손들이 힘을 모아 서원을 중건하여 묘역을 정화하고 석의를 갖추었다.  진성 이원영(李源榮)이  중건기

 

   

를 지었다. 1998년 11월 22일 후손 민창(玟昌),신복(信福), 신홍(信洪) 등과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경덕재를 중건하였다.    

  배위는 의령 남씨(南氏), 1407년 별세, 1남을 길렀다. 아버지는 판사(判事) 징(徵), 통계공 묘의 왼쪽에 있다.

8世 安命 안명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을 잘 모셨다. 부모님 사후에도 예를 다하고 살아생전처럼 받들며 시묘(侍墓)하여 1450년 나라에서 효자 정려(旌閭)를 내렸다. 여지승람(輿地勝覽)과 해동삼강록(海東三綱錄), 진주읍지(晉州邑誌)에 사적이 실려 있다.

 

 

  배위는 죽산 안씨(安氏), 아버지는 참봉 수(洙)

  묘는 실전하여 김제군 백산면 송하산에 봉단을 함께 세웠다.

 

효자공(휘 안명) 단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3

 

 

5世 君寶군보

 

 

 

 

 

 

타성 문집과 통계공 후손 신도비문에 나타난 통계공 직함

출처

통계공관직명

참고

남한보(을축보)

봉익대부 보문각 대제학, 형조참판, 총제, 공조참판

1685년발간

모친 진주河氏 만사

叅議

1399년 변계량 지음

1401년 공목공 묘지명

洪州牧使

1401년 양촌 권근 찬

야은일고(전록생 문집)

嘉靖大夫 忠淸道觀察陟黜使

1420년 재직시 善本 大字諸儒箋解古文眞寶誌 발간

1421년 6월 4일<實錄>

별세, 摠制

관찰사공(휘 子平) 신도비

사숙재집

入我朝 觀察使

문량공(휘 희맹) 문집

관찰사공(휘 子平) 신도비

摠制

1487년 이숙함 찬

참판공(휘 澂) 신도비명

工曹叅判

정사룡(1491~1570)찬

강원도 관찰사공(휘 弘重) 신도비명

入我朝 諱淮仲 諱子平 亦 至大官.

1670년 찬

정두경

개암집 世系

叅判

박사공 12세 개암공(휘 익)

박사공 14세 참판공(휘 秀崑) 신도비명

入我朝 都摠制

좌의정 권상하 찬

박사공 15세 첨지중추공(휘 絪) 묘표

摠制

대호군(휘 휘) 후손

성건재공(휘 찬) 묘갈명

本朝官兵曹叅判大提學

소정공 尹光紹 찬

6世

 

 

 

 

 

 

7世 淮仲 회중

  배위는 전주 최씨(崔氏) 1413년 혼인, 아버지는 통정대부 지성주사(知星州事) 영(寧). 할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 완성군(完城君) 을의(乙義), 증조할아버지는 전교서승 사검(思儉), 외할아버지는 판사 남양 홍보현(洪普賢)이다.  

  묘는 고양군 덕수(지금의 고양시 오금동 일대)인데 잃어버려 통계공 묘 우측에 봉단을 세웠다.  

 

1960년(경자년) 통계공파보 발간

거액 헌성자 명단

  신각(信珏) 대전 100만환

  봉희(鳳熙) 칠곡 100만환

  순찬(淳璨) 제주  30만환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3

 

5世 君寶군보

 

 

 

 

 

 

叅議 姜淮仲 母氏 挽章

춘정 변계량(卞季良 1369~1430) 1399년 지음

 

母儀婦道與年高

   며느리와 어머니로 고령을 누리다가

奔月飄然向紫霄

   표연히 달로 떠나 자소궁에 가시었네

聞訃病生能不慟

   병객이 부음 듣고 슬퍼하지 않겠는가

曾從令子忝同僚

   일찍이 아드님과 동료로 있었으니.

*挽章 : 죽은 사람을 슬퍼하여 지은 글을 비단(緋緞) 천이나 종이에 적어 기(旗)처럼 만든 것

6世

 

 

 

 

 

 

7世 淮仲 회중

 

 

 

 

 

 

 

7世 淮順 회순

  자는 숙보(叔父), 사재소감(司宰少監)을 지냈다.

  배위는 전씨(全氏), 아버지는 이(理)

 

 

 

통계공 배위 전주최씨의 조부 최을의(崔乙義)

?~1392(태조 1). 1375년(우왕 1) 이인임(李仁任)을 해하려고 모의하였다 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고, 1385년 우왕이 태묘(太廟)에 분황(焚黃:나라에서 관직이나 시호를 내리면 그 내린 명령을 누런 종이에 옮겨 써서 선조의 사당 앞에서 태우고 제사를 드리는 것)하는 제사를 지낼 때 동지밀직으로서 제사에 쓴 고기를 장부(張溥)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공양왕 초에 밀직사에 이르렀으나, 1392년(공양왕 4) 이성계(李成桂)가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하고 정부를 개편할 때 경상도에 유배되었다가 조선 개국과 함께 배소에서 죽었다.

 

 

8世

  1429년(세종 11) 기유 식년시 문과 동진사(同進士)에 급제하여 1433년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을 지내고 1440년(세종 22) 예산현감(禮山縣監), 그 후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묘는 논산군 가야곡면 함적리 갈마산 원대동 갑좌에 합장. 은진에 살기 시작했다.

 

9世 應亨 응형  

9世 應貞 응정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4

 

5世 君寶군보

 

 

 

 

 

送姜淮仲赴義州得連字

의주목사로 부임하는 강회중을 보내면서  

독곡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1338~1423) 지음

 

先君偕令祖 나의 부친과 그대 조부는

射策共當年 같은 해 함께 급제하고

二嗣仍攀附 그대 아버지와 나 또한 2대를 이어 함께 급제하여

諸孫不棄捐 여러 후손이 조상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네

衰年惜離散 기력이 쇠한 때 헤어지다니 아쉽고

薄暮任留連 다 늙어 다시 그 자리에 머물다니 (안타깝네)

將子西歸土 장차 자네가 서북 임지로 가서

兵農務兩全 병농(兵農) 모두에 온 힘을 써주시게.

 

 

6世

 

 

 

 

 

7世 淮順 회순

 

 

 

 

 

 

8世

  배위는 정부인 완산 이씨(李氏)

 

 

 

지중추부사공(휘 의) 묘▼

사위  尹 汴 윤 변

  무송인, 증 중추부사, 아버지는 도사 강(江), 아들은 자렴(子濂) 판사, 자영(子濚) 문과 직제학. 사위는 혜령군(惠寧君) 지(祉), 사정 권계우(權繼祐), 현감 송관(宋觀), 남원 양자유(楊子由) 집의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4

 

5世 君寶군보

 

 

 

 

 

 

 

6世

 

 

 

재신공(휘 회숙) 묘→

 

 

 

7世 淮叔 회숙

  자는 정보(正父), 제위장군(諸衛將軍), 혹은 재신(宰臣)을 지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진주 금산(金山)에 은거하였다. 1406년(태종 6) 외방에 유배되었으나, 태종이 누차 불러 낙천(洛川), 지함안군사(知咸安郡事)를 역임했다.  

 

 

  묘소는 진주시 하대동 산 39번지 임좌(壬坐)에 있다. 후손 신구(信九)가 적성을 다하여 다시 찾았다.

  배위는 정부인 남양 홍씨(洪氏) 무육, 아버지는 세준(世俊)

  묘소는 같은 곳 간좌(艮坐)에 있다.

8世 孝孫 효손

  자는 효원(孝元), 생원. 양친을 극진히 모셔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배위는 벽진 이씨(李氏),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평청공 약동(約東), 조부는 현령 증 호조판서 덕손(德孫), 외조부는 부사 전주 이지명(李知命) 묘는 선영 아래 합장했다.

 

8世 孝昆 효곤

  자는 인원(仁元)

  배위는 장수 황씨(黃氏) 정려가 있다. 아버지는 염(琰)

  묘는 실전하였다.

 

 

9世 國老 국로  473>

9世 國沖 국충  474>

사위 鄭 伸 정 신

  연일인, 사윤(司尹), 아버지는 종본(宗本), 조부는 포은 정몽주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4

 

 

5世 君寶군보

 

 

 

 

 

 

 

6世

 

 

 

 

 

 

 

7世 淮叔 회숙

  배위는 정부인 순흥 안씨(安氏), 아버지는 찬성사 소(沼)

  묘소는 공의 묘와 함께 있다.

 

 

 

 

 

 

 

 

 

8世 仲德 중덕

  자는 중원(仲元). 방어총관으로 함경도에 들어가 연대(烟臺)를 만들어 야적들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알리어 백성의 폐해를 미리 막아 이것을 강중덕연대(姜仲德烟臺)라 부른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회령 오봉산에 은거했다.   

   묘는 회령군 벽성면 봉산 비석동 유좌(酉

 

 

坐), 표석이 있다. 남원 보절 성남 낙동에 단을 세웠다.

 

사위 金 健 김 건 경주인, 부사

 

 

9世 정  475>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5

 

5世 君寶군보

 

 

 

 

진원군공(휘 회계) 단비→

 

 

6世

 

 

 

 시랑공(휘 서우) 묘→

 

 

 

7世 淮季 회계         공양왕 사위

 1364년~? 자는 계보(季父), 1388년(우왕 14) 별장(別將) 재직 중 김여지(金汝知) 방 문과 급제, 1390년(공양왕 2) 고공좌랑(考功佐郞)으로 세자 석(奭)의 시학(侍學)이 되었고, 이후 공양왕의 딸 경화궁주(敬和宮主)와 혼인, 진원군(晉原君)에 봉해졌다. 고려가 망하여 공양왕

 

 

이 폐위되자 동서 우성범(禹成範)과 함께 참화를 당했다. 그러나 대비의 간청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가솔을 이끌고 개성에서 500여 리 떨어진 평안북도 안변군 배화면 수악리에 피신하여 이름을 회조(淮祖)로 고치고 아들 염(溓)의 효성으로 95세까지 살았다는 이야기

8世

  음직으로 통훈대부, 사재령(司宰令)

  묘는 안변군 배화면 구악리 수재봉 서쪽 산기슭 용우골 간좌(艮坐)에 있다.

  배위는 숙인 양천 허씨(許氏)이며 용진현령 미(微)의 따님이다.

  묘는 함께 있다.

 

8世 胥祐 서우

  고려 말 상서예부(尙書禮部) 시랑(侍郞)으로 재직 중 역성 혁명이 일어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해 영평현(永平縣) 동쪽 20리 되는 심곡에 은거하며 문밖도 나가지 않고 북쪽 하늘은 쳐다보지 않았다. 묘는 나주군 다산면 시랑 심곡산 기슭 임좌(壬坐)

9世 福海 복해  

9世 巨道 거도  

 

 

 

 

9世   정  

9世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6

 

5世 君寶군보

 

 

 

 

 

 

 

 

6世

 

 

영모재(永慕齋)→

 

 

 

 

7世 淮季 회계

와 고려사에는 공양왕 4년 공양왕을 폐하고 원주로 내보낼 때 단양군 우성범, 진원군 강회계를 회빈문 밖에서 참했다는 소리를 이태조가 대비전에서 듣고  대노하며 그것을 멈출 것을 명했으나 미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묘는 안변군 배화면 송산리 해좌(亥坐)에 있으며 나주군 남평면 심치리에 봉단을 세웠다.

  배위는 공양왕(恭讓王) 딸 경화궁주(敬和宮主)이며, 외할아버지는 창성군(昌城君) 교하(交河) 노정(盧禎)이다.

8世  

  1382년~1464년(향수 83). 부윤(府尹), 1450년 안변으로 퇴거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월성 김씨(金氏), 1384년에 태어나 1468년에 별세하였다. 이부상서 한인(漢仁)의 따님이다.

  묘는 사동 격산에 있다.

 

8世  순     

  묘는 상도슬동 집 뒤 상지 위 산기슭에 큰 묘가 있는데 강씨 성의 묘라 한다. 묘 아래에  창고가 있다.

 

 

 

9世 仁周 인주  

9世 和周 화주  

 

 

 

 

9世 思敏 사민

9世 思轍 사철  

 

 

 

 

봉양사<경남 산청>

 2003년 11월 2일 중건된 봉양사(鳳陽祠)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속칭 오룡골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통정공(휘 회백) 5형제가 출생한 곳으로 우리 선조 공목공(恭穆公)이 이 마을에 살던 진양하씨 원정공(휘 즙) 따님에게 장가들면서 풍속에 따라 처가인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이다. 오룡(五龍)이란 골 이름은 공목공(휘 시)의 다섯 아드님을 일컫는 말이다. 이로 인하여 이곳을 성역화하여 박사공 후손들의 도장(道場)으로 삼고자 진주에 있던 봉양사를 이곳에 중건한 것이다.

  봉양사 사우 3동과 삼문(三門)으로 건축되었으며, 5천만원 이상 헌성한 문중 및 개인과 당시 집행부는 아래와 같다.

 

별좌공(휘 이성)파  200,000,000원

문량공(휘 희맹)파  130,000,000원

충렬공(휘 수남)파  53,000,000원

 

강일석(소윤공파)   170,000,000원

강수동(참판공파)   110,000,000원

  강보희(참판공파)   110,000,000원

  강창회(문량공파)    50,000,000원

  박사공파대종회 회장 강신홍

                 상임부회장 강창수

  남사사우 중건추진위원장

                 강수동, 강보원, 강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