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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安壽

7淮仲

 6 蓍

5君寶

4昌貴

3師瞻

2引文

파시조 啓庸

 

1-146

 

 

9世

  1424년~1485년, 자는 망지(望之). 재능직(齋陵直)을 첫 관직으로 직장(直長), 주부(主簿), 감찰(監察), 현감, 선전관(宣傳官), 사포(司圃)를 거쳐 1468년(세조 14) 청풍군수(淸風郡守)로 부임하여 1472년(성종 3) 겨울 사임하였다.

 

 

  의령 동문동으로 돌아와 욕심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편안(便安)하고 한가롭게 지냈다.

  묘는 의령군 용덕면 정곡촌 간동 경좌(庚坐)에 있으며 석상, 망주석이 있다.

10世 孝貞 효정

  1459년~1513년 9월 26일, 자는 행원(行源), 한성부 가랑(假郞)을 첫 벼슬로 교위(校尉)를 지내고 1495년 생원에 올라 사옹원 직장을 거쳐  사헌부 감찰에 올랐다. 1504년 종질 대사간 형(詗)의 4부자가 같은 날 화를 입고 처(妻)는 자진

 

 

하였다는 소식을 의령 구장에서 듣고 진실로 상심되어 병을 얻었고 귀까지 멀게 되었다.

  묘는 정곡 아버지 묘 뒤 경자(庚坐)에 쌍분이며 비와 상석, 망주석이 있다. 묘갈명은 관포 어득강(魚得江)이 지었다.

11世 世應 세응   

  1475년 9월 13일~1540년 11월 2일, 자는 영칙(永則) 서울에 살면서 경중 충순위(京中 忠順衛)를 지냈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찬한 묘갈명에 공은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독서했으며 행실은 덕이 있었다. 모친을 모시고 남쪽 고향

 

   

에 돌아와 모친의 변 빛을 보고효양(孝養)했으며 집안을 일으켜 모두가 의롭다고 칭찬했다. 호음 정사룡도 공을 선생이라 칭했다.

  묘는 정곡 선영 아래 유좌(酉坐)에  있으며 상석과 망주석

12世 우      

  1495년~1577년 3월 2일, 자는 玉如(옥여), 伯圭(백규) 호는 모암(慕庵), 의령에 살았다. 1513년(중종 8)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 진사(進士) 3등에 입격하였다. 도학에 밝아서 남명 조식(曺植)과 도의 지교를 맺었다.

 

 

  매우 효성스러워 어머니 병환에 지극 정성으로 탕제를 지어 드리고 상을 당하여는 몹시 슬퍼 몸이 몹시 야위었다. 고향 양평으로 와서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고 여막살이를 하면서 계속 피눈물로 울다가 어머니 중상일(中祥日) 11월

13世 復敦 복돈   

  1512년~1573년 5월 17일, 자는 경초(景初), 호는 둔촌(屯村). 선공감 주부, 팽신교위 증 예빈시 소윤(少尹) 역임, 학행이 높고 청렴하며 마음이 곧아 행실과 말을 스스로 조심하여 사람들이 그 덕을 흠모했다.  

 

 

  배위는 증숙인 재령 이씨(李氏) 3월 18일 별세, 아버지는 별좌 은염(殷鹽), 조부는 교리 구(球), 증조부는 부제학 맹현(孟賢), 외조부는 경주 정수해(鄭壽海)

  묘는 어머니 묘 아래 경좌에 합장했으며  서파  유필영(柳

14世

14世

14世

14世

 

사위 郭走肅 곽수 현풍인 진사. 아버지는

참봉 지인(之仁), 아들은 영준(永俊), 사위는 황명일(黃命一)

사위 韓忠國 한충국 청주인, 아버지는 참봉 종(宗), 아들은 沂, 濯, 淑, 混, 泳, 濂, 洛, 海, 사위 이득원(李得元), 박덕승(朴德承)

 

 

8安壽

7淮仲

 6 蓍

5君寶

4昌貴

3師瞻

2引文

파시조 啓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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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世

  사가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묘갈명이 있다.

  배위는 영인 전주 최씨(崔氏), 1489년 별세했다. 아버지는 좌찬성 경절공 사강(士康), 조부는 우찬성 평도공 유경(有慶), 증조부는 대제학 완산부원군 문정공 재(宰), 외조부는

 

 

판사 양성 이충치(李忠耻)

   묘는 고양시 무고리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공의 묘역에 단비를 세웠다.

 

10世 孝貞 효정

후대에 와서 교리 이만규(李晩煃)가 후지(後識)를 지었다.

  배위는 숙인 평산 신씨(申氏)이며 1457년(세조 3)에 태어나 1545년 4월 21일 별세, 아버지는 봉례 윤단(允丹), 조부는 중추부사 자경(自敬), 증조부는 도총제 제정공 효창(孝

 

 

昌)

 

 

 

11世 世應 세응

이 있다.

  배위는 숙인 완산 이씨(李氏), 1576년 3월 2일 별세했으며, 아버지는 의천군 승은(承恩), 조부는 익령군 치(侈), 증조부는 태종대왕, 외조부는 장령 정구진(鄭龜晉)이다.

 

           

  묘는 양주군 내에 있었으나, 상석, 망주석과 함께 실전되었다.

 

 

12世

2일에 별세하였다.

  1743년(영조 19) 임금이 이것을 알고 1744년에 정려를 내려주었다. 이 사실이 의령군지와 삼강록, 남명집에 실려 있다. 용재 강덕부(姜德溥)가 행장을 짓고 승지 서명서(徐命

 

 

瑞)가 효문기를 지었다. 1847년(헌종 13) 정려 뒤쪽에 사당을 세우고 이름을 효충(孝忠)이라 하였다. 손자 초정공 언룡(彦龍), 동호공(東湖公) 기룡(紀龍)이 함께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양평 어머니 묘  아래에 있다.

13世 復敦 복돈

必永)이 비명을  지었고 비와 상석이 있다.

 

 

 

 

 

 

 

 

 

사위 文益精 문익정 남평인

  아버지는 현감 완(浣), 아들은 각(恪), 절

사위 朴興家 박흥가

 

 

 

 

 

 

사위 朴乾甲 박건갑

  밀양인 생원, 아들은 규(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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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安壽

7淮仲

 6 蓍

5君寶

4昌貴

3師瞻

2引文

파시조 啓庸

 

1-146

 

 

9世

 

 

 

청풍공(휘 혜) 묘→

 

 

10世 孝貞 효정

 

 

 감찰공(휘 효정) 묘→

 

 

 

11世 世應 세응

 

 

 

 

 

 

 

12世

었으나 실전하여 11대손 우영(佑永)과 여러 후손들이 배위의 묘 좌측에 단을 세우고 비문에 그 일을 적었다.

  배위는 의인 창녕 조씨(曺氏) 7월 20일 별세, 아버지는 승지 계형(繼衡).  조부는 사직 증 참판 순(珣), 증조부는 생원

 

 

증참의 명수(命壽), 외조부는 목사 익산 이정양(李貞陽)

  묘는 의령군 용덕면 정곡 소윤공(휘 복돈) 묘 위 경좌에 있으며 상석과 망주석이 있다.

13世 復休 복휴      

  자는 태초(太初), 호는 퇴촌(退村), 9월 12일 별세. 직장, 선무랑, 봉직랑에 오르고 군자감 첨정을 역임했다.

  배위는 숙인 파산 이씨(李氏). 10월 2일 별세. 아버지는 희철(希哲), 조부는 진사 핵(翮), 증조부는 대사헌 인형(仁亨)

 

 

  묘는 의령군 의령면 무전리 화주촌 뒤 임좌에 합장. 진와 성산 이헌주(李憲柱)가 비문을 지었고 비와 상주석이 있다.

 

 

14世 彦龍 언룡

14世 紀龍 기룡

  종숙 복남(福男) 뒤를 이음  

 

 

   

 

 

 

 

 

8安壽

7淮仲

 6 蓍

5君寶

4昌貴

3師瞻

2引文

파시조 啓庸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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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世

 

 

우모재<경남 의령>→

 

 

10世 孝貞 효정

 

 

 

 

 

11世 世應 세응

 

 

 

 

 

   

 

 

 

12世 무      

  자는 중규(仲圭), 호는 수암(守庵). 남명 조식(曺植) 선생 문하에서 배웠는데 그 명성이 몹시 우거져 사림들이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겼다. 조 선생이 늘 일컫기를 유학자는 유순하고 마음이 따뜻해야 학문도  행해진다고 했다.

 

 

  묘는 의령군 무동 자좌에 있다.

  배위는 은진 송씨(宋氏). 아버지는 병마절도사 근(懃), 조부는 주부 찬(瓚). 증조부는 판윤 복산(福山), 외조부는 서산 유계남

13世 復守 복수       

  자는 여지(汝知), 참봉. 묘는 사천 근남면 백석동 해좌. 배위는 안동 권씨(權氏), 아버지는 군수 식(軾), 묘는 쌍분

  배위는 연일 정씨(鄭氏), 아버지는 진사 시(蒔). 묘는 부군의 묘 아래 임좌

 

13世 復元 복원      

  첨지 역임

  배위는 숙인 여흥 민씨(閔氏), 아버지는 전(筌)

  묘는 합장했다.

 

14世

14世

 

 

 

14世

 

 

 

 

 

320

8安壽

7淮仲

 6 蓍

5君寶

4昌貴

3師瞻

2引文

파시조 啓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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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世

 

 

 

 

 

 

10世 孝貞 효정

 

 

 

 

 

   

 

 

11世 世應 세응

 

 

진사공(휘 서) 묘→

 

 

12世

(柳啓南)

  배위는 김해 김씨(金氏), 아버지는 순(詢)

  묘는 함께 있다.

 

 

12世 서      

  1510년~1540년 5월 24일, 자는 숙규(叔圭) 호는 매곡(梅谷). 남명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1537년(중종 32) 정유진사(丁酉進士)에 입격하고. 1541년 갑자기 부친상을 당하자 거적자리가 다 닳아질 때까지 베었다. 1544년

13世 復仁 복인       

  배위는 진양 정씨, 아버지는 수견(壽堅)

 

 

 

 

13世 壽男 수남      

  생부는 숙(璹), 1552년생, 10월 18일 별세, 자는 인수(仁叟) 호는 사월정(沙月亭), 1580년 경진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 전적을 거쳐 예조, 병조 좌랑과 이조정랑을 역임했다. 임진란 때 경기도관찰사 충장공 심대(沈岱)의 종사관이

14世 希尙 희상

사위 申應栢 신응백 고령인

 

 

 

14世

 

 

 

 

 

 

8安壽

7淮仲

 6 蓍

5君寶

4昌貴

3師瞻

2引文

파시조 啓庸

 

1-148

321

 

9世

 

 

칠정려각<경남 의령>→

 

 

10世 孝貞 효정

 

충렬공(휘 수남) 재실→

 

 

11世 世應 세응

 

 

충렬공(휘 수남) 묘→

 

 

12世

(중종 39)에 정려가 내려지고 남명 조식(曺植)이 찬한 묘표 및 창설(倉雪) 권두경(權斗經)이 찬한 효문기가 있다. 이 사실이 의령읍지에 실려 있다.  

  배위는 창녕 성씨(成氏), 아버지는 참봉 수 근(守瑾), 조부

 

 

는 대사헌 세순(世純), 증조부는현령 증 호조참판 충달(忠達), 외조부는 양록정(陽麓正) 수(粹)

  묘는 의령 정곡 선영 아래 유좌에 합장했다.    

 

13世 壽男 수남

되어 출전 중 삭령에서 적의 야습을 받고 10월 18일 순절하였다. 선조 때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제물을 내려주었다.  1709년(숙종 35) 증 이조판서,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내리고 자손들을 녹용하라고 명하고 공의 노비 검산가(檢山家)를 복호하도록 했다. 1712년 삭령 부민들이 사우를 지을 때 연신들의 청을 받아들여 심대(沈岱)의 예에 따라 제물과 어필로 일체정려(一體旌閭)라는 휘호를 내렸다. 1791년(정조 15)에는 표절(表節)이란 사액과 치제문이 내려졌다. 소상리 둔대산에 사월정(沙月亭)과 신도비가 있다.

 

 

 

 

 

 

  판서 홍만조(洪萬朝)가 시장을, 부제학 권경(權瓊)이 정문기를, 성호 이익(李瀷)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충남 연무읍 양지리에 충렬사(忠烈祠)와 홍천재(紅泉齋)가 있다.

  묘는 고양시 식사리 소윤공 묘 왼쪽 병좌에 서 충남 논산시 연무읍 양지리로 이장했다.  

  배위는 증정부인 남원 윤씨(尹氏), 아버지는 판교 증 대사헌 강원(剛元), 조부는 정랑 정(霆), 증조부는 사심(思深). 외조부는 현감 증 대사헌 이시영(李時榮). 묘는 의령군 지정면 마산리 자좌

 

 

 

 

 

 

 

322

8安壽

7淮仲

 6 蓍

5君寶

4昌貴

3師瞻

2引文

파시조 啓庸

 

1-149

 

 

9世

 

 

 

 

 

 

  칠정려각(七旌閭閣)은 의령군 의령읍(宜寧邑) 동동 1134의 3번지,지금의 의령종합고등학교 동편 담장옆 도로변에 6동(棟)이 가지런히 서 있다.

  이 정려각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우리 문중이 낳은 일곱분의 충(忠) 효(孝) 열(烈) 삼강(三綱)을 기리기 위한 정려각(旌閭閣)이니, 일명 삼강문(三綱門)으로도 불리워져 왔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충절(忠節)과 효열(孝烈)을 일러 삼강(三綱)이라 하고 나라에서는 이를 실천한 사람을 정려(旌閭)하여 후세의 영원한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 정려각(旌閭閣)은 오랜 풍우에 더러는 허물어지고 파손되었으나 문중에서 틈틈히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1972년에는 새로 내부 수리를 말끔히 하여 보존하여 온다.

 

제1려(第一閭)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정려(旌閭)로 1495년(燕山君 1년)에 태여나 천출(天出)의 효도로 정려된 모암공(慕菴公) 강우(姜瑀)의 정려이니 1744년(英祖20년)에 건립된 맛배 목조 와가이다.

10世 孝貞 효정

 

 

 

 

 

11世 世應 세응

 

 

 

 

 

12世 숙      

  초명은 진(瑨) 자는 계규(季圭), 충순위 참봉, 부모에 대한 효가 지극했고,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문장을 지음에 아는 것이 많아 막힐 데가 없었다.

  묘는 아버지 묘 아래 경좌

 

 

  배위는 김해 김씨(金氏) 12월 12일 별세, 생2남, 아버지는 봉사 필명(弼明). 조부는 참봉 맹손(孟孫), 증조부는 현감 석공(錫貢), 외조부는 본종 강정숙(姜正叔). 묘 창령 우항산 해좌, 상석이 있다.

13世 福男 복남   

  자는 겸오(兼五), 직장(直長) 역임

  배위는 의인 창령 성씨(成氏), 아버지는 참의 해(海), 조부는 교수 세구(世球), 증조부는 판관 철(轍), 외조부는 진사 곽지견(郭之堅). 묘는 정곡 고조부 청풍공 묘 좌측 경좌에 쌍분, 상석이 있다.

 

13世 壽男 수남 백부 서(瑞) 뒤를 이음  

13世 奇男 기남   

  자는 인가(仁可), 뛰어난 선비로서 태어나면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어려서 총명하여 사물을 알아보는 마음과 눈이 있었고 배움에 있어 모르는 것이 없었다.   

14世 紀龍 기룡

 

 

 

 

 

14世 士龍 사룡

14世 士虎 사호

 

 

 

 

8安壽

7淮仲

 6 蓍

5君寶

4昌貴

3師瞻

2引文

파시조 啓庸

 

1-149

323

 

제2려(第二閭)

  진사 매곡공 강서(姜瑞) 효정(孝旌). 모암공(慕菴公) 강우(姜瑀)의 아우이다.

 

제3려(第三閭)

  충열공(忠烈公) 사월정 강수남(姜壽男) 충려(忠閭). 매곡공 강서(姜瑞)의 아들이다.

 

제4려(第四閭)

  참의공(參議公) 강기룡(姜起龍)장군 충려(忠閭). 직장(直長) 강복남(姜福男)의 아들이다.

 

제5려(第五閭)

  열부(烈婦)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정려(旌閭), 이 정려는 1882년 (高宗19년)에 건립한 맛배 지붕이다. 열부허씨(烈婦許氏)는 강시주(姜時周)의 처이다.

 

제6려(第六閭)와 제7려(第七閭)

  수재공(修齋公) 강재중(姜在重)과 그의 처 함안조씨(咸安趙氏)의 쌍효(雙孝)를 기리는 정려(旌閭)

 

9世

 

 

 

 

 

10世 孝貞 효정

 

 

 

 

 

11世 世應 세응

 

 

 

 

12世

  배위는 김해 허씨(許氏) 4월 1일 별세, 아버지는 봉지(鳳池)

  묘는 부군과 쌍분이다.

 

 

 

  배위는 안동 권씨(權氏), 아버지는 좌승지세춘(世春), 조부는 상의원 운(運), 증조부는 영경전참봉 시준(時準), 외조부는 고재 상산 김감(金堪) 묘는 정곡 선영 계단 아래 쌍분

13世 宇男 우남   

  묘는 실전했다.

 

13世 宙男 주남      

  1554년~1576년. 처음 이름은 도희(道熙) 호는 해은(海隱)

  배위는 김해 김씨(金氏) 1555년~1603년

  묘는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 석교산 간좌에 쌍분이며 둥근비가 있다.

14世 春龍 춘룡

 

 

 

 

 

14世 晉載 진재

 

 

 

 

 

324

8安壽

7淮仲

 6 蓍

5君寶

4昌貴

3師瞻

2引文

파시조 啓庸

 

1-150

 

 

9世

 

 

 

 

 

 

10世 孝貞 효정

 

 

 

 

 

사위 蓬城正  봉성정 항

  아버지는 의성군 채(寀), 아들 연제부정 작(碏), 흥령부정 인(磷), 당성부정 번(磻), 사위 교리 이당

 

 

       사위 幽山正 유산정 민   

       아버지 정양군 순(淳), 아들 고원수 만수(萬壽), 창원수 천수(千壽), 연원수  억수(億壽), 풍원수 팽수(彭壽), 사위는  임순덕(任舜德), 김령(金齡), 김렴(金濂)

 

   

 

 

 

12世

 

 

 

 

 

사위 張益祺 장익기   

  사위는 생원 한몽삼(韓夢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