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克儉(극검) 선략장군 충의위 부사과

 형-海◇, 濬, 渙◇, 동생-泳◇

沆(항)◇○<박사공 14세/11-69><문량공(휘 희맹)…통정공파> 간양록의  저자

   1567∼1618, 자는 太初(태초), 호는 수은(睡隱). 영광에 살았다. 成渾(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아버지 생전인 1588년(선조 21) 사마시(司馬試) 식년(式年) 진사(進士) 2등에 입격하고, 1593년 전주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1595년(선조 28) 교서관(校書館) 박사가 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1596년(선조 29) 12월 형조좌랑이 되었다. 1597년 낭청, 1599년(선조 32) 4월 임금에게 정유년의 일에 대해 상소문을 올렸다. 1668년(현종 9) 4월 당상(堂上)에 추증되었다. <왕조실록 36집 577면>

  1597년(정유년)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갔다가 일본이 14만 군사를 이끌고 재차 침입하였을 때 분호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남원에서 군량미 보급에 힘썼다. 남원이 함락당한 뒤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웠다. 전세가 불리하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 에게 합류하려다가 적선을 만나 형제 자매가 모두 물에 뛰어들었는데, 왜군에게 잡혀 일본에 압송되어, 이요(伊豫)로부터 오오사까(大阪)에 끌려갔다. 그러나 수은공의 높은 학식에 일본은 학자로 대접하여 학식 높은 승려와 교유하며 유학(儒學)을 가르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지리와 군사시설을 비롯한 적군의 상황을 인편으로 고국에 보고하기도 했다.

  1598년 교오또(京都)로 이송되어 그곳에서도 적군의 동향을 적어 밀송하고 1600년 포로 생활에서 풀려 나와 가족과 함께 귀국하였다. 1602년(선조 35)에 대구 교수(敎授)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고 잠시 후에 사임하였으며, 1608년 다시 순천 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일찍부터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고, 포로 시절에 일본에 성리학(性理學)을 전하여 일본 성리학의 원조(元祖)가 되었으며, 일본 주자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등원성와(藤原性窩 1561∼1619)와 임라산(林羅山 1583∼1657)에게도 전수하는 등 일본의 명유들을 배출시키기도 했다. 인물화, 소나무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효종 때 증도승지 겸 직제학, 고종 때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영광 용계사(龍溪祠), 내산서원(문화재 제28호)에 배향되었다. 구례에는 공의 절의를 기리는 장절비(奬節碑)가 있는데, 대제학 김상헌(金尙憲)이 시장을 지었고, 신도비는 교리 이종문(李種文)이 짓고 대제학 김상헌이 쓰고, 전각은 권익상(權益相)이 했다. [저서] 간양록, 수은집, 운제록, 건차록, 강감회요, 좌씨정화, 문선찬주<왕조실록 22집 548면∼24집 249면, 36집 577면> 일본 大洲市(대주시)에 현창바가 세워졌다.

 

 

 

 

 

배위

증정부인 진주 金氏(김씨), 1587년 11월 24일 별세, 아버지는 참봉 봉(琫), 조부는 첨지 수해(秀海), 증조부는 직장 극려(克礪), 외조부는 진사 광주 정인홍(鄭仁洪)

증정부인 함평  李氏(이씨)로 수은공과 함께 포로가 되었을 때 굶어서 순절하여 1633년(인조 11)에 나라에서 정려를 내려 영광군 불갑면 운제촌에 세워졌는데, 1688년(숙종 24) 10월 정읍군 산외면 동곡촌으로 이건하였다.

묘

영광군 불갑면 상운리 가소산 묘좌에서 임신 3월에 내산동으로 이장하여 3위를 합장했다.

아들

時萬(시만) 경기참봉, 時蕙(시혜) 통덕랑

사위

羅宗敬(나종경) 금성인, 金夔(김기) 서흥인, 李昭(이소) 함평인 생원

高斗南(고두남) 장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