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利纘(이찬)◇증 영선군

동생- 절충장군

 漬(지)<박사공 10세/1-150><통계공파> 소정공(昭靖公)

   1453∼1517년 6월 30일 별세, 자는 덕윤(德潤) 호는 모암(慕庵).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계모 연일 정씨 밑에서 자랐으며 학업에 독실하고 병법도 통달했다. 1477년 겸사복이 되고 1491년(성종 22) 8월 만포(滿浦)에 적변(賊變)이 있자 내금위(內禁衛)로 출전하여 고산(高山)에서 내침한 수천명의 적을 무찔러 1등공신이 되어 3자급 올랐다. 1493년 고산리첨절제사(高山梨僉節制使)가 되고, 어모장군, 벽동, 용천군수를 거쳐 군자첨정(軍資僉正), 절충장군 선공감 부정(繕工監 副正), 1505년(연산 11) 정평부사(定平府使) 겸 사복장 오위장, 1506년(중종 1) 3등 공신(功臣)이 되어 협찬발란공록(協贊撥亂功錄) 병충분의결책익운(秉忠奮義決策翊運)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어 영선군(永善君)에 봉해지고 1514년(중종 9) 삼척부사를 역임했다. 1516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예조좌랑 임권(任權)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였다. 시호는 소정(昭靖)이고 가선대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봉해지고 도형 인각과 밭 100결이 내려졌다.

  1491년(성종 22) 8월 29일 임금이 말하기를,

  “적(賊)의 머리를 벤 사람은 누구인가?”

  하자, 이석동(李石仝)이 아뢰기를,

  “활을 쏜 사람들이 다투어 뒤쫓아 가서 목을 베었습니다. 또 도원수(都元帥)가 일찍이 여러 진(鎭) 영(令)을 내리기를, 적(賊)이 이르면 성중(城中)에서는 떠들지 말고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여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 일을 적당히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이날에 첨절제사(僉節制使) 강지(姜漬)는 적변(賊變)을 듣고서 곧 성상(城上)의 궁가(弓家)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 1인과 몽둥이 가진 사람 2인으로 하여금 몰래 숨어 엎드려 이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적(賊)이 강변(江邊)에 둔치고 통사(通事)를 불렀으나 짐짓 대답하지 아니했으며, 조금 후에 서자명(徐自明)이 누상(樓上)에서 대답하기를,‘통사(通事)는 없다.’고 하니 적(賊)이 말하기를 ‘어째서 없다고 말하는가? 우리는 너희 나라 사람을 빼앗아 가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이때 적(賊)의 보병(步兵)은 이미 몰래 강을 건너 국사당현(國祀堂峴)을 따라 방패를 끼고 강변(江邊)에 둔치고 있었으며, 또 강을 덮어 건너와서 적(賊)의 추장(酋長) 3인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서 사닥다리를 타고 성(城)에 올라서 돌을 뽑아내므로 우리 군사가 돌을 던지니 적(賊)이 성(城)에서 떨어져 달아나므로 군관(軍官) 유호(兪灝)가 쏘아서 그 이마를 꿰뚫었으며, 서자명(徐自明) 등이 또 2명을 쏘아서 죽이니 적(賊)이 모두 패하여 달아났습니다. 조전장(助戰將)은 군사를 거느리고 북문(北門)을 나가서 그 장성(長成)에 가는 길을 누르고, 강지(姜漬)는 이긴 기세(氣勢)를 타서 끝까지 뒤쫓아가니 적(賊)이 모두 절벽(絶壁) 아래로 떨어졌으므로, 우리 군사가 내려다보고서 이를 쏘았습니다. 그리고 적(賊)의 배가 좁아서 겨우 2, 3명만 용납하는데도 적(賊)이 건너기를 다투어 4, 5명이 같이 타게 되니, 배가 혹은 물에 가라앉기도 하고 혹은 물에 뜨기도 했는데, 그 중 1명이 화살에 맞아 놀라서 요동하면 배는 반드시 기울어져 뒤집히게 되어 이 때문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먼저 성(城)에 오른 사람을 어떻게 적(賊)의 추장(酋長)인 것을 알 수가 있었는가?”

  하니, 이석동(李石仝)이 아뢰기를,

  “그 갑옷과 투구와 그 무리들을 지휘(指揮)한 것을 살펴보니, 적(賊)의 추장(酋長)인 것이 의심이 났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싸우다가 죽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석동이 아뢰기를,

  “화살에 맞은 사람은 6명이나 되지만, 겨우 그 피부만 상처를 입었을 뿐이고 한 명도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적(賊)이 강 건너편에 있으면서 형세를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 군사가 그 도망해 숨은 놈을 찾아내어 저 적(賊)들에게 죽여서 보이고는 목을 베니, 적(賊)이 슬피 울면서 뛰기도 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자도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적(賊)의 병졸은 얼마나 되던가?”

  하니, 이석동이 아뢰기를,

  “성(城)을 포위한 자는 2백여 명이나 되었고 강 밖에 있는 기병(騎兵)이 또한 2, 3백명이나 되었으며, 만포(滿浦)에서 형적(形跡)을 나타낸 자는 또 이보다 많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좌부승지(左副承旨) 권경희(權景禧)에게 이르기를,

  “그런가? 이번 거사(擧事)는 그럴듯하다.”

  하니, 권경희가 대답하기를,

  “요사이 국가에서 여러 번 오랑캐에게 욕을 당했으니 비록 좀도둑질하는 자를 사로잡았더라도 또한 기뻐할 것인데, 하물며 적(賊)이 스스로 군사를 크게 일으켜 쳐들어왔는데도 목을 벤 것이 이와 같으니 기뻐할 만합니다.”<왕조실록 12집 88면∼15집 577면>  

 

배위

정부인 무안 朴氏(박씨) 1524년 8월 23일 별세. 아버지는 군수 관경(觀卿), 조부는 현감 이(이), 증조부는 군수 형(亨), 판서 의룡(義龍)의 5세손이며, 묘는 쌍분이다.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선영 아래 사좌(巳座) 석물이 있다. 능해군 구성(具晟)이 지은 묘지명과 수암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행장과 안동 김윤동(金潤東)이 신도비명을 짓고 후손 주형(柱馨)이 글씨를 쓰고 전서를 아울러 썼다. 부조묘는 처음에는 금천(衿川)에 있었으나 임란 때 소실되어 신축년 10월에 다시 세웠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다시 타버렸다. 1988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산 79번지에  재각과 함게 다시 세웠다. 1989년 10월 23일 묘 및 비석, 상석, 문인석, 촛대, 쌍사자, 석등 등이 고양시 향토 유적 제 27호로 지정 되었다.

 

아들

世琛(세침)◇군기시 첨정

 

사위

趙德期(조덕기) 풍양인 진사, 찰방. 아버지는 도사 세헌(世獻), 아들은 응경(應慶), 응길(應吉) 증판서, 응록(應錄) 진사, 사위는 조응진(趙應辰) 통정대부, 전주 이제민(李齊閔) 중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