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민국의 발전

 

  

 

 

 

대한 민국 정부 수립  1948년 8월 15일에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

 

 

  1945년, 우리 민족은 마침내 일제의 식민 통치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우리의 민족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는 희망으로 나라는 활기에 넘쳤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냉전(冷戰) 체제가 형성되면서 우리 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북한의 남침으로 우리 민족은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국군(복원 모형)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빼앗겼던 서울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귀국 환영 대회에서 연설하는 김구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김구 주석이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선거인 5·10 총선거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참관하에 치러진 선거 결과로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1]  8·15 광복이 가능했던 까닭은?

광복을 맞이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우리 민족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가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의 승리가 가져다 준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동안 우리 민족이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일제에 항거하여 꾸준히 전개해 왔던 독립 운동의 결실이기도 하였다.

 

  국내에서의 끈질긴 독립 운동, 만주와 연해주, 중국 대륙 등지에서의 항일 무장 투쟁,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 활동과 한국 광복군의 대일 항전, 국내외에서 일으킨 우리 민족의 잇단 의거 활동 등이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와 같은 독립 운동과 투철한 독립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중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연합국의 지도자들도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을유년

  ◇4월 4일-임시정부, 중국과 새 군사협정 체결(독자적 군사행동권 획득)

 

  8월 14일-여운형(呂運亨), 아베 총독의 정권 이양 교섭에 동의

 

  8월 15일-일본,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9월 2일-연합군 최고사령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의 한국분할점령 방안 공표

   ▷7일, 미국 극동군사령부, 남한 군정(軍政) 시행을 선포

   ▷9일, 총독부, 항복문서에 조인

   ▷11일, 군정장관에 아놀드 소장 취임

 

  10월 10일-김일성(金日成),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창설(46.7.29. 북조선노동당으로 개편. 49.6.∼남로당 흡수, 조선노동당으로 확대 개편)  

   ▷25일-독립촉성 중앙협의회 결성(총재 이승만)

 

  ◇11월 3일-평양에서 조선민주당 결성(당수 조만식)

   ▷23일-김구(金九) 주석 등 임정 요인들 환국

 

  ◇12월 28일-모스크바 3상회의.

   ▷30일-송진우(宋鎭禹), 괴한에게 피살.

   ▷31일, 전국에서 반탁데모˙파업˙철시 단행.

 

  ◇강석복(姜錫福)  임용 고시 제1회 판·검사 특별 임용 시험 합격

 

 

독립 지사들의 귀국

  광복과 더불어 국내의 일부 지도자들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독립 국가의 건설을 준비하였다. 이와 동시에 전국 각지에 수감되어 있던 많은 애국 지사들은 각자 이념에 따라 정당과 사회 단체를 조직하였다.

  한편, 8·15 광복으로 외국에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하던 애국 지사들이 귀국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군대, 공장, 광산 등에 강제로 끌려갔던 수많은 동포들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이제부터 우리의 손으로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희망과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온 민족이 다시는외국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각오로 새 나라의 건설에 나섰다.

  1945년 10월에는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고 있던 이승만이 귀국하였고, 이어 다음 달에는 김구 등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지도자들이 중국에서 귀국하였다. 오랜 망명 생활 끝에  귀국한 이들 지도자들도 정부 수립에 대비하여 정당과 사회 단체를 만들었지만,  서로의견이 엇갈린 데다 국민들의 정치적 경험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의견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한동안 정국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진주강씨 독립투사들

  국가와 민족의 독립과 생존이 위험에 빠졌을 때, 국가의 보전과 국토의 수호를 위해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싸우는 정신이 애국심이다.

  우리 문중에서도, 20 세기에 들어와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국권 회복을 위하여, 또 우리 민족 문화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인 분들이 수없이 많다.

   대표적인 인물로 강우규 의사를 들 수 있으며, 그밖에 수많은 애국 열사들이 조국 광복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것은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나라를 구했던 선조들의 구국 정신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광복군의 훈련  한국 광복군은 우리 민족의 힘으로 광복을 찾기 위해 국내 진입 작전을 추진하였다.

 

[2]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 과정은?

남북 분단

  우리 민족은 감격적인 광복을 곧바로 독립으로 이어 가지 못했다. 그것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명목으로 북위 38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설정하는 데 합의하고, 우리 나라의 남과 북에 각각 그들 나라의 군대를 진주시켰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북한 진주에 이어 미국군도 9월 초 남한에 진주하여, 남아 있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38도선은 이처럼 처음에는 미·소 양국에 의해 그어진 단순한 군사적인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진영의 대립이 심해지고, 두 진영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38도선은 점차 정치적인 분할선으로 바뀌어 갔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은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국토의 분단이라는 뜻밖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국 군은 3년간 군정을 실시하였다. 미 군정 하에서  남한은  정국을안정시키지 못하고 혼란을 거듭하였다. 그것은 미국 군이 한반도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데다가 수많은 정당과 사회 단체들이 난립하였고,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이 날카롭게 대립하였기 때문이었다.

 

 

1946년 병술년

  ◇1월 12일-장택상, 경기도 경찰부장에

  ○강안희(姜顔熙) 사법요원 양성소시험 합격

  7월 17일-38선 이북으로 통행 금지.

  11월 7일-노동대중당(勤勞大衆黨) 발족-위원장 강순(姜舜)

 

1947년 정해년

  1월 29일-검찰청 ()1> 검찰관은 6백만원 수뢰사건의 상무부 의료계장 정명채(鄭明采) 외 12명을 전부 기소하였다.

  ◇2월 19일-강인수2> 제주경찰감찰청장

  ◇2월 20일-강수창(姜壽昌) 4대 경북경찰부장(∼1948.9.20)

  ◇-강용흘(姜鏞訖)서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에

  4월 24일-경찰장 강보형(姜寶馨) 4대 3관구 경찰청장(충남지방)(∼1948. 09. 21.)

  5월 21일-제2차 미·소공동위(미 대표 브라운 소장, 소 대표 스티코프 중장) 개최.

 

  ◇8월 20일-여운형(呂運亨) 암살 당함(1885∼)

 

1948년 무자년

  4월 3일-제주도에서 '4·3사태' 시작.

    ▷6일-충청남도 서(徐) 지사, 강대창(姜大昌) 제5관구 경찰청장, 충남 및 대전부선거위원회위원들이 조위(朝委) 선거감시단을 접견하였다.

                                                                                                  

                                          1> 이름 미확인  2> 한자 성(姓) 미확인

 

  북한에도 여러 정치 세력이 등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조만식 등 민족주의 세력과 중국이나 소련에서 귀국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소련군은 공산주의 정권 수립을 위해 민족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북한에는 공산주의 제도가 도입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신의주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반공 의거가 일어났으며, 민족주의 계열의 지도자들이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남한으로 내려왔다.

 

  공산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많은 주민들도 자유를 찾아 38도선을 넘어왔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전혀관계 없이 그어진 38도선으로 인해 한반도의 남과 북에는 각각 다른 이념과 제도가 도입되었다.

 

 

 

 

  

      신탁 통치 반대 운동

 

1948년 무자년

  4월 3일-제주도에서 '4·3사태' 시작.

    ▷6일-충청남도 서(徐) 지사, 강대창(姜大昌) 제5관구 경찰청장, 충남 및 대전부선거위원회위원들이 조위(朝委) 선거감시단을 접견하였다.

    ▷19일-김구·김규식 방북,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제1차) 참석.

 

  4월- 강봉용  9대 진양군수(∼1949. 6.)

 

  5월 10일-유엔 감시하에 남한 총선거 실시(좌익계·남북 협상파 불참).

    ▷14일-북한, 남한 송전(送電) 중단, 남북협상 결렬.

    ▷31일-강욱중(姜旭中), 강기문(姜己文), 강달수(姜達秀) 제헌국회 의원 당선

 

  ◇7월 20일-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 피선

 

  ◇8월 1일-국회 이범석(李範奭) 국무총리 인준.

    ▷4일-국회의장에 신익희(申翼熙), 부의장에 김약수(金若水) 선출.

    ▷5일, 국회, 김병로(金炳魯) 대법원장 인준.

 

   ◇9월-강정택(姜鋌澤) 2대 농림부 차관에(∼ 1949. 3.)

  ◇9월 9일-북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10월 20일-여수·순천 사건 발생.  

 

신탁 통치 문제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한국에 대해 최고 5년간 미국, 영국, 소련의 4개국이 신탁 통치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광복 후 독립 정부의 수립을 고대하던 우리 민족은 신탁 통치의 결정을 민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민족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반탁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처음에는 일부 공산주의자들까지 반탁 의사를 밝혀 단합의 계기가 마련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곧 태도를 바꾸어 신탁 통치안을 지지하였다.

 

  이처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놓고 남한에서는 민족주의 진영이 반탁 운동을 전개하고 공산주의 진영이 찬탁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좌우 대립이치열해졌다. 한편, 북한에서는 반탁을 주장한 조만식이 소련 당국에 의해 연금되고, 민족주의 진영의 반탁 운동은 금지되었다.

 

미·소 공동 위원회

  신탁 통치안에 대한 격렬한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신탁 통치 문제와 한국의 임시 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때, 소련 측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단체들로만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고, 미국 측은 모든 정치단체를 참여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던 미·소 공동 위원회는 양측의 주장이 대립되고 미·소 간의 냉전이 격화되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제헌 국회 의원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한반도 문제를 놓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 아무런 합의점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엔 총회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9개국으로 구성된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을 설치하고, 이 위원단의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통일 독립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인도 등 9개국으로 구성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여 정부 수립 문제에 관해 정치 지도자들과 상의하는 등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소련 측에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38도선 이북 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이들의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남북 분단을 알리는 38도선 푯말│강원 양양

 

1948년 무자년

  강선명(姜善明) 전남 목포 보선에서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1월 2일-강석복(姜錫福) 검사가 내란 음모죄 등으로 송청된 최능진·서세충(徐世忠) 등에 대한 신문조서를 받았다.

 

  ◇11월 8일-제1회 98차 국회본회의, 시국수습대책 결의안 중 청년단체 통합과 호국군 편성 문제에 대해 강욱중(姜旭中) 의원 등이 토론하였다.

 

  ◇12월 29일-농림부, 농지개혁법 세칙작성 등을 위해 강진국(姜辰國) 농지국장을 비롯하여 중앙청 관계과장들을 각 도 및 부·군·읍·면에 파견하여 지방사정을 청취하였다.

 

  ◇강진구(姜鎭求), 1948년과 1949년에 걸쳐 고향인 부여에 천조궁(天祖宮)을 건립하여 단군의 영정인 천진(天眞)을 모셨다.

 

1949년 기축년

  ◇1월 8일-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 발족.

 

  ◇2월-강기덕(姜基德)함남지사(∼1950)

  ◇2월 2일-강진국(姜辰國) 농림부 농지국장, 안양지역 농민들과 농지개혁에 대한 농촌좌담회 참석

   ▷21일-반민특위, 대량 검거에 착수

 

 

 

  이에 유엔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세울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유엔의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는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한편, 통일 정부의 수립을 열망한 김구, 김규식 등은 남한만의 선거를 반대하고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남북의정치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만나서 한반도 통일 문제를 협의하자는 것이었다.

 

  1948년 4월에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 협상 회의에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이참석하여 통일  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마침내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감시 아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5·10 총선거는 일부의 방해와 반대가 있었으나, 예정대로치러졌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실시된 민주 선거였다. 이 선거 결과로 대한 민국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대한 민국 정부 수립 행사

 

1949년 기축년

  ◇3월 16일-()2> 내무국장을 강원도선전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뽑았다.

 

  ◇4월 1일-지리산부대 출몰과 관련하여 민심수습을 위한 선무반을 편성하여 경상남도청 ()3> 학무국장이 산청 현지에 출장하였다.

 

  5월 5일-강태무(姜泰武) 대대 병력을 이끌고 월북

 

  ◇5월 7일-제6여단 사령부, 표무원(表武源)·강태무(姜泰武) 부대 월북 사건진상에 대해 발표

    ▷5월 20일-남로당(南勞黨) 국회 프락치 사건 적발.

 

  7월-강직순(姜直淳) 3대 체신부차관(∼ 1952. 7.)

    ▷14일-주한 미경제 협조처 물자 취급에 한국인 참여가 필요하여, ()3> 세관국장 등 외자총국 관계, 한국무협(韓國貿協) 간부 이활(李活)·김익균(金益均)씨 등이 참석하여 무역 문제 토의회를 개최하였다.

 

  8월 3일-고 백범 김구(金九) 선생 살해범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 대한 중앙고등군법회의 제1회 공판이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 개정되었다. 주심 재판관 원용덕(元容德) 준장, 배심 재판관 강문봉(姜文奉) 대령, 동 양국진 대령, 동 원태섭대령, 동 김형일 중령, 동 계인주 중령, 민간 변호인 이상기(李相基)가 출정하였다. 

 

 

  국회는 헌법을 제정하여 7월 17일에 공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행정부를 구성하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 민국은 역사상 우리 국토에 우리 민족의 손으로 세운 최초의 민주 공화국이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은 이래 우리 민족이 그토록 염원하던 우리의 정부가 수립된 것이었다.

 

  한편, 1948년 12월에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 총회는 대한 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절대 다수로 승인하였다. 이로써 대한 민국은 국제적으로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었고, 자유 우방의 지지를 받아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

 

1949년 기축년

  8월 28일-강진국(姜辰國) 농림부 농지국장, 분배가 완료된 귀속농지는 분배 대상이 아니라고 기자 회견에서 밝혔다.

 

  9월 1일-반민특별재판부 강세형(姜世馨) 재판장은 8월 31일 반민특위의 공소시효 완료에 대하여 재판부는 이와는 아무 관련없이 앞으로 계속하여 기소되어 온 반민자의 재판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1949년 기축년

  국민회(國民會) 경상남도대회를 개최하여 도본부위원장·부위원장 개선(改選)에 위원장 후보에 탁임조(卓任朝), 강홍렬(姜弘烈)·신중목(愼重穆)씨이다.

 

  12월 4일-국회·문교부 조사단, 진주사범학교 교사(校舍)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진주에 온 ()1> 교육국장은 진주시민에게 일임하겠다 하였다.

 

1950년 경인년

  ◇1월 14일-강직순(姜直淳) 체신부차관, 한일무선 개통 등에 대하여 기자에게 언명하였다.

    ▷26일-한·미 상호 방위 원조협정 조인.

    ◇2월 11일-한·일간 국제전화가 개통되어 장관 훈화를 강직순(姜直淳) 차관이 대독하고 메시지 교환이 있었다.

 

  ◇3월 8일-반민족행위자 박흥식(朴興植), 외교문서로 가장하여 달러와 금불상을 밀반출하려다 적발되어 ()2> 세관국장 및 김 서울세관장의 언명이 있었다.

                                                                                              

                                           1> 2> 이름 미확인 3> 4> 계보 미상

 

[3]  6·25 전쟁의 원인과 그 영향은? 

6·25 전쟁의 배경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할 때 뒤따라 들어온 김일성 등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점차 실권을 장악하고 독재 체제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또, 이들은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고 민족주의 이념을 탄압하였으며, 북한의 공산화를 서둘러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2월에는 사실상의 공산 정권인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김일성이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토지 개혁 법령, 중요 산업 국유화 법령 등을 발표하여 공산주의 체제의 기반을 강화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48년 9월에는 북한에 공산 정권을 수립하였다.

 

  북한 공산 정권은 소련과 비밀 군사 협정을 맺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한편,대한 민국에 대한 무력 남침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당시  남한은, 제주도4·3 사건과 여수, 순천 10·19 사건 및 각지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와 파업 등으로 사회가 안정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정당과 사회 단체의 난립으로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실정이었다.

 

 

 

 

1950년 경인년

  ◇3월 8일-강기문(姜己文) 의원 석방에 관한 동의안 가결.

 

  ◇5월 30일-제2대 참의원 선거

    제주도 을구 강창용(姜昌瑢) 당선

 

  ◇6월 10일-북한군 총참모장 강건(姜健), 사단장 여단장 비상 비밀회의에서 각 부대는 23일까지 전투에 돌입하기 위한 배치이동을 완료하라는 명령 시달.

    ▷19일-제2대 국회 개회, 의장에 신익희(申翼熙)

 

  ◇6월 25일-북한 공산군 남침을 개시

    ▷28일-서울 함락, 한강 인도교 폭파.

    ▷29일-북괴군(北傀軍), 서울 점령.

 

  ◇9월 15일-유엔군, 인천 상륙작전 개시.

    ▷28일-서울 수복.

 

  ◇10월 1일, 국군, 38선 돌파,

    ▷19일 평양 탈환

    ▷26일-UN군, 북진하여 한·만(韓滿) 국경에 도달

    ▷27일, 정부, 서울 환도. 29일, 이대통령, 평양 시찰. 12월 4일, 평양 철수.

 

  ◇11월 6일-중공군 30만 압록강변에 집결

 

  ◇12월 4일-평양 철수. 북한 주민 약 50만 명, 피난길 등정.

                                                                           

                                         1> 계보 미확인

 

북한의 남침

  북한은 남침 준비를 서두르면서도 겉으로는 남한에 대해 평화 공세를 펴며 남침 의도를 숨기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38도선 전 지역에 걸쳐 남침을 감행하였다.

  우리의 국군은 빈약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자유 수호의 결의를 다짐하면서 북한 공산군의 침략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국군은 공산군의 대규모 남침에 일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정부는 공산군의 남침을 피해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피난하여, 이 곳을 임시 수도로 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나이 어린 학도병들도 자유 수호를 위해 책 대신 총을 들고 국군과 함께 용감히 싸웠으며, 많은 청년들이 군에 지원하여 조국 수호에 앞장섰다.

 

  북한 공산군의 침략이 있자, 긴급 소집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공산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유엔군의 한국 파병을 결의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계기로 반격을 시도하여 1950년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였고, 이 기회에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생각으로 공산군을 쫓으며 북한 지역으로 진격하였다.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듯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51년 신묘년

  ◇1월 1일-중공군 6개 사단, 압록강 건너 남진 시작.

 

  ◇2월 10일-국군, 서울에 진입.

     ▷11일-거창(居昌) 양민 학살 사건 발생.

 

  ◇4월 11일-맥아더, 유엔군총 사령관직에서 해임. 후임에 리지웨이 중장 임명.

 

  ◇5월 9일, 이시영(李始榮) 부통령, 이대통령을 성토하고 사직. 15일, 국회, 부통령에 김성수(金性洙) 선출.

 

  ◇10월 25일-남북 휴전 회담, 장소를 판문점(板門店)으로 옮김.

 

  ◇강인수(姜人壽) 중국군 육군소장으로 복무

 

1952년 임진년

  ◇1월 18일-이대통령(李大統領), 평화선(平和線)을 선포.

 

  ◇8월 7일-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함태영

 

  ◇10월 1일-강인택(姜仁澤), 체신부장관에(∼1954.6)

 

1953년 계사년

  ◇강문봉(姜文奉) 육군 중장으로

 

  ○강순원(姜淳元) 제2회 군법무관 전형시험 합격

 

  중공군은 수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인해 전술로 밀고 내려왔다. 그리하여 한때 서울을 다시 내주었으나, 전력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재탈환하고, 다시 38도선 부근까지 적을 몰아내었다. 그 후,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휴전 회담이 성립되어 휴전이 이루어졌다(1953.7).

 

 

 

 

 

 

 

  

  

 전쟁으로 파괴된 가옥

 

1953년 계사년

  ◇7월 27일-휴전협정 조인, 한국은 불참.

 

  ◇9월-강성태(姜聲邰)> 재무부 차관에(∼ 1954. 7.)

 

  ◇11월-강영훈(姜英勳)  국방부 차관에(∼ 1953. 11.)

 

1954년 갑오년

  ◇강문봉(姜文奉) 제2군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실시 3대 민의원 당선자

  ○강세형(姜世馨)

  ○강승구(姜昇求)

 

  ◇7월 3일-감찰위원장(監察委員長)에 강인택(姜仁澤) 취임(∼ 1955. 2.).

 

  ◇7월 4일-상공부장관(商工部長官)에 강성태(姜聲邰) 임명(∼1955).

 

6·25 전쟁의 결과

  북한이 일으킨 6·25 전쟁은 자유와평화에 대한 도전이자,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재산을 잃었다. 전쟁으로 인한 남한의 사상자 수만 해도 150만 명에 달하였고, 수많은 전쟁 고아와 이산 가족이 발생하였다.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졌고, 공장, 발전소, 건물, 교량, 철도 등의 경제 시설도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인명과 물질적 피해뿐만 아니라 정신적 피해도 막심하였다. 남북한  간에는  전쟁으로인하여 적대 감정이 팽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평화적인 통일보다는 대결의 국면으로 치닫는 민족의 비극이 확대되어갔다.

  

 

 

 

 

 

 

 

1955년 을미년

  ◇강용구(姜鎔求) 대종교 정교(正敎)에

  ◇9월 18일-호헌동지회의 자유민주파, 민주당 창당(대표최고위원 申翼熙).

  ◇10월 5일-4년제 육사(陸士), 첫 졸업식

 

1956년

  ◇강성태(姜聲邰), 한국무역협회 회장에 (∼ 1958.4)

  ◇강창규(姜昌奎) 서울시 문화 상공예상 수상

 

  ○강달수(姜達秀), 강해룡(姜海龍) 8회 고등고시 합격

   

  ◇11월 11일-김창룡1> 중장 살해범 허태영(許泰榮)의 부인 황운하(黃雲夏), 강문봉(姜文奉) 중장이 주모했다고 재심을 탄원.

 

1957년 정유년

  ◇4월 11일-김창룡(金昌龍) 중장 피살사건(被殺事件) 군재(軍裁)에서 피고 강문봉(姜文奉)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강용구(姜容求) 제9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1> 김창룡(金昌龍) 1920∼1956. 함남 영흥출신. 1941년부터는 일본인의 추천으로 일본 헌병대 군속으로 근무하다가 관동군 헌병교습소에 들어갔다. 광복 후 남하여 1947년 경비사관학교에 입교, 졸업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특무대장이 되었으며, 1953년 준장에, 1955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특무대장 재직 때에는 공산당 색출과 군내의 적색분자 제거에 공헌이 커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이를 기화로 군대내의 명령계통을 무시하면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다가, 1956년 1월 30일 출근 도중 저격당했다. 당국은 범행 배경을 김창룡의 주요 참모였던 허태영과 이진용이 김창룡의 미움을 받아 좌천된 데에 대한 원한으로 발표하였으나, 허태영 부인의 탄원으로 사건의 최고 배후자가 육군중장 강문봉임이 밝혀졌다. 허태영은 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김창룡은 대통령의 환심을 독점하면서, 고위 군장성들간에 이간을 획책하여 군의 단결을 해쳐왔으므로 그를 제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군법회의에서 강문봉·허태영·이진용에 대해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강문봉은 6·25남침 당시의 공훈이 참작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휴전협정 체결 배경

  수도 서울의 주인이 네 번이나 바뀐 6·25 전쟁이 1년째에 접어들자, 1951년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대표가 먼저 휴전회담을 제의하고 미국이 이에 동의하여 휴전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1951년 7월 8일 양측은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시작, 이후 2년여 동안  1000시간에 가까운 격렬한 논쟁을 거듭하는 지루한 회담이 계속되었다.

 

  군사경계선 확정과  포로교환 문제로 수많은 우여곡절과 난항을  거듭하면서휴전을 앞두고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정각 유엔군 수석대표 헤리슨 중장과 공산측 대표 남일(南日)이 제159차 본회의장에 서 그들은 악수도 목례도 하지 않고, 전문 5조 63항의 휴전 조인문에 합의·서명하였다. 양측 대표가 휴전문서에 서명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1분밖에 되지 않았다. 이로써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에서 6·25전쟁은 끝났다.

 

  휴전회담은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휴전회담을 통해 얻은 결과는 단순한 전투 행위의 중지에 불과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제2의 38선인 휴전선으로 인해 국토와 민족 분단의 비운을 다시 한 번 맞게 되었다.

 

 

 

 

1958년 무술년

  ◇4월-강성태(姜聲邰) 한국무역협회 회장에(∼ 1960. 5.)

  ◇제4대 민의원 의원 당선자

    강성태(姜聲邰)

    강영훈(姜永薰)

    강종무(姜종무)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자

    강신옥(姜信玉)

     강현태(姜鉉台)

 

  ○음6월15일-경덕재(景德齋)를 건립하였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에 통계공파보 분질 잉여금과 경북 칠곡 봉희(鳳熙) 일가의 특별 성금과 기타 성금으로 경기도 이천에 있는 명성황후 친가 민치록(閔致祿)의 사가를 매입하여 그 목재 절반으로 경덕재를 건립하고 나머지 일부는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차자 참판공(휘 안복) 재각 건립에 사용하였다.

 

1959년 기해년

  2월 27일-대법원, 진보당사건 조봉암(曺奉岩), 양명산(梁明山)에 사형언도

 

  9월 17일-태풍 사라호 강타(사망·실종 929명).

 

1960년 경자년

  ◇강서룡(姜瑞龍) 치안국장에

 

  ◇강영훈(姜英勳)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2월 25일-조병옥(趙炳玉) 박사 국민장(國民葬) 거행.

 

 

 

 

 

2  민주주의 시련과 경제 개발

 

 

 

 

  이승만 정부는 부정 부패와 독재 정치로 국민들의 저항을 받았고, 4·19 혁명으로 무너졌다. 이후 의원 내각제를 채택한 장면 내각이 들어섰으나, 곧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부 세력의 군사 정변으로 무너졌다. 군정을 거쳐 수립된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계획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장기 집권을 꾀하여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4·19 혁명 기념탑│서울 강북 4·19 혁명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학생과 시민들이 일으킨 민주 혁명이었다

경부 고속 국도  경제 발전의 상징인 고속 도로가 1970년에 완공되었다.

 

 

 

[1]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은 왜 일어났는가?

 

4·19 혁명

  6·25 전쟁을 겪은 뒤 이승만 대통령은 전후 복구와 민심 수습의 일환으로 북진 통일론을 내세우며 강력한 반공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 하에서 정치는 혼란을 되풀이할 뿐,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집권 여당인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해 무리하게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관권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이리하여 민주 정치는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고 독재 정치가 강화되었다. 이처럼, 이승만 정부는 민주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를 저버림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1960년 3월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은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감행하여 정권을 연장하려 하였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은 부정 선거와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여 궐기하였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학생과 시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마침내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자유당 정권도 무너졌다.

 

  4·19 혁명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들이 일으킨 것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며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0년 경자년

  ◇3월 15일-마산(馬山)에서 부정선거 규탄 데모 발생(경찰과 충돌, 사망 7명 중상 13명 경상 59명 데모 주동자 21명 구속).

 

  ◇4월 19일-4·19 학생 데모.

 

  ◇5월 21일-내각책임제 개헌안 공고(6.15. 국회 통과·공포. 제2공화국 성립됨).

 

  ◇5월 29일-이승만, 하와이로 망명.

 

  ◇6월 19일-아이젠하워 미대통령 내한.

 

  ◇7월 29일-제 5대 민의원 초대 참의원 선거

  강영훈(姜永薰), 5대 민의원 당선

  ○강승구(姜昇求), 5대 민의원 당선  

  ○강택수(姜澤秀), 참의의원 당선

 

  ◇8월 13일-윤보선(尹潽善), 4대 대통령으로 취임.

 

  ◇8월-장면(張勉), 총리 취임.

 

  ◇10월-강영훈(姜英勳)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1961.5.)

 

1961년 신축년

  ◇1월 25일-특별재판소 심판관 강영수(姜영수)

 

  ◇2월 3일-대일 정책 결의안(선국교·후경제 등) 채택

 

 

장면 내각의 성립

  이승만이 이끈 자유당 정권이 4·19 혁명으로 무너지자, 과도 정부가 성립되어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이 때,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 국회를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새로 구성된 국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국무 총리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 속에 장면 내각이 성립되었다(1960년).

 

  장면 내각은 독재 정치를 종식시키고 민주 정치를 실현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장면 내각은 4·19 혁명 직후의 사회적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으며, 국민들이 기대하는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지도 못하였다.

 

  이는 장면 내각이 4·19 혁명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집권당이었던 민주당의 분열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한데다가 계속되는 시위로 인하여 사회 혼란이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1961년 신축년

  ◇5월 16일-군부(軍部) 쿠테타 성공, 군사혁명위원회 설치, 의장에 장도영(張都暎) 중장, 부의장에 박정희(朴正熙) 소장.  

 

  ◇6월 16일-강원채(姜琓埰) 10대 대구시  시장(∼1963.12.11)

 

  ◇강영훈(姜英勳) 육군 중장 예편

 

1962년 임인년

  ◇강병두(姜炳斗) 국민여자 초급대학 학장에 취임.

 

  ◇3월 9일-강문봉(姜文奉) 전 육군중장 복권.

   ▷24일-박정희(朴正熙) 의장이 대통령 권한 대행을 함.

 

  ○강원일(姜原一) 제15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강인애(姜仁崖) 제15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5월-강석진(姜錫鎭) 제4대(잔여 임기)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장면 내각의 기자 회견(1961.2.8.)

 

5·16 군사정변

  민주 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던 장면 내각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군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집권 9개월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군사 정변의 주체 세력은 헌법의 효력을 중단시키고,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여 2년 6개월 동안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사 정부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보호에 앞서 반공을 국시로 내걸고 경제 재건과 정치 안정 및 사회 기풍의 쇄신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마련하여, 이를 국민 투표를 통해 확정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정변을 일으켜 군사 정부를 이끌었던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조국의 근대화를 내세우고, 공업화를 우선 과제로 삼는 성장위주의 경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갔다. 또, 박정희 정부는 민주 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중립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숙제로 남아 있던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한·일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베트남에 국군을 파병하였다.

 

 

1962년

  ◇6월 10일-제2차 통화개혁(10대 1로 평가절하, ‘환’을 ‘원’으로 변경).

 

  ◇10월-강순(姜舜) 북한최고인민회의 제3기대의원 및 상임위원 역임

 

  ◇12월 17일-헌법개정안 국민투표에서 가결.

 

1963년 계묘년

  ◇8월 30일-박정희(朴正熙) 의장 전역(轉役)

 

  ◇강기천(姜起千) 최고회의 최고위원·법사위원장  

 

 ◇10월 17일-박정희(朴正熙) 후보, 15만 여표 차로 대통령에 당선(4,692,644표).

    ▷23일-오치성(吳致成), 강상욱(姜尙郁) , 조창대(曺昌大), 장동운(張東雲) 등 5월동지회 핵심 멤버, 공화당(共和黨)에 입당.

 

  ◇11월 26일-강승구(姜昇求) 6대  국회의원 당선

  ◇강상욱(姜尙郁) 제6대 국회의원

  ◇강선규(姜善圭) 제6대 국회의원

  ◇강문봉(姜文奉) 제6대 국회의원

 

  ◇12월 17일-제3공화국 발족(새 헌법 발효).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 제6대 국회 개원.

  ◇12월-강봉수(姜鳳秀) 8대 보사부차관 (∼1964. 7.)

  ◇12월-강서룡(姜瑞龍) 13대 국방부차관 (∼1968. 5.)

 

 

  박정희 정부는 근대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여 경제 성장과 국력배양에 기여하였으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의지는 약하였다. 장기 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강행하였으며,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으로 국내외로부터 독재 정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경부 고속 도로

  

 

 근대화된 농촌 새마을 운동은 농촌의 근대화와 생활 향상을 위해 추진되었다.

 

1964년 갑진년

  ◇1월 11일-강계원(姜啓元)  10대 대구시  시장(∼1966.5.24)

 

  ◇2월 28일-박대통령, 진해(鎭海)회견에서 한일회담(韓日會談)을 3월까지 결말 짓겠다고 언명.

 

1965년 을사년

  ◇2월 25일-파월(派越) 비둘기부대 제1진, 사이공에 상륙.

 

  ◇7월 12일-강문봉(姜文奉)의원(민중당), 외무위원(外務委員)을 사퇴하고 외유(外遊)

 

  ◇10월 4일-강재구(姜在求) 대위, 맹호 제1연대 제10중대장, 훈련장에서 부하의 실수로 산화.

 

1966년 병오년

  ◇7월 1일-제7대 해병대 사령관에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취임(∼1969. 7. 1)

 

  ◇9월-강측모(姜則模) 4대 함북지사(∼1980. 8>)

 

  ◇10월 14일-문교부, 대학입시 예비고사제  실시 발표.

 

1967년 정미년

  ◇3월 22일-북한 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 판문점서 위장귀순.

 

  ◇5월 3일-제6대대통령 선거실시(박정희 당선).

  ◇6월 8일-제7대 국회의원 선거.

 

 

 

 

 

[2] 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 과정과 그 성과는?

 

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거듭 추진하고 수출의 증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은 뒤떨어진 경제를 발전시켜 빈곤에서 벗어나 자립 경제를 달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해 정부는 외국의 자본을 도입하여 많은 공장을 건립하였고, 이에 따라 고용이 확대되고 수출도 해마다 늘어나게 되었다. 또, 정부는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기간 산업의 확충, 과학 기술의 개발에 노력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정부는 산업의 발달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경부 고속 국도를 비롯하여  여러 고속 도로를 건설하였다. 이에 전국이 1일 생활권에 들게 되었으며,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도 점차 줄어들었다.

 

 

 

1968년 무신년

  ◇1월 21일-1·21사태, 북한 무장공비 31명 서울 침입.

  ◇5월  21일-강서룡(姜瑞龍), 제18대 교통부장관 취임(∼ 1969.10)  

 

  ◇10월 25일-강춘희(姜春熙) 주(駐)오트볼타 겸임대사 신임장 증정(아이보리코스트 상주).

 

  ◇11월 21일-시·도민증 없애고 주민등록증으로 대체.

 

1969년 기유년

  ◇2월 10일-강춘희(姜春熙) 주(駐)시에라리온 겸임대사 신임장 증정(아이보리코스트 상주).

 

  ○진주강씨 서울종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강성태(姜聲邰) 전 상공부장관을 추대하였다.

 

  ◇강기천(姜起千) 해병대장 예편

 

 

  경제 개발 계획은 1960년대에는 경공업 위주로 추진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에는 점차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철강, 석유 화학, 기계, 전자, 조선, 자동차 등 중화학 공업의 성장과 수출이 두드러졌고, 이 분야의 기업 활동이 왕성해졌다. 이로써 우리 나라는 공업화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으며, 경제 발전도 획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경제의 성장

  중화학 공업의 육성과 함께 정부는 농촌의 근대화와 생활 향상을 위해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였다. 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 정신으로 한 새마을 운동은, 그 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던 농·어촌 개발에 착수함으로써 농·어촌의 가난했던 역사를 청산하고 주민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운동을 계기로 농·어민들의 환경 개선과 소득 증대 사업이 이루어져, 농·어촌의 생활 수준과 소득도 점차 높아져 갔다.

 

  경제 개발 계획이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우리 나라의 경제는 놀랄 만큼 성장하여 공업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출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으며, 생산성이 향상되고기술이 개발되어 국제 경쟁력도 크게 강화되었다. 우리 근로자들은  경제 발전을 위해 국내에서는 물론,  외국에서 도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며 근면한 한국인이라는 인상을 전세계에 심었다.

 

1970년 경술년

  ◇강진철(姜晉哲) 고려대학교 박물관장에(∼1976) 취임했다.

 

  ◇강재섭(姜在涉) 12회사법시험 합격

  ◇강기원(姜基遠) 12회사법시험 합격

 

  ◇8월 19일-강춘희 주(駐) 칠레 대사 신임장 증정.

 

  ◇10월 13일-강춘희 주(駐) 칠레대사, 콜롬비아 겸임대사 신임장 증정.

 

1971년 신해년

  ◇5월 13일-강문봉 주(駐) Swiss대사 신임장 제정.

 

  ◇강종쾌(姜鍾快) 13회사법시험 합격

 

  ◇6월-강봉수(姜鳳秀) 산림청 청장에(∼1973. 1.)

  ◇6월 20일-강두현(姜斗賢) 36대 경남경찰청장 (∼72. 7.15)

 

  ◇5월 25일-제8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자.

  ○강근호(姜根鎬)

  ○강병규(姜秉奎)

  ○강재구(姜在邱)

  ○강필선(姜弼善)

 

  ◇7월 8일-충남 공주에서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 발굴.

 

  ◇7월 12일-강문봉 주(駐) Holy See대사 신임장 제정(스위스 상주).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종래의 경제 개발 계획이라는 명칭을 경제 사회 발전 계획으로 바꾸고, 목표를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을 통한 국민 복지의 향상에 두었다, 그리하여 각 부문별로 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켜 사회의 발전을 촉진하고, 합리적인 제도를 정착시켜 국민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정책의 방향을 바꾸었다.

  1980년대 말에 수출 환경의 악화로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시장 경제가 원활하게 운용되고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개발 위주의 정책으로 인하여 시장 경제의 건전한 기능이 위축되고 소득 분배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났다.

 

서울 올림픽 대회의 개최

  지속적인 경제 성장으로 국력이 크게 신장된 우리 나라는 제 24회 올림픽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는 세계 160개국 140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여 기량을 겨룸으로써 체제와 이념, 종교와 인종의 차이를 초월하여 인류의 화합을 이룬 대회였다.

 

  우리 나라는 서울 올림픽 대회를 계기로 소련, 중국을 포함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 국교를 수립하게 되었다. 서울 올림픽 대회는 우리 민족의 기상과 우리들이 쌓아 온 국력을 전세계에 과시한 것이었다.

 

  한편, 제 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에서도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하는 등 각종 경기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체육 한국의 위상과 우리 민족의 저력을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 개막식 서울 올림픽 대회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전세계에 보여 주었다

.

 

 

 

 

3 민주화 운동과 통일을 위한 노력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위하여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각계 각층에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결국, 10·26 사태로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뒤이어 일부 군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5·18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국제 정세의 변화와 함께 남북 관계도 변하여, 점차 대화와 타협을 통한 평화 공존을 모색해 가고 있다.

 

 

 

 

10월 유신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 국무 회의에서 유신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민주 헌정의 회복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남북 적십자 회담 남북 간 평화 협상의 길이 처음 열리게 되었다.

 

 

 

 

 

한반도기를 앞세운 남북한 선수단  남북한 선수단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회 개막식에서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함께 입장하였다.

 

[1] 197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의 전개 과정은?

 

10월 유신

  19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어렵게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정권은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듬해 10월에 헌정을 중단시키고 유신을 선포하였다. 이른바 유신 체제의 확립으로 통일 주체 국민 회의가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사실상 장기 집권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로써 박정희 정부는 독재 체제로 치달았다.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자유와 권리를 억압당한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유신 헌법을 개정하자는 주장에 많은 국민들이 동조하여 장기 집권이 어려워진 박정희 정부는, 긴급 조치를 발동하는 등 여러가지 강경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는 10·26 사태가 발생하였다.

 

 

 

 

 

 

 

 

 

 

 

 

 

강중희(姜重熙) 회장

 

 

 

1971년 신해년

  ◇10월-유신 선포

 

1972년 임자년

  ◇강운태(姜雲太) 제11회 행정고시 합격

  ◇11월 1일-이후락(李厚洛) 남북조절위 공동위장, 평양으로 출발

 

1973년 계축년

  ◇2월 27일-제9대 국회의원 당선자

  ○강문봉(姜文奉)

  ○강기천(姜起千)

  ○강상욱(姜尙郁)

  ○강길만(姜吉만)

 

  ◇4월-강안희(姜顔熙) 14대 서울고법원장(∼1975. 9.)

 

  ◇12월-강중희(姜重熙) 초대 한국상장회사협의회장(∼1975. 9.)

 

1974년 갑인년

  ◇2월-강영수(姜泳琇) 17대 경남도지사에(∼ 1976.10.)

 

  ○7월 13일-진주강씨 서울종회를 진주강씨 중앙종회로 개칭하고 창립총회를 거행하였다.

 

  ◇강길봉(姜佶奉) 제16회 사시 합격

 

  ◇8월 15일-광복절 기념식장서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 발생. 영부인 육여사 사망.

 

봉산사 중건

  도시조 강이식 장군의 사당인 봉산사(鳳山祠)는 1921년에 새로 지어 도시조님을 비롯한 은열공, 어사공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1940년 일제의 토지 수요령에 의하여 수용당하고, 옛날 봉암(鳳岩)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으나, 그후 30여 년이 흐르는 세월동안 많이 훼철되어 1975년 강계중 전 회장이 거액의 사업비를 희사하고, 후손들과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83년 12월 준공되어 오늘에 이른다.

 

  매년 음력 3월 10일에는 전국에서 모인 후손들이 봉산사에서 도시조를 기리는 봄제사를 올린다.

 

 

 중앙종보

 

1975년 을묘

  ◇3월-강용순(姜勇淳)  5대 수산청  청장(∼1976.5)

 

  ○음2월 7일-봉산사(鳳山祠) 중건 부지로 편입된 봉양재(鳳陽齋)를 헐어 목재를 보관하였다.

 

  ○강형선(姜亨善), 진주강씨 은열공파대종회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10월-강안희(姜顔熙) 대법원 대법관에(∼1980.  4.)

 

  ◇11월 11일-강두현(姜斗賢) 34대 전남경찰국장에(∼1976.  4.)

 

1976년 병진년

  5월 29일-봉산사 재건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11월-진주강씨 중앙종회 제2대 회장에 강대곤(姜大崑) 일가가 선임되었다.

 

  진주강씨 중앙종보 창간  

 

  

5·18 민주화 운동

  10·26 사태를 계기로 군대 내의 일부 정치화된 집단은 1979년 12월 12일,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군권을 차지하였고, 나아가 정치적 실권도 장악하였다.

 

  이에 군인들의 정권 장악 기도에 반대하고 자유 민주주의 헌정 체제의 회복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위는 광주에서 절정을 이루어 5·18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민주화 운동과 기성 정치인을 억압하고 실권을 장악한 군부 세력은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자신들의 정권 장악에 유리하도록 헌법을 개정하였다. 즉, 국민의 직접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강영수(姜泳琇) 회장

(전 경남도지사)

 

1977년 정사년

  ◇5월 29일-강춘희 주(駐) 뉴질랜드대사, 비동맹 유엔대책 및 경제협력 협의차 사모아 통가 방문.

 

  ◇10월 20일-강정준(姜正俊), 학교법인 정은학원 설립인가를 받고 이사장에 취임.

 

  ◇11월 11일-이리역 화약운송열차 폭발로 참사 발생.

 

1978년 무오년

  ◇1월 28일-미 CIA, 핵무기 확산 전망서 한국도 핵개발 능력 있다고 지적.

 

  ◇2월-강영훈(姜英勳) 9대 외교안보연구원장에(∼1980.12.)

 

  ◇9월-강신익(姜信翼) 19대 제주도 도지사(∼ 1980. 1.)

 

  ◇12월 12일- 강병규(姜秉奎) 10대 국회의원 당선

 

1979년 기미년

  ○5월 2일-강영수(姜泳琇), 진주강씨 은열공파대종회 2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강희부(姜喜夫) 21회사법시험 합격

  ◇강희철(姜喜哲) 21회사법시험 합격

 

  ◇10월 26일-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의 총격으로 사망.

 

1980년 경신년

  ◇1월 15일 강계술(姜啓述)(法名 昔珠) 초대 중앙승가대학장

 

6월 민주 항쟁

  전두환 정부는 정의 사회의 구현과 복지 사회의 건설을 표방하였으나, 여러 가지 부정과 비리로 말미암아 시민들의 격렬한 비판과 저항을 받게 되었다. 저항에 직면한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였으나, 민주화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시민들은 군부 독재와 비리를 규탄하며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이처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열망은 6월 민주 항쟁으로 승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1987년), 이에 군부 세력이 굴복하여 마침내 6·29 민주화 선언이 이루어졌다.

 

  6·29 민주화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 작업이 추진되어 5년 단임의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새 헌법에 따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서울 올림픽 대회 개최 이후 북방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들과 국교를 수립하는 등 외교 관계를 확대하였다.

 

 

 

 

대법관 강우영(姜友永)

 

1980년 경신년

  ◇강국진(姜國鎭) 한성대학 교수 취임

 

  ◇5월 18일-전남(全南) 광주(光州)에서 대규모 시위 발생.

 

  ◇강창재(姜昌材) 제22회 사시 합격

 

  ◇7월-강인희(姜仁熙) 6대 농수산부 차관에(∼ 1983.10.)

 

  ◇9월 17일-김대중 사형선고.

 

  ◇12월 1일-한국방송공사(KBS), 컬러텔레비전 첫 방영.

 

1981년 신유년

  ◇3월 3일-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임기 7년 단임의 제12대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 제5공화국 출범.

 

 ◇3월 25일-11대 국회의원 당선자

   강기필(姜棋弼)

   강보성(姜普性)

   강원채(姜琓埰)

   강창희(姜昌熙)

 

  ◇4월-강우영(姜友永) 대법관에(∼1986. 4.)

 

  ◇강신호(姜信浩) 동아제약(주)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

  ◇강대성(姜大成) 23회사법시험 합격

  ◇강명훈(姜明勳) 23회사법시험 합격

 

오늘날의 한국

  6월 민주 항쟁 이후 국민들의 민주 역량은 날로 성숙되어 갔으며, 민주화도 점진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제 1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하여 역대 정권의 유산을  청산하고자 하였으며, 금융 실명제를 법제화하고 지방 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또,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활력 있는 경제로 전환시키기 위해 의욕적인 신 경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내외적인 경제 여건의 악화와 외환 부족으로 인해 경제적  위기를겪게 되었다.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우리 나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야 간의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1981년 신유년

  강영훈(姜英勳) 영국대사

 

  ◇7월 1일-경무관 강민창(姜玟昌) 치안국장에(∼82. 1. 5.).

 

  ○10월 26일-호산 강계중(姜桂重) 재일본 한국민단 대판부본부장, 제5대 진주강씨 중앙종회 회장에 뽑히었다.

 

1982년 임술년

  ◇1월-강경식(姜慶植) 재무부 차관(∼1982. 6.)

 

  ◇강항순(姜恒淳) 24회사법시험 합격

  ◇강형구(姜亨求) 5회 군법무관 합격

 

  ◇6월-강경식(姜慶植) 재무부 장관에(∼1983. 10.)  

  

 

강경식(姜慶植)  재무부 장관

 

  김대중 정부는 경제 회생을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이 시급하다고 보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함께  발전시킬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정부 조직의 개편과 금융권 및 대기업의 구조 조정을 추진하였으며,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평양시 전경

 

1982년 임술년

  강신명(姜信明)2> 숭전대학교 총장 취임

 

  ◇11월-강창규(姜昌奎)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강창원 건칠작품특별전' 개최

 

  ○5월 2일-강정준(姜正俊)1>, 진주 강씨 은열공파대종회 3대 회장에 피선.

 

  ◇강성래(姜成來) 25회사법시험 합격

  ◇강종구(姜宗求) 25회사법시험 합격

 

  ◇7월-강영식(姜榮植) 8대 수산청  청장(∼1988.3)

 

  ◇10월-강경식(姜慶植)  대통령 비서실 실장에(∼1985. 1.)

  

 

정은학원 이사장  

강정준(姜正俊) 회장

 

 

[2] 우리의 평화 통일을 위한 노력은?

국제 정세의 변화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후에도 남한과 북한의 무력 대결 상태는 계속되었다. 분단 상황에서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불신하였기 때문이다. 남북 간의 이러한 극단적인 대립 상태는 196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국제 정세는 크게 변화하였다. 미국은 긴장 완화 정책을 추구하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였고, 일본도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정부는 북한에 대해 선의의 경쟁을 제의하였다. 이것은 정부가 그 동안 배양된 국력과 성숙된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남북 관계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결과, 분단 현실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남북한의 대결 상태를 완화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3년

  ○음10월-강석하(姜錫河) 주선으로 갑산재각(甲山齋閣) 일체를 대전종회(大田宗會) 성금으로 보수하였다.

 

  ○11월 29일-제6대 중앙종회 회장으로 강기천(姜起千) 예비역 해군대장을 선임.

 

  ○12월 20일-봉산사 준공식을 거행

 

1984(갑자)년

  ◇강남형(姜南馨) 해태제과(주) 대표이사사장(∼89)

 

  ◇10월-강우영(姜友永) 4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에(- 1986. 4.)

 

  ◇강대승(姜大升) 26회사법시험 합격

  ◇강대성(姜大星) 26회사법시험 합격

  ◇강우식(姜宇植) 26회사법시험 합격

 

  ○음11월-진주강씨 갑산대종회(晉州姜氏 甲山大宗會) 명칭을 진주강씨 어사공파대종회(晉州姜氏 御史公派大宗會)로 개칭

 

 

7·4 남북 공동 성명(1972) 남북한이 자주 통일, 평화 통일, 민족 대단결의 원칙에 합의하였음을 발표하고 있다.

 

강기천(姜起千) 회장

 

 

 

 

 

남북 적십자 회담

  대한 적십자사가 북한에 이산 가족 찾기를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을 제의하자, 북한 적십자사는 이 제의에 동의하였다. 이로 인해 남북 대화의 새 전기가 마련되었고, 이후 남북 적십자 회담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개최되었다.

 

  적십자 회담으로 협상의 길을 연 남북한 당국은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남북한은 자주 통일, 평화 통일, 민족적 대단결의 3대 원칙을 내세웠으며, 통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남북 조절 위원회의 설치에 합의하였다.  

  남북 적십자회담과 남북 조절 위원회는 그 후 몇 차례 더 개최되어, 한반도의 긴장 완화에 상당히 기여하였다.

 

  남북 대화가 진전되자, 정부는 한반도에 두개의 정치 체제가 존재하는 현실에 근거하여  6·23 평화 통일  외교정책을 선언하였다. 이는 남북한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국제 협조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과 함께 국제 기구에 참여하겠다는 것으로, 남북한의 평화 통일을 위한 제의였다.

  평화 통일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남북 대화가 중단됨으로써 실현되지 못했지만, 정부는 이에 단념하지 않고 북한에 상호 불가침 조약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1985(을축)년

  ◇2월 12일-12대 국회의원에 당선자

    강삼재(姜三載)  

    강경식(姜慶植)

     강경식(姜慶植)  

    강창희(姜昌熙)

 

  ◇8월 8일-강병도(姜秉道)  창신 대학  재단이사장 취임

 

  ○음7월-진주강씨 어사공파대종회(晉州姜氏 御史公派大宗會) 명칭을 진주강씨 박사공파대종회(晉州姜氏 博士公派大宗會)로 개칭

 

1986년 병인년

  ○1월 1일-강경식(姜慶植), 진주 강씨 은열공파대종회 4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강병국(姜秉國) 28회사법시험 합격

 

  강봉구(姜鳳求) 한국 석유 공업(주)  대표이사 사장

 

1987년

  ◇강창조(姜昌朝) 29회사법시험 합격

 

  ◇5월-강태홍(姜泰泓) 21대 경남지사에(∼ 1988. 5.)

 

  

                          

                           강봉구(姜鳳求)

한국석유공업(주) 대표이사사장

 

 

북한의 변화

  6·25 전쟁이 끝난 후 김일성은 패전의 책임을 돌리고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시키기 위해 정적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쟁으로 파괴된 산업 시설을 복구하기 위해 천리마 운동을 전개하였다. 천리마 운동은 주민들의 생산 의욕을 고취하여 경제  발전을이룸으로써 공산주의 사회의 물질적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천리마 운동은 단순한 노력  동원만을의미하지 않으며, 사상적인 개조를 통해 주민을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개조한다는 의도가 내포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사상, 기술, 문화의 3대 혁명이 강조되었다. 북한 사회주의의 한 특성이기도 한 사상 혁명의 강조는 김일성 1인 독재체제의 확립에 기여하였으며, 유일 사상 체계의 수립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그 결과, 북한 사회는 김일성 중심적인 체제로 변모하였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굳게 단결할 것을 강조하였고, 모든  주민들은 그와 당의지도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였다.

 

  김일성의 이러한 정책은 김정일에게 이어졌다. 김정일은 1970년대 초에 등장하여 3대 혁명 소조 운동, 선전 선동 운동, 그리고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 를 추진하면서 당내에서 영향력을 확보해 나갔다.

 

 

 

 

 

1988년 무진년

  ◇강근탁(姜根鐸) 주우크라이나 대사

 

  ◇2월 25일-노태우 대통령 당선

 

  ◇4월 26일-13대 국회의원 당선자

    강금식(姜金植)

    강보성(姜普性)

    강삼재(姜三載)  

    강성모(姜聖模)

    강신옥(姜信玉)

    강영훈(姜英勳)

    강재섭(姜在涉)

 

  ◇5월-강현욱(姜賢旭) 24대 전북도지사(∼ 1990. 6.)

 

  ◇9월 17일-제24회 서울 올림픽경기대회 개막(10월 2일까지 16일간)

 

  ◇12월-강영훈(姜英勳), 국무총리에 취임(∼1990)

  ◇12월 13일-강영석(姜榮石)  제주 상공회의소  회장에

 

1989년

  ◇2월 28일-강석규(姜錫圭) 호서대학교 초대총장에

 

 

 

 

강영훈(姜英勳)

국무총리

강영석(姜榮石)

제주상공회의소장

 

 

   그는 1980년대에 들어 당을실질적으로  장악하였으며, 1990년대에들어 와서는 당뿐만 아니라  군을 비롯한 국가 권력 기관에서 김일성의 뒤를 잇는 실권자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은 국방 위원장에 취임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이와 같이 부자간에 권력이 세습된 것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처음 있는 일로서, 북한 사회의 특수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중앙종보 편집 회의 광경 

 

제5차 남북 고위 회담 역사적인 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1989년

  ◇강정면(姜禎勉) 31회사법시험 합격

  ◇강정완(姜丁完) 31회사법시험 합격

  ◇강정혜(姜貞暳) 31회사법시험 합격

 

  ◇6월 30일-북한의 중앙방송, 전대협대표 임수경(林秀卿)이 세계 청년 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했다고 보도.

 

1990년 경오년

  ◇강선영(姜善泳), 19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1992)

 

  강대인(姜大仁) 계명대 사회과학대 학장에

 

  ◇6월-강현욱(姜賢旭) 6대 동력자원부차관(- 1991. 5.)

 

  ◇강성(姜成) 제32회 사법시험 합격

  ◇강성범(姜聲범) 32회사법시험 합격

  ◇강성헌(姜成憲) 32회사법시험 합격

  ◇강현(姜炫) 제32회사법시험 합격

  

  ◇9월 14일-남북 고위급 회담 서울에서

개최.

  ◇9월 30일-소련과 국교 수립.  

 

 

 

 

[3]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의 진행 과정은?

남북 간의 화해와 교류

  1980년대에 이르러 재개된 남북 간의 대화는 부분적인 실효를 거두어, 이산 가족의 상봉과 예술 공연단의 교환 방문이 성사되기도 하였다. 또, 서울에서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린 이래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여러 차례 회담이 개최되었다.

 

  한편, 남북한은 체육 분야에서 탁구와 축구의 단일 팀을 구성하고 국제 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통일 축구 경기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 가입하여(1991년), 국제 사회에 남북한이 동반자 관계라는 것을 널리 인식시켰다.

 

  이와 함께  남북한은 정부 당국 사이의 공식적인 합의를 통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하고,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남북한이 상호 불가침을 선언하고, 화해와 교류·협력으로 신뢰를 증대시키며,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칙을 바탕으로 김영삼 정부는 단계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화해·협력, 남북 연합,  통일  국가의완성으로 민족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3단계 통일 방안을 발표하였다.   

 

1991(신미)년

  ○음3월 12일-마산에서 박사공파대종회 총회를 개최, 갑산 도선영(都先塋) 정화 및 갑산재 중건과 삼선조 사우(祠宇) 건립을 위한 모금 방안을 토의한 결과, 대동보를 편찬하여 그 여자(餘資)로 경영키로 결의함

 

  ◇강봉근(姜鳳根) 33회사법시험 합격

  ◇강명선(姜明善) 33회사법시험 합격

  ◇강희주(姜熙周) 33회사법시험 합격

 

  ◇4월 27일-명지대생 강경대(姜慶大),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사망

 

  ○박사공파대종회(博士公派大宗會) 초대 회장에 강동규(姜銅圭)1> 취임

 

  ○5월-박사공파대종회(博士公派大宗會)에서는 서울 종로에 보청(譜廳)을 개설하고 대동보수보(大同譜修譜) 업무를 착수하였다. 도청(都廳)-강동규(姜銅圭) 부도청-강창회(姜昌會), 강대백(姜大珀), 강신복(姜信福) 편집장-강신홍(姜信洪) 간사-강동숙(姜東琡) 편집전문위원-강대옥(姜大玉), 강대철(姜大哲), 강신양(姜信暘) 등과 각 소파별로 선임된 편집위원 35명으로 구성되었다.

  

 

      

    강동규(姜銅圭)

박사공파대종회 초대 회장

 

  그리고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처하자, 북한 주민을 돕는다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북한에 식량과 비료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남북한 당국 간의 실질적인 관계 개선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1998년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남북 간의 대결 구조를 평화 공존 구조로 전환하여  평화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정책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그리고 남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 협력을  활성화하는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정경 분리원칙을 내세웠다.

  남북한 간의 경제 협력과 교류가 정치적 상황이나 군사적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고 확대 발전되는 것이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에 통일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와 같은 정부의 정책이 결실을  맺어 금강산 관광 사업이 성사될 수 있었다.

 

  2000년 6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역사적인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남북 정상은 우리 민족의 통일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기로 합의하는 6·15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합의를 바탕으로 남북 사이에는 평화의 정착과 활발한 경제 협력이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1991(신미)년

  ◇8월-강영훈(姜英勳), 제18대 대한적십자 총재(∼ 1997. 7.)

 

  ◇12월-강민수(姜敏秀) 30대 공군사관학교장(- 1993.6.12.)

 

  ◇12월 28일 강신화(姜信和) 9대 경남 민선교육감에 취임

 

1992년 임신년

  ◇1월-강성진(姜聲振) 초대 한국증권업협회장(∼1993. 4.)

 

  ◇3월-강현욱(姜賢旭) 7대 농수산부장관 (∼1993. 2 )

 

  ○3월 11일-강근호(姜根鎬), 진주 강씨 은열공파대종회 5대 회장에 피선.

 

  3월 24일-14대 국회의원 당선자

   강삼재(姜三載)

   강경식(姜慶植)

   강부자(姜富子)

   강선영(姜善泳)

   강수림(姜秀淋)

   강신옥(姜信玉)

   강신조(姜信祚)

   강인섭(姜仁燮)

   

 

강현욱(姜賢旭)

농수산부장관

8대 국회의원

강근호(姜根鎬) 회장

 

족보 편찬과 항렬자

  족보를 발간할 때, 호적 이름이 항렬자에 어긋날 때는 문중에서 공식적으로 미리 정해 놓은 항렬자에 의해서 보명(譜名)을 지어 족보에 등재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항렬(行列)이란 같은 혈족 사이에 세계(世系)의 위치를 분명히 하기 위한 문중의 법이며, 항렬자란 혈족의 이름자 중 한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세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돌림자라고도 말한다.

  선조들은 자손의 항렬자와 배합법까지를 미리 정해서 후손들이 그것을 따르도록 하였다.

  항렬자는 가문과 파마다 각기 다르나 대체로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에 의해 항렬자를 정해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항렬자만 보아도 어느 파(派) 몇 세(世)인지를 알 수 있는 독특한 작명 제도로서 오늘날에도 꾸준히 사용되고 있다.

 

 

    

 

 

 

1992년 임신년

  ◇3월 24일-14대 국회의원 당선자

   강재섭(姜在涉)

   강창성(姜昌成)

   강창희(姜昌熙)

   강철선(姜喆善)

   강희찬(姜熹瓚)

 

  ◇강동범(姜東範) 34회사법시험 합격

 

  ◇4월-강상원(姜相遠)  26대 전라 북도  도지사(∼1993. 3.)

 

1993년 계유년

  1월 15일-강두식(姜斗植) 제2대 군산 호원대학총장에 취임

 

  ◇2월 25일, 김영삼, 제14대 대통령 취임.

 

  ◇2월-강대해(姜大海)1> 11대 진주강씨 중앙종회 회장에

 

  ◇3월-강영기(姜英奇) 5대 광주직할시장(∼1994. 9.)

 

  ◇3월-강신태(姜信泰) 철도청 청장에(∼1993. 4.)

 

  ◇9월-강운태(姜雲太) 6대 광주직할시장(∼ 1995. 6.)

 

 

         

  중국과의 수교(1992년)

 

강대해(姜大海) 회장

 

 

 

         

 

 

 

 

XI 정보 사회와 문중

 

 

  

                                         박사공파 5선조 사당 경남 산청  2003년 11월 3일 준공되었다.

  

 

1  21 세기에서의 문중의 역할

 

 

   우리 문중은 예부터 도덕과 예의를 중시하는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것을 잘 지키지 않아 심각한 도덕적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현대 사회에 알맞은 새로운 도덕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상들이 지켜 온 전통 도덕은 물론, 어른을 공경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시향을 올리는 광경

 

  문량공 사우 기도 시흥시

  

    원모재 전북 전주  박사공 9세 별좌공(휘 이성) 재각

  

         중앙회관 서울 종로  1997년 마련했다

 

   족보는 씨족의 행적을 비춰 주는 거울

  기록으로서의 역사, 예를 들어 조선 왕조 실록은 조선 시대의 삶을 비춰 주는 거울이고, 내일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족보는 씨족의 역사로 조상의 행적을 들어다 보면서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확인할 수 있는 거울이다. 정체성이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뿌리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자아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족보는 우리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하고, 우리가 나아갈 바를 제시해 준다.

   족보는 동족의 계통을  기록한  역사로서 이를 통하여 시조로부터 족보 편찬 당시까지의 자신의 계보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족보는 조상을 숭배하고, 가계를 계승하며, 동족의 단결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족보가 등장하였으나, 한 동족, 또는 한 계파 전체를 포함하는 족보는 15 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족보는 1423년(세종 5)에 간행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이며,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족보는 1476년 발간된 안동권씨(安東權氏) 세보로 알려져 있다.

   우리 문중은 1685년 박사공파 을축보 일명 남한보와 1691년에 발간 된 은열공파의 신미보가 그 효시로서 오늘날 족보는 이 족보에 의해 기준을 세우고 있다. 조선 초기 인재공 강희안 형제분들이 진산세고(晉山世稿)를 편찬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족보는 한 성씨의 역사와 가계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기록이므로, 이를 통해 자기 조상의 업적을 기리고, 동족 간의 협동과 상호 부조를 배우며, 나아가 후손들을 교화시키는 구실도 하였다. 그러나 과거의 조상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없던 관직을 가필함으로써  기록으로서의 사료적 가치가 반감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족보 편찬의 배경

  족보는 조선 시대의 동족의 사회적 위세를 표시하는 기록이다. 족보에는 조상의 관직명이 모두 기록되어 있고, 조상이 베푼 선정, 왕으로부터 받은 포상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바로 동족의 사회적 위세는 족보에 기록된 조상의 관직 수와 높이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조상의 행적과 학문의 정도에 따라 대우받았다

    그리고 결혼 상대자를 구하거나 붕당(朋黨)을 구별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리하여 족보의 편찬과 보관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족보는 자신의 뿌리를 한번 확인해 보는 메모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게다가 일정한 한문 지식이 있어야 하며, 찾는 방법도 알아야 하고, 직계 선조의 이름도 알고 있어야  자기의 계보를 찾을 수 있고, 그 계보에서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족보에  대한 관심이 멀어질 수밖에 없고, 이것이 족보가 현대인에게 외면 당하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자아 정체감 상실에 대한 대안(代案)으로 족보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사람들도 있어,  족보를  현대 감각에 맞게 한글을 병행한다든지, CD로 만들어 청소년들이 쉽게 자신의 계보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게 되면, 누구나 쉽게 족보를 접하게 되어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을 바르게 이해하고, 공동체와 문중에 대한 신뢰를 가져 종족에 대한 역사적 사명을 생각하게 되며, 세계화 시대에 맞는 역사적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다.

 

  인류 최초 성(姓), 강씨(姜氏)

  1500여 년 전 이 땅 동국(東國)에 뿌리를 내린 진주강씨의 근원을 찾아가 보면 그 뿌리가 반만년 전 염제(炎帝) 신농(神農)씨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진주강씨의 뿌리가 그만큼 깊고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음을 뜻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염재 신농씨에서 비롯된 강씨(姜氏)는 5200 여 년 동안 노(盧), 여(呂)씨를 비롯한  270여 성씨로 파성(派姓)되어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그러므로 강씨는 성씨의 원류(源流)라 하여 인류 최초의 성이란 수식어가 항상 따라 붙고 있다.

   한반도에서의 강씨 뿌리는 고구려 멸망과 함께 당나라의 요서 지방으로의 강제 이주 정책을 피해 대동강을 건너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일부는 중부 지방으로, 일부는 이 땅 남쪽에 살게 되었다.

   남쪽에 정착한 우리 선조님들은 대부분 은열공과 박사공 후손들로 고려·조선 시대에 많은 명장(名將)과 명 재상(名宰相)을 탄생시켜 나라가 위급할 때 나라를 구했고, 나라가 필요로 하는 동량이 되어 나라의 버팀목 역할을 해 왔다.

  또한 많은 문과(文科) 급제를 배출시켜 동방 대성으로 크게 번성하게 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자부심을 가슴에 안겨 주었다. 

성씨별 문과급제자 20위권

             ( ) 안 숫자는 문중집계

순위

성씨별

문과급제자수

상신

대제학

1

전주 이씨

769(873)

22

7

2

파평 윤씨

4197

 

 

3

안동 권씨

368

 

 

4

남양 홍씨

326

8

2

5

안동 김씨

318

19

6

6

청주 한씨

270(315)

12

1

7

밀양 박씨

250(261)

1

2

8

광산 김씨

248(269)

5

7

9

연안 이씨

236(250)

8

7

10

진주 강씨

232

6

2

11

여흥 민씨

221(225)

7

 

12

경주 김씨

200

6

2

13

동래 정씨

190(198)

17

2

14

한산 이씨

186(195)

4

2

 

청송 심씨

186

15

2

16

광주 이씨

181(188)

5

2

 

풍양 조씨

181

7

4

18

반남 박씨

176(178)

7

2

19

경주 이씨

174(178)

8

3

20

평산 신씨

173

8

2

 

  우리 가문은 대대로 정승 판서를 지낸 명문 가문이다"라고 부모가 자식들에게 자랑하는 것을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본다.

 

  조선시대의 명문가문을 판단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이다. 정승과 판서의 배출 여부, 왕비에 간택된 회수, 과거 합격자 수 등이 이러한 기준에 속한다. 이중에서도 과거 합격자 수는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과거 합격은 곧 관료로의 진출을 의미하며 국가 지도층으로 편입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과거 합격자수를 기록한 가문은 어디일까? 

 

  더 말할 나위도 없이 과거 합격자에는 전주 이씨가 가장 많다. 조선왕조의 뿌리가 전주 이씨이니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전주 이씨 다음 순위를 기록하는 가문들이다. 

 

  어쨌든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먼저 사마방목을 보면 전주이씨(2719명) 다음으로 가장 많은 합격자를 기록한 가문은 파평윤씨(934명), 안동권씨(909명), 남양홍씨(833명), 밀양박씨(755명), 안동김씨(716명) 순이다.  그리고 문과는 사마시를 치른 사람이 응시하여 그 중에서 우수한 자를 다시 걸러내는 것이므로 합격자 수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 결과를 기록한 국조문과방목을 보면 전주이씨(769명) 다음으로 파평윤씨(419명), 안동권씨(368명), 남양홍씨(326명), 안동김씨(318명) 순이다.

  이것을 보면 문과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의 순위와 사마시 합격자 배출 가문의 순위가 거의 일치한다.

 

  문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

  도시조 고구려 강이식 장군이 수나라 1차 침입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이후, 21세기 입초에서 문중의 지난 1400여 년을 상고해 보면 역시 진주 강씨는 학문 분야보다는 국가가 외침으로 위급할 때, 어김없이 선봉장이 되어 나라를 구한 선조님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외침이 있을 때, 방어군 사령관은 무신(武臣)이 아닌 문신(文臣)이 도원수가 되고, 정작 장수들은 좌·우위 장군이 되어 출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려 시대에 거란의 외침을 막은 강감찬, 강민첨 장군 두 분 다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며, 조선조 광해군 때 왕명을 받고 요동으로 출전한 강홍립 장군 또한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다.

 

사대(射臺)|경남 사천 은열공이 무술을 닦을 때 과녁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전쟁의 승패를 무력이 아닌 전략(戰略)이 좌우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략이란 천문, 지리, 심리전을 함께 아울러야 하는 고도의 작전이므로 우직한 무신보다는 많은 경학을 닦고 순리를 깨우친 문신이 더 적임자로 보아 총사령관 격인 도원수를 문신에서 뽑는 것이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이란 말이 있듯이 충성스러운 신하는 늘 국가의 안위에 대적할 능력을 갖춰야 함으로 문신도 경학 못지 않게 무술에도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집안에 사(射) 터가 있고 나라에서는 수시로 문신들에게도 활을 쏘이게 하여 성적이 우수한 신하에게 벼슬을 더 했다.

   조선 시대 초엽 군위공(휘 이경)이 남이 장군의 집에서 활쏘기를 하다가 역모에 연루되어 화를 입은 경우를 보더라도 친지들끼리 무술을 익히면서 친목을 다지는 것은 요즘의 골프를 치면서 친목을 다지는 경우와 같다.

  앞서 은열공 강민첨 장군이 문신이면서 무공(武功)으로 일어난 것은 문무겸전이란 신하의 덕목을 실천한 것이며, 여기에는 우리 강문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이 이것을 실증적으로 이를 뒷받침해 준다. 바로 경남 하동군 옥종면 두방산 중턱에 있는 천연 사대(射臺)이다.

   은열공이 출사하기 전에 여기에서 활쏘기를 하면서 심신을 단련하여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본보기로 후일 국가를 외침에서 구하는데 근간이 되었다. 따라서, 이 사대는 강문에서 가장 오래 된 유적일 뿐만 아니라, 사직을 흔들림없이 떠받친 초석(礎石)이며, 문중의 성지(聖地)를 알려주는 빗돌이다.

 

  강고집과 직업

  사람들은 흔히 진주 강씨들을 고집스럽고 강직하다고 한다.

  사전에는 고집이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만을  내세워 굽히지 아니함, 또는 그러한 성질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고집을 좋게 해석하면 주관이 강하기 때문에 추진력이 있다는 것이며, 나쁘게 말하면 타협의 여지가 없어 현실 적응력이 떨어지고 타인에 굴하고자 하는 기질이 거의 없기 때문에 독선으로 흐르기 쉬워 대인 관계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주 강씨가 고집스럽긴 하지만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 고집스러움의 단점을 어느 정도 보완해 주고 있다. 따지고 보면, 고집스러움에 강직성이 없다면, 고집은 말 그대로 고집일 수밖에 없지만, 강직성이 있으므로 고집스러움이 오히려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진주 강씨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진취적인 면이 많아서, 진주 강씨 집안 딸들이 드세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옛날에는 충신 못지 않게 열녀가 많았다.

  진주 강씨들의 이와 같은 성격이 현대 직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어떤 직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직업이 자기 적성에 맞아야 하고, 집착력이 강해야 한다고 한다.

    고집과 강직성이 요구되는 직종은 법조인, 교수, 의사, 그리고 전문 직업이 여기에  속하는 데, 진주 강씨들은 이 분야에 많이 진출해 있고, 상대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는 많지 않는 것이 우연은 아닌 듯 하다.

 

                           [1]  어려운 현실에서도 꾸준히 발전하는 종사(宗事)

박사공파 대동보 발간

  1991년 종전의 진주강씨 어사공파대종회를 박사공파대종회(博士公派大宗會)로 개칭하고 초대 회장에 강동규(姜銅圭) 일가를 선출하였다.

   같은 해 음력 3월 12일 경남 마산(馬山)에서 진주강씨 박사공파대종회 총회를 개최하여 갑산도선영(甲山都先塋) 정화 및 갑산재(甲山齋) 중건과 삼선조(三先祖) 사우(祠宇) 건립에 필요한 모금 확보 방안을 토의한 결과, 그 방안으로 대동보(大同譜)를 편찬하고 그 여자(餘資)로 문중 숙원 사업을 경영키로 결의하였다.

   이에 강동규 회장이 대동보 발간 기금으로 5000만원을 쾌척하여 5월 서울 종로에 보청(譜廳)*을 개설하고 대동보수보(大同譜修譜) 업무를 착수하였다.

   대동보 발간 사업은 박사공 전 후손의 호응을 얻어 순조롭게 진행되어 당초의 목표를 훨씬 웃도는 결과를  얻어성공리에 마쳤다.

   1993년 4월에는 갑산 도선영 묘역 정화 사업을 시작하여, 수국(首局) 상하로 1세조 박사공(博士公)과  아들 전중내급사공(殿中內給事公)을 시초로 초혼(招魂)하여 성분(成墳)하고 봉단(奉壇)하였다.   

  이어 사손(嗣孫)  어사공(御史公)은 배위(配位) 금성군부인(錦城郡夫人) 나주정씨(羅州鄭氏)와 합봉단(合奉壇)하고, 박사공  장증손(長曾孫)  대장군공(大將軍公)은

 

 

1994(갑술)년

  ◇6월-강석정(姜錫廷) 합천군 군수 당선

  ◇7월 8일-평양방송, 김일성 사망

  ◇7월 19일-김일성 장례식.

  ◇7월 27일-북한 강성산(姜成山) 총리의 사위 강명도씨, 귀순 기자회견서 북한이 핵탄두 5개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

   10월 21일-성수대교 붕괴

 

1995(을해)년

  ◇1월-강운태(姜雲太) 초대 광주광역시 시장(∼1995. 6.)

   ◇1월-강문창(姜文昌) 두산건설(주) 대표이사 부회장에

   ◇강규석(姜奎錫) 강릉대학 총장에

   ○4월-진주강씨 박사공파대종회(晋州姜氏博士公派大宗會)에서 서울 동대문구 용두 2동에 회관을 마련하고 진산회관(晋山會館)이라 현액하였다.

 

 

 

 

 

  

 

강석정(姜錫廷)

합천군 군수

 

단비(壇碑)를 세워 옛터에  초혼(招魂)하여 단을 세우고, 봉산부원군(鳳山府院君) 내외(內外) 쌍영(雙塋)을 보수하였다.

  아울러, 문관석, 장군석, 등석, 상석, 망주석, 계단석, 단비(壇碑)  등과사적비(事蹟碑)를 건립(建立)하였으며, 또 강안(江岸)에  방치된  한문진홀사비(한門搢笏砂碑)를 갑산 동구(洞口)로 이건하여 묘역 정화 사업이 마무리되었다.

  

 묘역 정화 이전의 모습

족보 1995년 발간된 박사공파 대동보

 

1995(을해)년

  ○4월 10일-강경주(姜京周)1>, 진주 강씨 은열공파대종회 6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강용택(姜龍澤) 제39회 행정고시 합격

 

   ◇6월 29일-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7월-강운태(姜雲太) 농림수산부장관(∼1996. 12.)

   ◇12월-강만수(姜萬洙)  관세청 청장(∼ 1996.12.)

 

1996(병자)년

  ◇1월 1일-국민 학교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

 

  ◇1월-강빈(姜彬) 14대 중앙공무원교육원장(∼1998. 3.)

   강철구(姜哲求)  한국석유공업(주)  대표이사사장

 

   ○4월 28일-강사현(姜思賢)1>, 진주 강씨 은열공파대종회 7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강경구(姜倞求) 35회사법시험 합격 

 

  

 

 

강경주(姜京周) 회장

 

 

강운태(姜雲太)

농수산부장관

강사현(姜思賢) 회장

 

 

  11월에는 갑산 도선영에서 전국 각지에서 후손 350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묘역 정화 완공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1993년 12월에는 드디어 전질 31권 짜리 대동보를 완간하여 분질하였다. 이는 문중사에서 일찍이 없던 큰 역사이며 문중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1995년 4월에는 서울 동대문구 용두2동에 회관을 마련하고 1996년 9월에는  부산 갑산회(甲山會)에서 헌납한 갑산 고택지 부지에 본재(本齋) 4칸(四間)과 문루(門樓) 3칸(三間)을 중건하였다. 이로써 3대 문중의 숙원 사업 중 두 가지가 완료되었으며, 나머지 하나인 삼선조 사당 건립은 계속 추진 중에 있다.

 

  진산회관(서울 용두동) 박사공파대종회 회관

 

1996(병자)년

  ◇4월 11일 실시-15대 국회의원 당선자

   강경식(姜慶植)

   강성재(姜聲才)

   강재섭(姜在涉)

   강종희(姜宗熙)

   강창희(姜昌熙)

   강현욱(姜賢旭)

 

  ◇강삼재(姜三載)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중앙선거 대책본부장으로서 국회의원에 당선

 

   ○10월-박사공파대종회(博士公派大宗會) 3대 회장에 강창회(姜昌會) 취임

 

   ◇12월-강만수(姜萬洙)  통상산업부 차관(∼1997. 3)

 

  ◇12월-강현욱(姜賢旭) 3대 환경부장관(∼1997. 8)

 

1997(정축)년

  ◇1월 15일-강우방(姜友邦)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에(∼2000. 9. 1)

 

  ◇3월-강경식(姜慶植) 경제기획원 부총리(∼1997.11)

 

  ◇3월-강운태(姜雲太) 내무부장관(∼1997. 8.)

 

  ◇3월-강만수(姜萬洙)  재정경제원 차관(∼1998. 3)

 

  ◇3월-강정훈(姜晸薰) 조달청장(∼1999. 5)  

설단 고유제 제관

강창회(姜昌會) 회장

 

강삼재(姜三載)

신한국당 선거본부장

 

  

강만수(姜萬洙)

관세청 청장

 

 

 

강정훈(姜晸薰)

조달청장

  

중앙회관 마련

  진주강씨 중앙종회가 수년을 두고 회관 마련에 매진하다가 일본 거주 강대해(姜大海) 일가가 새 회장으로 피선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1997년 회관 마련은 회장과 전주 초포(草浦) 문중에서 회관 마련에 솔선하여 거액을 헌성하여 회관 마련이 가시적 거리에 들어오자, 많은 일가들이 성금을 내어 종로 5가에 번듯한 자체 회관을 마련하게 되었다.

  회관이 마련하기 전까지는 고 강계중(姜桂重) 전 회장 소유의 무교동 광일빌딩에서 수 십 년간 사무실을 무료로 임대 받아 사용했었다.  

 

  

광일빌딩 서울 중구 중앙종회 사무실을

   20여년간 무료로 임대해 주었다.

 

1997(정축)년

  ◇2월 12일-북한 노동당 전 국제담당 비서 황장엽이 북경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에 망명을 요청하고, 필리핀을 통하여 67일 만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황장엽은 주체사상을 만든 인물로 북한 최고위급이어서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강재섭(姜在涉) 신한국당 원내총무(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 변경)

   ◇4월-강원일(姜原一) 3대 국민고충처리위원장(∼1998. 3)

   ◇강창균(姜昌均)> 사법시험 합격

 

   ◇7월-강지원(姜智遠) 초대 청소년보호위원장(∼ 2000. 8)

   ◇7월 1일-18세 미만 청소년에게 술·담배 판매를 금지.

   ◇8월 17일-254명의 승객 및 승무원을 태운 대한항공 KE-801편 여객기가 괌에서 추락하여 229명이 숨졌다.

   ◇9월-강덕기(姜德基)  서울특별시 시장 대행(∼1998. 6)

 

강재섭(姜在涉)

신한국당 원내총무

 

강덕기(姜德基)

서울특별시장 대행

 

영인본 족보 발간으로 인한 갈등

  1997년에 들어서, 박사공파 대종회, 은열공파 대종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62년에 발간된 일명 청주보를 한 지역종회에서 영인하여 장학 기금 모금이란 이름으로 전국 일가들에게 먼저 책을 보내고 나중에 대금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판매함으로써, 문중에 일찍이 보지 못했던 갈등이 일어났다.

   양대 대종회에서 영인본 발간을 반대하는 이유는, 청주보가 소목이라든가 계보가 잘못 이어지는 등 발 간할 때부터 문제가 있는 보책으로  4년 후 다시 보완하여 달성보를  발간하고 청주보를 미필(未必)로 처리한 보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주보는 계보나 사적을 연구하는 데에는 필요하지만, 다량 발행하여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문중 화합을 깨뜨리는  해종 행위이므로 보급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듣지 않고 계속  판매하고 있으며, 더구나 강매를 당한 일가들이대종회에 연락하거나 문중 홈페이지 게시판이나 방문록에 글을 올려, 강압적인 판매를 막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문중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부끄러운 일이 되었으며, 파문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1997(정축)년

  ◇10월-린나이코리아<회장 강성모(姜聖模) 한국능률협회 선정 '97년 한국산업의 고객만족도 1위 기업'

   ◇11월-강신복(姜信福) 진주강씨 통계공파종회 회장에

   ○11월 23일-경덕재를 중건하였다. 추진회장-민창(玟昌), 집행위원장-신복(信福), 간사장-신홍(信洪), 규모-25평, 반지하-47평, 부속사-40평 고액 헌성금-신복(信福) 1억 1000만원, 별좌공파 초포문중<도유사 대석(大錫) 1억원

   ○11월-박사공파대종회(博士公派大宗會) 4대 회장에 강창회(姜昌會) 연임

   ◇12월 3일-IMF와 긴급 자금 지원에 합의.

    ▷18일-제15대 대통령 선거 실시(김대중 당선).

   ◇12월 22일-노태우·전두환 전직 대통령 사면

 

1998년 무인년

  ◇2월 강신경(姜信景)  은행감독원  부원장, 원장 대행

 

 

강성모(姜聖模)  회장

강신복(姜信福)  회장

 

박사공파 삼선조 사당 건립

  1994년 대동보 발간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박사공파 대종회에서는 문중 숙원 사업인 삼선조 즉, 박사공파 파시조, 2세 및 3세의 사당을 진주에 마련할 계획에 착수하여 2000년 6월 11일 진주시 봉산사 좌측 대봉사 경내에서 대봉사 개축(改築)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대봉사가 비좁긴 하지만 우선 대봉사를 전면 보수(補修)하여 박사공파 삼선조 위패를 모시는 사당으로 사용하다가, 증·개축하여 문세(門勢)에 어울리고  위용을 갖춘 사당을 중건할 예정 아래 대봉사 보수공사를 마치고 2001년 4월 2일 삼선조님의 위패 봉안식을  엄숙히 봉행하였다.

    옛날에는 구 봉산사에서 시조님, 은열공 및 어사공의 향사를 올렸으나, 어사공의 향사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올리지 못하다가 이날 대봉사에서 전날 위패 봉안 고유제를 올리고 다음날 삼선조 춘향제를 올림으로써, 삼선조에 대한 후손들의 효경심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1994년 대동보 발간으로 대종회 경제적 자립 기반을 닦은 이래, 숭조 표징인 사당을 복원함으로써 균형 잡힌 종사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봉양사(산청) 박사공, 공목공 위패가 모셔져 있다

 

1998년 무인년

  ◇3월-강창희(姜昌熙) 초대 과기부장관 (-1999. 3)

 

   ○4월 28일-강희두(姜熙斗), 진주 강씨 은열공파대종회 8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은열공파대종회에서는 소식지로 "은열공파대종보를 창간하였다."

 

   ◇강용택(姜龍澤) 제16회 법원 행정고시 합격

   ○9월 19일-강준호(姜俊鎬) 진주강씨통계파 종친회장 별세

   ◇9월-강금중(姜錦中) 미도파 공동법정 관리인

   ◇10월-현대그룹이 추진하는 금강산종합개발사업의 제1단계로 관광선 현대금강호가 역사적인 첫 출항을 하였다.

 

1999(기묘)년

  ◇강병호(姜柄皓) 금융감독원 부원장에

   ◇2월-강광원(姜光遠) 주 루마니아대사관 대사에

 

   ◇2월 19일-강광언(姜光彦) 롯데물산(주) 대표이사 사장  

 

강창희(姜昌熙)

초대 과기부장관

강희두(姜熙斗)

은열공파대종회장

 

 

정보화 시대에서의 종사(宗事)

  1990년대에 들어와 정보화 사회가 정착되면서, 현대의 모든 분야에 컴퓨터가 보급되어 있어서, 그 역할과 중요성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도 다양하게 변하였다.

   1970년 대까지만 해도 문중의 제향이라든가, 유적·유물 관리를 종가와 노령층의 중심으로 종적인 체계로 해왔으나, 민주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성장하여 이들이 문중 일에 참여하면서, 상대적으로 종가의  역할이 축소되고  문중일은 횡적인 구조로 바뀌었다.

   문장(門長)은 종전에는  문중 어른들이 합의하여 추대하였으나, 문중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크게 변하여 문중을 종친회, 종회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친목단체 쯤으로 생각하여 최근에는 표결로 선출하는 곳이 있어 적지 않은 잡음이 일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종사는 20세기를 정점으로 점차 하향 곡선을 그으며,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 상에 문중 홈페이지가 등장하면서 컴퓨터 활용에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습득한 젊은 세대들이 관심을 갖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알려고 게시판 등을 통하여 많은 질의를 하고 있다.  

 

1999(기묘)년

  ◇3월-강기원(姜基遠) 2대 여성특별위원장(- 2000. 5)

   ◇7월 1일-진주강씨 홈페이지 개설

   ◇8월 27일-강민구(姜敏求) 장로 제8대 극동방송 이사장에

  ◇9월 23일-북한 강정모(姜正模)1>가 이종옥 장례식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으로

  ◇11월-강호태(姜鎬胎), 문경공(휘 군보)파종회장에

 

2000(경진)년

  ◇2월 7일-강동연(姜桐連) 한국 방송광고공사  사장

   ◇2월 8일-북한  무역대표단<단장: 무역상 강정모(姜正模), 태국에서 개최되는 유엔무 역개발회의 제10차 대회 참가

   ○2월 일-강태수(姜太秀), 진주 강씨 중앙종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2월 강락원(姜洛遠) 제7대 광주은행 행장에

   ○4월 15일-강동균(姜東均), 진주 강씨 은열공파대종회 9대 회장에 추대되었다. 

 

강동균(姜東均)

은열공파대종회장

강태수(姜太秀)

중앙종회회장

 

 

 이러한 젊은 세대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갖도록 하자면, 그들에게 알맞은 콘텐츠를 계발하는 하는 일이 시급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령층도 정보화·세계화 등 미래 사회의 변화에 대처할  능력을 갖추고 전통 문화를 시대에 맞게 적응시켜 후손들에게 계승시킬 의무가 있다.

   

 

상량식 장면

  

 

재각 건축 장면

 

2000(경진)년

  ◇5월 15일-니카라과 대통령부인 예지원<원장 강영숙(姜映淑) 방문, 우리의 전통의상과 茶문화에 대해 설명, 우리의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5월 17일-강신홍(姜信洪), 박사공파대종회(博士公派大宗會) 제5대 회장에 추대되었고, 강창수(姜昌秀) 전 조달청 국장이 상임부회장에 선임되었다.

   ◇6월 10일-진주강씨 기로원 개원, 회장에 강영희(姜泳熙)

 

   ◇6월-제16대 국회의원 당선자

     강운태(姜雲太)

     강재섭(姜在涉)

     강삼재(姜三載)

     강신성일(姜申星一)

     강인섭(姜仁燮)

     강창희(姜昌熙)

     강현욱(姜賢旭)

     강성구(姜成求)

     강숙자(姜淑子)                                  

    ◇강용택(姜龍澤))  제42회 사법고시 합격(행정고시 2회 합격

    ◇7월 1일-강성환(姜聲煥)  구세군 사령관으로

 

강영희(姜泳熙)

원장

 

 

 

강신홍(姜信洪)

회장

강창수(姜昌秀)

상임부회장

 

 

종사(宗事)에 헌신하는 사람들

  20 세기말부터 불어닥친 정보 사회의 물결이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 들면서, 물질적인 풍요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황금 만능주의적인 경향이 증가하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즉 친족간의 우의와 같은 정신적인 가치보다도 물질적인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만을 소중하게 여기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관계를 등한시하는 경우가 생겼다.

   시대적으로는 여권(女權)이 신장되면서 호주제 폐지 등이 사회의 현안이 되고,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가 점차 빛을 잃고 희미해지면서 종사는 위기를 맞고 있다.

   더구나 전통  도덕을 현대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소홀하게 취급하므로 문중사 또한 동류로 취급당하고 있다.

   다만, 소수의 문중 어른들이 정성을 다 하여 조상의 제향을 받들고, 허물어 진 재각을 손질하면서, 희미해진  비석을 다시 세우면서, 일가간 돈목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종사가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선조의 위업을 기리고자 어려운 경제 여건 아래에서도 거금을 문중에 헌척하여 사당을 짓고, 재각을 세우고, 비석을 다듬어 무너져 가는 문중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과 문중이 있어 다행이다. 

 

2000(경진)년

  ◇7월-강신욱(姜信旭)  대법원 대법관(∼현재)

 

  ◇7월-강철구(姜哲求) 24대 광주고검장(∼)

 

  ◇7월 22일-강복환(姜福煥)  제11대(민선 3대) 충청남도교육청  교육감

 

   ◇8월 1일 강홍섭(姜洪燮) 제2대 강원관광대학 학장에

 

   ◇8월 11일-강길부(姜吉夫) 6대 건설교통부 차관(∼ 2001.4.1)

 

   ◇9월-동원EnC<사장 강병원(姜秉元) 노사협력 우량기업으로 선정되어 경기도로부터 산업평화상을 수상.  

 

   ◇10월 7일-강원일(姜原一) 특별검사로

 

   ◇10월-병중(姜병中) 흥아타이어공업(주) 회장, 제1회 무역진흥대상 국제거래신용대상 수상  

 

  ◇11월-강경석(), 양희공(휘 서)파종회장에

  ◇12월-강의용(姜義勇) 평안남도지사

  ◇12월 강관(姜寬) (주)새한 사장에  

 

군위공 재각(추원재) |경남 함양 

 

강신욱(姜信旭)  

대법원 대법관

 

강병중(姜병中)

흥아타이어공업(주)회장

 

  

  근년에 갑산재 중건, 중앙회관 매입이라든가, 경덕재, 원모재 중건, 박사공 5선조 사당 건립, 군위공 재각 중건, 두방산 개발, 일산 강촌공원비 수립 등은 거액을 헌성한 개인과 문중들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두방재 정화사업|경남 하동

  

 

강촌공원 비 |경기 일산

 

2001(신사)년

  ◇1월-강진구(姜晋求)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 용퇴

   ◇1월 15일-강희성(姜熙成) 제4대 호원대학(湖原大學) 총장 취임  

   ◇2월 14일-강현호(姜炫鎬)  경상북도 소방본부 본부장

   ◇3월 3일-강세호(姜世昊) 한국 소프트 창업자문 사장이 삼성SDS에서 분사하는 유니텔㈜의 초대사장에 선임되었다.

   ◇3월4일-강만길(姜萬吉)  상지 대학교  총장 월간 '민족21' 공동 발행인  

   ◇3월 일-강민창(姜玟昌) 진주강씨 중앙종회 회장에

   ◇3월-강신철(姜信哲)  경남은행장에

   ◇3월 26일-인천국제공항 개항을 책임진 강동석(姜東錫)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은“비상사태를 대비한 각종 예비대책을 마련해놓고 있어 개항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4월-강희복(姜熙復)  법무법인 세종 시장경제연구원 대표 

 

강민창(姜玟昌)

중앙종회장 

강신철(姜信哲)

경남은행장

 

 

박사공파 5선조 사당 건립

  진주 대봉사를 개축하여 박사공파 삼선조 사당을 마련하려던 계획이 일부 후손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대신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 5선조 즉, 박사공파시조, 2세 내급사공, 3세 감찰어사공, 4세 대장군공,  진산부원군의 사당을 창건하였다.

 

   아울러 박사공 5대손 공목공과 아드님 5형제의 사당도 함께 창건되었다. 5선조 사당이 들어서는 남사리는 공목공이 정신택주 진양하씨와 혼인하여 이곳에서 처음 살기 시작하여 아들 5형제를 두었으며, 5형제 모두  경상급(卿相級)현직(顯職)에 올라 이곳 사람들이 5형제들이 크게 현달하였다 하여 5형제가 태어난 곳을 오룡(五龍)골이라 부르고 있는 곳이다.

 

   오룡골은 지리산 정기가 서린 상서로운 터로 예부터 인물과 역사의 고장으로 이름 나 있다. 임금을 빼놓고 왕비를 비롯한 정승,  판서가 태어난 곳이다.

 

   이와 같이, 유서 깊은 이곳에 2200여 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박사공 파시조님을 비롯한 5선조님 사당과 공목공과 아들 5형제의 사당, 재실, 강당, 관리사를 신축하고 400여평의 주차장도 마련되어 박사공파 숭조 성지로서 문중사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001(신사)년

  ○4월-박사공파 대종회(博士公派大宗會)에서는 진주 대봉사(大鳳祠)에 삼선조(三先祖;박사공, 내급사공, 어사공) 위패 봉안 및 춘향제를 봉행하는데, 사당이 너무 협소하여 증·개축하기 위해 대봉사 수호 운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위원장에 강수동(姜秀東)<포천 삼우석재 회장>

 

   ◇5월 30일-한솔케미언스(주)<대표 강석주(姜錫周)가 신약개발부터 출시, 공장설립까지 의약품생산·판매에 필요한 토털 시스템을 구축하고 제약 시장에 진출했다.

 

   ◇6월 11일-강대석(姜大錫)  춘천 지검 차장에

 

   ◇6월 27일-강신원(姜信元)  한미은행  본부장에

 

   ◇9월 11일-강영철(姜英哲)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이 "이번에 발굴한 실리 보고서 등만 가지고 어떤 역사적 사건의 실체가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白凡선생 암살 사건의 배후에 白衣社와 미국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언론이 단정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내린 적이 없다" 하였다.   

 

강수동(姜秀東)

대봉사운영위원장 

강대석(姜大錫)

춘천지검 차장 

 

여성부 신설

  2001년 1월 29일 정부조직법 개편에 따라 여성부가 신설되었다. 여성부 신설은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의 선거공약이었으며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만들어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여성부의 전신으로 여성 정책을 수행해왔다.

 

미국 9.11 테러 당해

  2001년 9월 11일 오전 9시(현지시간)를 전후해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에 각각 1대의 여객기가 잇따라 충돌,화재가 발생했다.

  이 두 건물은 충돌 1시간이 지난 뒤 30여분 간격으로 2차 폭발이 이어지면서 완전히 붕괴됐다.

 

 

 

 

 

2001(신사)년

  ○11월-박사공파대종회(博士公派大宗會) 6대 회장에 강신홍(姜信洪) 연임

 

   ◇11월-강석환(姜錫환) 울트라건설 회장이 울트라 건축박물관을 개관했다.  

 

2002(임오)년

  ◇1월-강권석(姜權錫) 금융감독원  부원장(기획,총괄,보험담당)

 

   ◇1월 4일-강명구(姜明求) 현대택배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내정

 

   ◇2월 21일-강정호(姜玎鎬)  한국선물거래소 제3대 이사장 취임

 

   ◇3월-강병중(姜병中) 흥아타이어(주) 회장, 문화방송(주) 회장에 취임

 

   ◇3월 14일-강석인(姜錫寅)  한국신용정보(주) 대표이사에 내정

 

   ◇3월 27일-순천 청암대학<학장 강길태(姜吉泰)은 최근 GIS업계 및 교육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 GIS 사이버 교 육대학(www. gis365. com)을 오픈식을 열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강석환(姜錫환) 회장 

강길태(姜吉泰) 학장 

 

 월드컵 공동 개최와 4강진출

    우리나라는 월드컵에서 유럽의 강호들을 연파하고 4강 진입이라는 신화를 이룩하였다. 불과 1년6개월만에 이렇게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 원동력은 무엇보다 자질있는 외국인 감독의 영입에 있다. 선수선발 및 팀 운용이 장기계획 아래 보다 독립적으로 운용됐고 유럽축구에 대한 전술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약점인 체력을 보강해 한국식 압박축구가 성공적으로 구사됐다.

 

 

2002(임오)년

  ◇4월-강영주(姜永周) 한국 증권거래소 이사장에

   ◇4월-강신호(姜信浩) 동아제약(주) 회장,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수상

   ◇4월-강수환(姜洙桓) 은열공파대종회 회장에 피선

   ◇4월 25일 전경련회관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로 '기업구조조정과 통합도산법 제정과제 세미나'를 열고 전현희 대외법률연구소 변호사의 주제발표에 이어 강선명(姜宣明)서울지법 판사, 김석중 전경련 상무 등이 토론하였다.

   ◇5월-강동석(姜東錫) 한국전력공사 사장에

   ○6월 11일-경남 진주시 봉산사 좌측 대봉사 경내에서 대봉사 개축(改築)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6월 13일-지방자치단체장 및 의원 선거 당선자

   강근호(姜根鎬) 군산시장에 재선

   강현욱(姜賢旭) 30대 전북지사

   강현석(姜賢錫)  경기도 고양시장

   강상주(姜相周) 제주도 서귀포시장  

 

 

강신호(姜信浩) 회장

강수환(姜洙桓)회장

 

서해교전

  6월 29일 서해교전에서 북한 경비정에 타고 있던 북한군 30여명이 죽거나 다친 것으로 보인다고 군 당국이 30일 밝혔다.

  국방부는 이와 함께 이번 서해교전에서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에 대해 교전규칙(ROE)에 따라 `경고방송→경고사격→위협사격→격파사격'의 순서를 밟다가 기습적인 선제공격을 받아 인명피해가 컸다고 보고 교전규칙을 재정비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2002(임오)년

  ◇6월 25일-박사공파대종회에서는 문중 교양지인 "진산회보"를 창간하였다. <편집위원장 강대경(姜大敬)>

 

   ◇7월 15일-삼성 전기<대표 이사 강호문(姜皓文)가 세계 1등 품질구축을 위한 본격적인 시스템 가동에 돌입했다.

www.sem.samsung.co.kr

 

   ◇7월 19일-강신육(姜信六) 16대 병무청장(∼2003.3.3)

 

   ◇8월 29일-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姜東敏)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내었다. <주간동아 2002년 8월 29 일자>

 

   9월 1일 강영희(姜英姬)  충청북도 충주시교육청  교육장에  

 

 

  

 사고전서(四庫全書)’란 중국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총서로, 선진(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만9000여권. 연인원 3000여 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제 14회 아시안 게임 

 

  2002년 9월 29일부터 10월 14일까지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린 대회이다. 44개국에서 참가하였고 38개 종목에서 6,700명의 선수가 출전하였다.

 

  이 대회는 조선민주공화국과 아프가니스탄이 참가하여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 전 회원국이 참가한 첫 대회이다. 남한에서 열린 대회임에도 북한이 참가하였고 탈레반 정권이 붕괴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이 대회에 복귀한 첫 대회였다.

 

북한, 고농축 우라늄을 핵무기 개발 계획

  10월 4일 북한은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비밀 핵무기 개발 계획을 시인했다.

 

부산 아시안 게임 성화 점화 광경

 

2002(임오)년

  9월 5일-서울시장 직무대리를 지낸 강덕기(姜德基) 21세기 도시정책 개발원장이 최근 자신의 공직 경험을 토대로 "메트로폴리탄 서울-도시경영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펴냈다.

  9월 5일-강신원(姜信源) 전국국립자연과학대학장 협의회장은 부산 국제문화센터 강당에서 ‘지방대학 이공계 육성방안’이란 주제로 심포지엄을 가졌다.

   ◇10월 8일-천주교 제주교구장에 강우일(姜禹一) 주교가 임명됐다.

  10월 22일-노동당 산하 3대 공작부서 중 하나인 대외연락부가 올해 해체됐으며, 강주일(姜周一) 대외연락부장도 재일총련에 대한 지령과 관련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경질됐다고 전했다.

   11월-강원구(姜元求) 진주 강씨 통계공파종회 회장에

   12월 4일-감정평가 및 컨설팅 등 부동산서비스 전문 정부출자기관인 한국감정원<원장 강석천(姜錫天) http://www. kab. co. kr>이 지리 정보 기반 고객 관계 관리(gCRM)솔루션 업체인 타스테크(대표 민성기)와 업무제휴를 맺고 아파트고객관리사업에 나섰다. 

 

   

        강보원(姜保遠)

       문량공파종회장

강원구(姜元求)

통계공파종회장

 

  대구 지하철 참사

 

  2003년 2.18 18일 오전 9시 55분께 대구시 중구 남일동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구내에서 진천을 떠나 안심 방향으로 운행중인 1079호 전동차(기관사 최정환) 6량중 3호차를 타고 가던 김모(56.대구시 서구 내당동)씨가 인화물질이 든 10ℓ크기의흰색 플라스틱 입구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불길이 전동차 지붕으로 번지면서 화재가 발생했다.

 

   사망자가 130여명을 넘고 140여명이 부상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2003년

  ◇1월-강문석(姜文錫) 동아제약(주) 대표이사 사장

   ◇1월 22일-박사공파 남사 사우 상량식

  ◇2월-강완구(姜完求) 32대 대구 고법원장

   ◇2월-강철구(姜哲求) 7대 특허법원장

   ◇2월-강준묵(姜準默)  충남대학교 공과대 학장 겸 산업대학원 원장

   ◇2월-통정공파종회 창립 총회에서 강보원(姜保遠) 문량공파종회 회장을 회장으로 선출했다.

   ◇2월 27일-한국국제정치학회<회장 강태훈(姜太勳)가 서울 외교안보연구원에서 공동 주최한  `신정부  대북. 대미 정책 과제와 방향' 주제의 학술회의에서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북핵문제, 한미관계 정립 등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3월 3일-강윤구(姜允求) 보건복지부  차관

   ◇3월 8일-강이수(姜二秀) 숭실대학교  부총장

  ◇3월 9일-강철규(姜哲圭) 12대 공정거래위원장

   ◇5월 29일-강기원(姜基遠) 여성경영자총연합회 제6대 회장 선임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

 

 2월 25일 오전 11시부터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이 여의동 국회 의사당에서 내외 귀빈 일반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2시간 여동안 거행되었다. 취임식사를 통해 참여 정부의 국정 목표와 극정 원리를 밝히고 동북아시대의 평회공동체 및 남북간 평화 번영 정책 추진에 국민과 장치권이 초당적으로 혀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로또 열풍

   2월 25일 로또 복권이 처음 발행되면서 사회에 ‘대박’이란 유행어를 만들어 내면서 사람들에게 1등 당첨에 대한 허황된 꿈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2월 27일 취임 4주년을 계기로 한국인터넷신문협회 소속 인터넷 매체들과 회견을 갖고, 북핵과 남북정상회담 개최, 부동산 등 현안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회견에서 개헌 문제가 공론화되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하는 등 직설적으로 나름의 소회를 밝혔다.

 

 2003년

  ◇5월 31일-박사공파 남사사우 창건 헌성금 8억 3천 2백만원이 신립되었다. 5천만원 이상 헌성한 문중과 후손은 다음과 같다.

 

   ◇문중

  문량공(휘 희맹)파종회 130,000,000원<회장 강대봉(姜大奉)>

  별좌공(휘 이성)파종회  200,000,000원<회장 강남형(姜南馨)>

  충렬공(휘 수남)파종회   53,000,000원<회장 강신연(姜信鉛)>

 

   ◇헌성한 후손

  강창회(姜昌會)>    50,000,000원

  강보희(姜輔熙)>  110,000,000원

  강수동(姜秀東)   110,000,000원 

 

2003년

  ◇5월 29일-92년에 설립된 소망화장품<대표 강석창(姜錫昌)은 '꽃을 든 남자' 단일 브랜드로 출발, 창업 10년여만에 직원 300여명, 700억원 대의 매출을 거뒀다. 홈 주소 www.somangcos.co.kr><서울경제>

   ◇6월-강원룡(姜元龍) 회고록 〈역사의 언덕에서〉가 다섯 권으로 나왔다.

   ◇6월 26일-강현송(姜顯松)  화진 화장품  회장(한국화장품 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강원대에서 신 경영기법 도입과 여성능력 향상, 장학재단 설립 등 각종 공익사업과 관련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대봉(姜大奉)

문량공파종회장

강보희(姜輔熙)

통계공파종회 상임부회장

 

 

  

강철규(姜哲圭)

공정거래위원장

                                                                              

                               문량공(文良公)은 1424년에 태어나 문과에 장원하고 1482년 좌찬성을 지내고 1482년 별세  한 후 문량이란

                                       시호를 받았다. 문량공파종회는 199*년에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자체 회관을 마련하였다.

                                충렬공(忠烈公)은 1552년 태어나 문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 순국하여 1709년 충렬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라크 전쟁 발발

  3월 20일 미국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침공하면서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 일어났다.

 

부시 개전(開戰) 성명

"이번 전쟁 적당히 끝내지 않을것"

지 W 부시 대통령은 19일 밤 10시15분(미국 동부 시각) 전 세계로 생중계된 가운데 백악관 집무실에서 “지금 이 순간 미군과 연합군은 이라크에 대한 무장 해제와 세계를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군 작전에 돌입했다”며 개전(開戰) 성명을 발표했다.

자신의 정치 생애 중 가장 고독한 결단이 될 이번 개전을 공표하는 부시 대통령의 얼굴에는 취임 후 최대의 비장함과 긴박감이 흘렀다. 부시 대통령의 뒤에는 쌍둥이 딸들 사진이 놓여졌다. 부시 대통령은 이에 앞서 백악관에서 부인 로라 여사와 함께 둘만의 조용한 식사를 마쳤다.

부시 대통령은 4분여간의 연설에서 “후세인은 여자와 어린이 등 민간인들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는 등 마지막 잔학행위를 하고 있다”며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훌륭한 문명과 종교적 신념을 지닌 이라크 국민을 존경하며, 위협을 제거해 이라크를 이라크 국민에게 되돌려 주는 것 외에 다른 야망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전쟁이 “예상보다 어렵고 길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도 “일단 시작된 이상 단호한 공격만이 있을 뿐이며 단언컨대 이번 전쟁을 적당히 끝내지 않을 것이며 승리 외의 다른 결과는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2003년

  ◇6월 30일-강만생(姜萬生) 한라일보  대표이사 사장

  ◇7월 14일-강영중(姜榮中)  대교그룹 회장 제26대 대한배드민턴협회 회장에

  ◇8월 27일-강한승(姜翰承) 청주지법 판사

  강형민(姜亨旻·여) 대전지검 공안부 검사

  ◇강영우(姜永祐)  미국백악관 직속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방한  

 

2003년

  ◇8월 일-오리엔트<www.orient.co.kr 대표 강춘근(姜春根)이 44년 간의 기술력과 디자인 파워를 총 집대성해 9번째 갤럭시 테마브랜드 '파라오'를 선보였다.

 

   ◇8월 28일-북한은 6자 회담 기조연설에서 지난해 10월초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방북 직후 "강석주(姜錫柱)1>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방북 미국대표단에 고농축 우라늄핵개발 계획을 시인했다"고 밝혔던 것과 관련, 이를 전면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11월 2일-박사공파대종회에서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오룡골에서 5선조 및 공목공과 아들 5형제의 사당 준공식을 올렸다.

  ◇12월 24일-제45회 사법시험, 군법무관시험 최종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강명숙, 강길, 강 건, 강헌석, 강동극, 강계환, 강정영, 강동욱, 강창두, 강호준, 강영우, 강윤희, 강동희, 강지웅, 강우준, 강효원, 강효인, 강현정 

 

강석창(姜錫昌)

소망화장품  회장 

강원룡(姜元龍) 목사

 

 

 

 강영중(姜榮中) 회장

 

강현송(姜顯松)

화진화장품  회장

 

[후세인 연설] "범죄자 꼬마 부시가 비겁한 공격"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미군의 바그다드 공습이 개시된 3시간쯤 뒤인 20일 오전 국영 TV에 나와 “‘범죄자 꼬마(little)’ 부시가 비겁한 공격을 감행했다”고 비난하며 “이라크 국민은 영광을 찾을 것이고, 비열한 이교도 적들은 격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타는 바그다드

 

목 떨어진  후세인 동상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심판

   2004년 3월 12일 국회가 국법질서 문란, 권력형 부정부패, 국정파탄 등을 이유로 탄핵소추를 의결하여 개시된 노무형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사건은 같은 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의 기각결정으로 막을 내렸다.

 

  2004년

  ◇4월 15일-17대 총선에서 강문의 후손 6명(지역구 4 비례대표 2명)이 국회의원 당선되었다.

   강재섭(姜在涉) 56세   대구 서구

   강길부(姜吉夫) 61세  울산 울주

   강기정(姜琪正) 39세  광주 북구 갑

   강창일(姜昌一) 52세  제주 북제주 갑

   강혜숙(姜惠叔) 56세  비례대표

   강기갑(姜其甲) 51세  비례대표

 

   ◇7월- 중앙종회 제16대 회장에 화진화장품 회장인 강현송(姜顯松) 일가를 선출, 제2차 운영위원회에서 무기명 비밀투표로

 ◇8월24일 - 제16대 중앙종회장 직무집행정지가처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기각  
  서울  거주 강병진(姜秉珍) 현종이 2004년 7월 2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제50민사부 사건번호:2004카합2261)에 신청한 회장 직무정지가처분 결정이 이날 서울중앙지방법원 제50민사부 재판장 이태운 판사에 의해 이유없다는 판결로 기각되였다.

 

  10월 30일-전 진주강씨참판공(휘 안복)파 강희설(姜熙卨)종회장이 진주강씨참판공(휘 안복)파종회 종사백서를 발간하였다. 집필자는 강한신, 강석성, 강중석, 강문수.

  이 백서는 강희설 전 회장이 임기중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술한 것인데,  박사공파대종회, 중앙종회, 중앙종회 홈페이지 문제도 기술하여 적잖은 파문이 일었다.

 

 

강석주(姜錫柱)

 

                                         1> 박사공 27세로, 박사공 9세 군위공(휘 이경) 후손이다.

 

   헌법재판소는 이 사건을 통해 “대통령에 대한 탄핵제도는 누구든지 법 아래에 있고, 아무리 강한 국가권력의 소유자라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법의 지배 내지 법치국가원리를 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했다.

 

경부고속철도 일부 구간 개통

  12년의공사 끝에 경부고속철도 일부 구간이 2004년 3월 31일 개통되었다.  

   경부고속철도로는 기존 경부선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260분이 걸렸던 것에 비해 160분이면 부산에 도착할 수 있다. 더욱이 2010년에는 대전, 대구 시내구간을 제외한 전구간(全區間)을 고속화하여, 서울-부산간을 130분에 주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실 내부

 

2004년

 

   ◇11월 13일-박사공파 대종회에서는 경남 합천 갑산 재실에서 2004년 정기총회를 열고 이날 신임회장으로 강수동(姜秀東) 상임고문을 선출하였다. 

 

   ◇11월 14일-불교 조계종 총무원장과 원로의원을 역임한 조계종 명예 원로의원 석주(昔珠. 봉은사. 칠보사 조실) 스님께서 새벽4시 충남 아산시 보문사에서 96세(법랍 法臘 81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하셨다.

 

 2005년

  1월 19일-진주강씨판서공파는 종사백서 문제로 강원구(姜元求) 참판공종회장을 입석시킨 가운데 긴급 이사회를 열어 종사백서 전량 회수 등을 참판공파종회에 요구하였고, 박사공파대종회에서 진산회보가 발행되면 여기에 자세한 해명을 하기로 했다.

 

    ◇4월 24일-순천 대학교 대운동장에서 강현송 진주강씨 중앙종회장을 비롯한 내외 귀빈과 전국 8도의 시군 선수단 수백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9회 진주강씨 전국 체육 대회가 성대히 개최되었다.

 

 

 

 

 

 

 

 입적한 석주스님

 

  

 

중국의 고구려의 역사 왜곡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킬려고 하는 의도를 서서히 들어내고 있다. 우리남북한이 통일되고 나면 중국과 국경을 마주해야 되는데 그때가면 옛날 고구려땅이 우리것이라는 우리 한국측의 주장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저의가 깔려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로서 중국 동북 변경지방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일련의 연구 작업을 뜻한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 계획의 이 프로젝트는 중국 사회과학원 소속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주관이 되어 추진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동북지역 및 한반도와 관련된 각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2006년

   ◇7월 10일-  강신욱 대법관의 퇴임식이 대법원 대강당에서 열렸다.

 

  ◇7월 11일-강재섭(姜在涉) 의원이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강창희 현종이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강신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모교인 독일프라이 부르크대에서 원로 자문위원 격인 '명예세너터(Sena tor)'로 추대된다.

 

 2007년

    ◇1월 9일-박사공파대종회장 이취임식 거행, 강수동회장 후임으로 현중앙종회장인 강현송회장이 취임하였다.

 

   ◇2월 4일-공목공파종중 창립 발기인 준비 간담회

  참석자 명단 용성(龍聲), 영철(永喆), 희균(熙均), 대희(大熙), 신문(信文), 신준(信俊), 신학(信學), 석조(錫潮), 석명(錫明), 호흔(鎬欣), 현준(顯俊), 경묵(炅默), 신규(信奎), 병철(秉哲)

 

 

 

 

 

  



 

            2   강씨들의 분야별 활약상

 

  

                                                               각계 각층에서 모인 후손들  

 

   조선 시대에 230여 명의 문과 급제자와 620 여 명의 사마시 입격자를 배출시키는 등 많은 인재가 나라의 동량으로 각 분야에서 활약하여 나라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많은 독립 투사가 국권 회복에 헌신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도 많은 인물들이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