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원석(元錫)

 

 宇奎(우규)<소 26세/>

 1855∼1920 독립운동가. 자는 찬구(燦九), 호는 왈우(曰愚). 평남 덕천(德川) 출신.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나 집에서 자라면서 얼마동안 서당에서 공부하였다. 1884년(고종 21) 함남 홍원(洪原) 용원면에 이주하여 한약방을 열었으며 또 장로교 신자가 되고, 1917년에 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이 가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노인단  길림성지부장(新韓村老人團吉林省支部長)이 되어 조직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해 5월 노인단원 이발(李撥)·정치윤(鄭致允) 등 5명의 대표단이 서울에 들어와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히자, 이에 분개한 나머지 노인단 대표로서 국내에 잠입하여 일본총독 등 요인암살을 결심하였다. 9월 2일 총독 사이토(齋藤實)가 부임차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하여 마차에 오를 때, 그를 격살하고자 품에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신문기자·수행원·일본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사상자 중에는 총독부 정무총감과 만철이사(滿鐵理事), 미국 뉴욕시장의 딸 등이 포함되었다. 이 거사에서 총독 사이토는 화를 입지 않았다. 거사 뒤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 나와서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장익규(張翊奎)·임승화(林昇華) 등의 집을 숨어 다니다가, 9월 17일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혔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순국 직전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는 사세시(辭世詩)를 남겼다. 1962년 3월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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