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명

박사공 9세 청풍공(휘 혜) 산소

사적명

우모재(청풍공 재실)

소재지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소재지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교통편

교통편

아버지

 安壽(안수) 소윤 증 호조참판

 형-徽(휘),

 (혜)<박사공 9세/1-146><통계공파> 청풍공(淸風公)

  1424∼1485 자는 망지(望之). 재능직(齋陵直)을 첫 관직으로 직장(直長), 주부(主簿), 감찰(監察), 현감,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468년(세조 14) 청풍군수(淸風郡守)로 부임하여 1472년(성종 3) 겨울 사임하였다.

배위

영인 전주 崔氏(최씨) 1489년 별세했다. 아버지는 좌찬성 경절공 사강(士康), 조부는 우찬성 평도공 유경(有慶), 증조부는 대제학 완산부원군 문정공 재(宰), 외조부는 판사 양성 이충지(李忠지), 묘는 고양시 무고리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부군의 묘역에 단을 세웠다.  

경남 의령군 용덕면 정곡촌 간동 경좌(庚坐) 사가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묘갈명이 있으며 석상, 주석이 있다. 재각 寓慕齋(우모재)가 있다.   

아들

孝貞(효정)◇사헌부 감찰 

사위

蓬城正 恒(봉성정 항) 아버지는 의성군 채(寀), 아들 제부정 연(硯), 흥령부정 작(작), 당성부정 번(磻), 사위 교리 이상(李王常)

칠정려각(七旌閭閣)

 

  의령군 의령읍(宜寧邑) 동동 1134의 3번지, 지금의 의령종합고등학교 동편 담장옆 도로변에는 진양강씨(晉陽姜氏) 일문의 칠정려각(七旌閭閣) 6동(棟)이 가지런히 서 있다.  이 정려각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진양강씨(晉陽姜氏) 문중이 낳은 일곱분의 충(忠) 효(孝) 열(烈) 삼강(三綱)을 기리기 위한 정려각(旌閭閣)이니 일명 삼강문(三綱門)으로도 불리워져 왔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충절(忠節)과 효열(孝烈)을 일러 삼강(三綱)이라 하고 나라에서는 이를 실천한 사람을 정려(旌閭)하여 후세의 영원한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으니, 진양강씨(晉陽姜氏) 일문의 칠정려(七旌閭)는 우리고장 의령의 영원한 귀감이요 자랑이다.

  이 정려각(旌閭閣)은 오랜 풍우에 더러는 허물어지고 파손되었으나 문중에서 틈틈히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고 1972년에는 새로 내부수리를 말끔히 하여 보존하여 온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정려(旌閭)는 1495년(燕山君 1년)에 태어나 천출(天出)의 효도로 정려된 모암공(慕菴公) 강우(姜瑀)의 정려이니 1744년(英祖20년)에 건립된 맛배 목조 와가이다.  그의 자(字)는 백규(伯圭), 호(號)는 모암(慕菴)이니 충순위(忠順衛) 세응(世應)의 아들이다.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태종(太宗)의 손(孫) 의천군(義泉君)의 따님이다. 19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올랐으며 특히 경사(經史)에 밝아서 사방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또 천성이 효도하여 모친의 병환에 지성으로 간병하고 당상에 몹시 애통하여 신병을 얻으니 시묘(侍墓) 3년을 마치는 대상일(大祥日)에 급기야 본인도 생을 마쳤다. 1744년(英祖20년) 정려(旌閭)를 내리고 1847년(憲宗13년) 충효사(忠孝祠)에 배향(配享)하였다.

  충열공(忠烈公) 강수남(姜壽男)은 효행으로 정려(旌閭)된 강서(姜瑞)의 아들이다. 그는 1552년(明宗7년)에 태어나 일찌기 벼슬에 올라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있던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삭령(朔寧)싸움에서 순절(殉節)한 분이니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려(旌閭)되었다.

  참의공(參議公) 강기룡(姜起龍)장군 또한 내 고장이 낳은 충절(忠節) 가운데 한 분이다. 그의 초명(初名)은 기룡(起龍)이요, 자(字)는 응문(應文) 호는 동호(東湖)이니 직장(直長) 강복남(姜福男)의 아들이다.

  그의 형 강언룡(姜彦龍)은 망우당(忘憂堂)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운 임란(壬亂) 17의병장(義兵將) 가운데 한분이다. 임진왜란에 그의 형은 망우당(忘憂堂)의 휘하에서 싸웠으나 뒤에 진주성(晋州城)에서 삼절사(三節士) 최경회(崔慶會)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끝까지 성을 지키다가 역시 촉석루(矗石樓)에서 순절하였다.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61년 (哲宗12년) 정려(旌閭)를 내리고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추증하니 이 정려(旌閭) 또한 이곳에 있다.

  열부(烈婦)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정려(旌閭)도 이곳에 있으니 이 정려는 1882년 (高宗19년)에 건립한 맛배 지붕이다. 열부허씨(烈婦許氏)는 강시주(姜時周)의 처이니, 시주(時周) 형제가 부친을 가해(加害)한 불한당을 쫓다가 살인죄를 쓰고 감영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여기서 아우는 죽고 남편 시주(時周)만 남아서 모진 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열부허씨는 열손가락을 깨물고 혈서로서 남편의 신원(伸寃)을 호소하였으나 소득이 없고 남편의 죄는 죽음을 면할 방도가 없었다. 이에 열부허씨(烈婦許氏)는 다시 혈서 한장을 남기고 자진(自盡)하니 그 혈서에 써있기를. 남편을 대신해서 먼저 죽는 바 내죽은 시체는 장사도 하지 말고 동문 밖에 내어서 옥사(獄事)의 종말을 보게 해 달라」는 간곡한 사연이였다. 이 말을 듣고 세인들은 모두 만고에 없는 열행(烈行)이라 감복하니 나라에서 1882년에 정려(旌閭)를 내렸다.

  수재공(修齋公) 강재중(姜在重)과 그의 처 함안조씨(咸安趙氏)의 쌍효(雙孝)를 기리는 정려(旌閭) 또한 이곳에 있다. 수재공(修齋公)은 모암(慕庵)의 9代손으로 자(子)는 거보(擧甫)이니 수재(修齋)는 그의 호(號)다. 1797년(正祖21년)에 태어나 천성이 효도했으며 그의 처 함안조씨(咸安趙氏) 또한 숙행 (淑行)으로 세인의 많은 칭송을 받았으니 고방에 있는 음식을 쥐도 더럽히지 않았고 썩는 일도 없었다 한다. 부친이 오랫동안 설사병으로 고생을 할 때 일일이 대변 맛을 보아가며 병의 경중을 가렸고 80세가 넘은 모친이 종기로 고행할 때는 부부가 번갈아서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었다. 또 부친이 꿩고기를 원하니 저절로 꿩 한 마리가 주방으로 날아들었으며, 한 겨울에 밭에서 자라를 잡아와서 부친이 원하는 자라고기를 해드리는 기적을 낳았다. 또 겨울철의 가뭄에 물이 말랐으나 조씨 부인이 우물가에서 지성으로 빌었더니 문득 우물이 솟아났으므로 사람들이 효도샘(孝道泉)이라 불렀다. 이와 같은 수재공(修齋公) 부부의 효행이 알려져 1845년(高宗11년)에 쌍효(雙孝)의 정려(旌閭)를 내렸다.

  이상 강씨일문(姜氏一門) 일곱분 6동(棟)의 동국삼강(東國三綱) 정려(旌閭)는 우리 고장의 자랑이요 천추에 빛나는 귀감이 될 것이다. 한편 이 칠정려각(七旌閭閣)은 지방기념(地方記念物) 제35호(1977.12.28)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