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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胤祖(윤조)◇통훈대부 성현도 찰방 |
동생-恪 증 이조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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恰(흡)◇<박사공 14세/23-178><판서공(휘 이행)…통계공파> 태백오현 1602∼1671. 자는 정오(正吾), 호는 잠은(潛隱). 어려서 신흠(申欽)에게 수학(修學), 서울에 살았다. 부모님 생전인 1630년(인조 8) 사마시(司馬試) 식년(式年) 생원(生員) 3등에 입격했다. 성균관(成均館) 유생으로서 1635년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것을 소청(疏請)했다.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 시직(侍直), 부수(副率 을 역임하고, 효행(孝行)으로 남구만(南九萬)의 천거를 받아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 이어 산음현감(山陰縣監)에 전직했다.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항복으로 끝나자 심장세(沈長世)과 함께 태백산(太白山)의 춘양동(春陽洞)에 은거하여 절개를 지켰으므로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불리웠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 시호는 정민(貞敏). 1858년(철종 9) 1월 20일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영남 유생(嶺南儒生) 이병우(李秉瑀) 등이 증(贈) 이조 참판(吏曹參判) 심장세(沈長世), 증 이조 참의(吏曹參議) 정양(鄭瀁)·강흡(姜恰), 증 이조 참판(吏曹參判) 홍석(洪錫)에게 모두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恩典)의 시행을 소청(疏請)하였으니, 이 네 신하는 증 이조 참판(吏曹參判) 개절공(介節公) 신(臣) 홍우정(洪宇定)과 함께 세상에서 태백 오현(太白五賢)으로 칭송하는 인물들입니다. 천지(天地)가 어두운 시절을 만나서 나아가 행(行)하여 드러나거나 초야(草野)에 물러가 은둔(隱遁)하는 차이가 없지는 않았으나, 어진이가 험난한 세상을 만나 처신(處身)하는 도리를 강구하면서 자신을 가다듬은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홍우정(洪宇定)에게는 이미 증직(贈職)을 가(加)하여 시호(諡號)를 내렸는데, 이 네 신하는 일체의 시은(施恩)을 입지 못하였으니, 특별히 청한 바를 윤허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왕조실록 48집 624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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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 |
증 정부인 청송 沈氏(심씨) 1599년 2월 22일∼1632년 8월 1일, 아버지는 감역 증 영의정 설(설), 조부는 증 찬성 宗침(종침), 증조부는 감찰. 증 이조판서 錦晩(금만). 외조부는 청원도정 侃(간). 묘는 봉화군 법전면 법전 마을 뒤 임좌. 현손 관찰사 潤(윤)이 표음기를 짓고 현손 판서 游(유)가 글씨를 썼다. 석물이 있고 정유년에 고쳐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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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정부인 공주 李氏(이씨) 11월 21일 별세, 2남을 키웠다. 아버지는 감찰 珠(주), 외조부는 전주 李在明(이재명), 법전면 척곡리 달전 유좌. 석물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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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
파주시 금촌읍 야동 기좌, 조카 첨추 찬(찬)이 가장을, 종손자 현감 再恒(재항)이 가장을, 도암(陶菴)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가 묘갈명을 지었다. 임술년 묘비를 고쳐 세웠다. 판서 尹用求(윤용구)가 앞쪽을, 후손 禧元(희원)이 음기를 지었다. 문집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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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
호(호) 승사랑, 후(후) 승사랑, 자(자) 증 사복시정, 비(비) 종사랑, 침(침) 종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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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
洪允亨(홍윤형) 남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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