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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應生(응생)◇봉직랑 의금부 도사 |
동생-渭興◇, 渭載, 渭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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渭聘(위빙)◇<박사공 13세/1-191><판서공(휘 이행)…통계공파> 1569년 6월 27일생∼1637년 1월 26일 별세, 자는 伯尙(백상), 서울에 살았다. 부모님 사후인 1603년(선조 36)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 진사(進士) 3등에 입격하였다. 성균관에 입학했다가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고, 종묘서 봉사(宗廟署奉事), 순안 현령(順安縣令)을 지냈다. 광해군(光海君) 때는 여러 번 내외직에 보직되었으나 국정이 문란함을 보고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의 인조반정(仁祖反正) 계기로 벼슬길에 나아가 익찬(翊贊), 사어(司禦), 청풍 군수(淸風郡守)를 역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익찬으로서 뒤늦게 강화도로 가서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을 배종, 호위하며 군사를 모아 수성(守城).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적에게 포로가 되어 항복을 강요당하였으나 “내 목은 끊을 수 있으나 너희들 앞에 무릎은 꿇을 수 없다.”이때 이가 뽑히고 혀를 잘리고 양 어깨가 잘려도 항복하지 않았다. 1639년(인조 17) 승지(承旨)에 추증(追贈), 1706년(숙종 32) 고향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고, 1807년(순조 7) 3월 유생들의 상소로 다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 1811년(순조 11) 6월 충렬(忠烈)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 혜국지(惠局志)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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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 |
증 정부인 연안 李氏(이씨) 1571년 2월 13일생∼1645년 10월 7일 별세, 아버지는 참봉 지남(至男), 조부는 장령 언침(彦침) 증조부는 참봉 증이조참의 계장(繼長), 외조부는 승지 동래 정원(鄭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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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
김포 고현 내모리고개 임좌에서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로 이장하였다. 족증손 현감 재항(再恒)이 행장을, 소곡 윤광소(尹光紹)가 비문을, 판서 윤광안(尹光顔)이 시장을, 경산 정원용(鄭元容)이 신도비명을, 영의정 이유원(李裕元) 묘지명을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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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
휘(휘) 무후, 壽賢(수현) 구례현감, 壽喜(수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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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
朴世禎(박세정) 반남인, 아버지는 첨정 정린(正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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