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강씨

 

박사공 6세

 

恭穆公派譜

 

 

 

                                                                        비무장지대 북측 민통선 안에 있는 공목공 묘역()의 인공위성 사진

 

 

                       공목공(휘 시) 연보(年譜)

 

연대(年代)

사적(史蹟)

1274년(원종 15)

 

5대조 계용(啓庸) 서장관(書狀官), 국자 박사

1281년(충렬왕 7)

 

고조부 인문(引文) 서장관(書狀官), 전중 내급사

 

 

증조부 사첨(師瞻) 감찰어사, 증 판내의령 참리부사

 

 

조부 창귀(昌貴) 판도정랑, 계림판관, 증 진원부원군

 

 

아버지 군보(君寶) 1344년(충혜왕 5) 문과 급제, 정랑, 1377년 중추원첨서, 정당문학, 첨의평리, 예문관 대제학, 문하좌시중, 봉산부원군(鳳山府院君), 시(諡) 문경(文敬)

1339년(충숙왕 7)

12월22일

출생

 

1346년(충목왕 2)

 

음보(蔭補)로 연릉직(延陵直)을 받다.

 

1347년(충목왕 3)

 

 

동생 서(筮) 출생

 

 

원정공 진주 하즙(河楫)의 딸과 결혼

 

1357년(공민왕 6)

 

문과 급제

장남 회백(淮伯) 출생

 

 

 

차남 회중(淮仲) 출생

3남 회순(淮順) 출생

4남 회숙(淮叔) 출생

1362년(공민왕 11)

 

대관서승  

 

 

낭장 겸 감찰규정, 전공좌랑, 광흥창사

 

 

합문인진부사, 조열대부

1364년(공민왕 13)

 

 

5남 회계(淮季) 출생

 

 

봉성대부 합주지사(知陜州事)

전법, 판도, 전리사 총랑

중현대부 위위윤

합주지사 시절 농상집요(農桑輯要)를 편찬

1376년(우왕 2)

7월

 

장남 회백(淮伯) 문과 급제

1377년(우왕 3)

 

중정대부 삼사좌윤

봉순대부 군기시 판사

 

1378년(우왕 4)

 

강릉도(江陵道) 안렴사

 

1379년(우왕 5)

 

통헌대부 선공시 판사

봉익대부(종2품)

차남 회중(淮仲) 문과 급제

1380년(우왕 6)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아버지 문경공 별세

 

1381년(우왕 7)

 

좌상시(左常侍)

 

1382년(우왕 8)

 

판도 판서, 밀직부사

단성보리공신

광정대부 판후덕부사 겸

전의시 판사, 상호군

 

1383년(우왕 9)

문하평리상의 중대광(종1품) 진산군

 

1385년(우왕 11)

2월

 

장남 밀직부사 회백(淮伯)이 명경(明京)에 가다

 

손자 우덕(友德) 출생

1389년(공양왕 1)

10월

 

5남 회계(淮季) 문과 급제

 

 

연대(年代)

사적(史蹟)

1390년(공양왕 2)

1월

 

5남 고공좌랑 회계(淮季) 세자시학이 되다

2월

 

장남 밀직사 회백(淮伯)이 사부(師傅)가 되다.

7월

광정대부 판자혜부사 상호군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

 

목은 이색(李穡)이 공목공의 양진재(養眞齋) 기(記)를 짓다.

8월

 

5남 고공좌랑 회계(淮季)가 진원군으로 봉해지다.

겨울

추충보조공신 대광상의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판선공시사 좌우위상호군

 

12월

 

차남 회중(淮仲)이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가 되다.

1391년(공양왕 3)

12월

 

장남 밀직사 회백(淮伯)이 정당문학 겸 사헌부 대사헌이 되다

조선

1392년(태조 1)

7월

공목공(휘 蓍)은 직첩을 회수당하고 먼 지방에 방치(放置)되고, 장남 회백(淮伯) 도 직첩을 회수당하고 먼 지방에 귀양가고, 차남 회중(淮仲)은 본향(本鄕)에 안치(安置)되다

 

 

어머니 계림군부인 김씨 별세

3년 시묘 살다

 

1395년(태조 4)

 

 

손자 석덕(碩德) 출생

1397년(태조 6)

 

임금이 전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강시(姜蓍) 등에게 전택(田宅)을 주고 서울에 살게 했다.

 

5월 29일

 

손자 자신(子愼) 출생

1398년(태조 7)

 

 

손자 순덕(順德) 출생

4월 3일

 

차남 회중(淮仲) 등 16인이 외방에 귀양가다.

5월 17일

 

차남 회중(淮仲) 등 16인이 유사(宥赦)되다.

1400년(정종 2)

11월26일

공목공 별세

 

겨울

대제학 양촌 권근(權近)이 공목공 묘지명(墓地銘)을 짓다.

 

1401년(태종 1)

2월

임강현 동쪽 언덕(장단군 나부리 황학산)에 예장되다.

 

 

  공목공 묘지명     양진재기

 

읽어 두기

1. 이 사이트는 진주강씨 공목공파보라 이름 함.

2. 발간하고자 하는 목적은 비무장지대 북쪽 민통선 안에 있는 공목공의 묘소를 재봉심하는데 필요한 재원(財源)을 마련하고자 함.

3. 편집 형태는 한글 가로 쓰기에 맞게 하였으며, 사적 내용을 한글로 하되 필요시 괄호 안에 한문을 병기함.

4. 부인이 생존해 있을 경우에는 실(室)로, 사망시는 배위(配位)로 표시함.

5. 자녀 중 아들을 먼저, 딸은 나중에 기록함.  

6. 사적을 기록함에 있어 생졸년은 서기로 하고 양력으로 표시한 것 외에는 음력으로 간주함.  

7. 학력 및 경력, 수상, 특별한 행적은 간략하게 기록함.

8. 문과방목, 사마방목에 없는 기록은 삭제한다. 다만, 사마시 입격 선조님 중 1414년, 1447년, 1469년에 시행한 것을 제외하고 1478년 이전에 입격하신 기록은 그대로 둠.

9. 문과급제를 한 적이 없으면서 문과급제자 전유 관로(官路)인 좌랑, 승지에 올랐다는 기록과, 문과급제자도 오르기 어려운 통정대부, 가선대부 이상 기록은 전거가 없으면 삭제함.

10. 증직(贈職)은 행직(行職)보다 오르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이 또한 전거가 없으면 삭제함.

11. 80세 이하에서 수직(壽職)을 받았다는 기록은 삭제함.

 

 

 

진주강씨

 

 

박사공~4세

 

 

갑산 도선영 전경<경남 합천>

 

 

 

도시조 以式

 

 

 

 

 

 

 

 

 

 

1-1

 

 

파시조 啓庸계용   박사공파조 국자박사(지금의 중앙국립대 교수)

  문과(文科) 급제, 국자(國子) 박사(博士) 역임.

  1274년(충렬왕 즉위) 조선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아들 내급사공과 함께 일본을 다녀왔다.

  1401년 겨울 대제학 양촌 권근(權近)이 지은 공목공(휘 시) 묘지명에 박사공은 공목공의

 

5대조부, 내급사공(휘 인문)은 고조부, 어사공(희 사첨)은 증조부, 진원부원군(휘 창귀)이 조부로 기록되어 있다.

  묘는 잃어버려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손자 어사공 봉단이 있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마을 뒤 용덕산 임좌에 봉단과 비를 세웠다.

2世 引文인문   하(河) 좌복야와 교우

  문과(文科) 급제, 전중(殿中) 내급사(內給事) 역임.

  1281년(고려 충렬왕 7) 5월 원나라가 2차 일본을 정벌할 때 길과 방향을 잘 안다하여 고려군 도독사(都督師) 김방경(金方慶)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다시 기용되어 일본 정벌에 나

 

서게 되었다.  

 10만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은 일본 하까다(博多)에 상륙하려다 1차에 이어 또다시 폭풍우를 만나 싸우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공은 수차 죽을 고비를 겪고 본국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후손들에게

3世 師瞻 사첨  아버지 유훈따라 벼슬 사양, 감찰 어사에 머물러   

  고려 충렬왕 때 전중(殿中)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역임했다. 손자 군보(君寶)의 공적으로 판내의령참리부사(判內議令叅理副使)에 증직되었다.

  묘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마을 뒤 용덕산 임좌(합천군지에 기록 있음)에 있었으

 

나 병란으로 잃어버렸다.   1776년(영조 52) 17세손 응교(應敎) 세백(世白)이 비문을 짓고 단을 세웠다. 1801년(순조 1) 봉산사(鳳山祠)에 배향하고 경신년에 구비의 자획 다수가 희미하여 단 옆에 묻고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묘정을 정화하고 단비를  

4世 昌富 창부   박사공의 3대 사손 고려 말 무신, 진양군에 피봉

  고려 말 무신(武臣), 음직으로 정용위(精勇衛)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방손 교관 석하(錫夏 1644~1707)가 찬한 비음기(碑陰記)가 있다.

  묘는 실전되어 1776년(영조 52) 17세 방손 응교(應敎) 세백(世白)이 비문을 짓고 단을 세

 

웠다.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묘정을 정화하고 옛 비를 계단 아래 묻고 단비를 고쳐 세웠다.

 

 

                        대장군공(휘 창부) 봉단

5世 璜寶황보

5世 畋寶전보

 

*국자 박사:국자감 교수

*군(君):종친과 신하에게 주던 존호, 품계는 정1품   에서 종2품까지 있다.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

 

 

파시조 啓庸계용  학문으로 서장관으로 선발돼 일본에 정벌에 출정 당해     

일본원정전(日本遠征戰) 제1차 정벌

  1274년(충렬왕 즉위) 25,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제1차 일본원정을 단행하였다. 고려도 군사 8,000명, 뱃사공 6,700명이 동원되었고, 전함 900척과 군량미를 부담하였다. 합포(合浦: 마산)에서 출발한 여·원 연합군은 쓰시마·이키섬을 정벌한 뒤 다시 기타큐슈(北

 

 

九州)의 다자이부를 공략하기 위해 히젠에 도착하여 하카타·하코자키·이마쓰 등지에 상륙하였다. 연합군은 도처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마침 강한 태풍이 불어 연합군은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고 합포로 철수하였다.

2세 引文인문  원(元)의 일본 정벌 때 죽을 고비, 유학(儒學)을 일삼지 말라 훈계

“내가 학자가 아니었더라면 그처럼 위험한 일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들은 다시는 선비의 재주를 나타내지 말라”하여 자손들이 과거를 보지 않았다. 공목공(휘 시) 묘지명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이 사실이 실려 있다.

  묘는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아들 어사공  

 

봉단이 있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마을 뒤 용덕산 임좌(壬坐)에 봉단과 비를 세웠다. 17세손 교관 석하(錫夏 1644~1707)가 지은  찬사가 전해져 온다.

 

 

3세 師瞻 사첨   배위는 문정공 나주 정가신(鄭可臣)의 딸   

고쳐 세웠다.

  배위(配位)는 금성군부인(錦城郡夫人) 나주정씨(羅州鄭氏), 아버지는 삼한삼중대광 수사공 금성부원군 문정공 가신(可臣), 할아버지는 증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장군 송수(松壽)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증중봉대부 예빈경

 

종산(宗産),  외할아버지는 대부(大府)  소경(少卿) 죽산 안홍우(安洪祐)이다. 옛날 보책에는 배위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았으나 나주정씨(羅州鄭氏) 병진, 계묘 양보책에 실려 있어 대동보편찬위원회의 결의에 의거 실었다.   16세손 교관 석하(錫夏 1644~1707)가 지

4世 昌貴 창귀   선세 가업 계승토록 아들에게 과거 응시토록 허락

  음직으로 판도정랑(版圖正郞)에 오르고,

1346년(고려 충목왕 2) 계림판관(鷄林判官)으로 부임하여 경북 영천(永川)으로 이거하였다. 아들 군보(君寶)의 공적으로 중대광 문하시중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증직되었다.

  묘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마을  뒤

 

용덕산 임좌(壬坐)에 있다.

  배위는 영가군부인 안동 권씨(權氏), 아버지는 합문지후 윤보(允保), 할아버지는 검교장군 금자광록대부 상서 좌복야에 봉해진 자여(子輿), 증조할아버지는 상서 좌복야 상장군 수홍(守洪)이다.

         진원부원군공(휘 창귀) 묘

5世 君寶군보

 

*음직(蔭職):공신 또는 5품 이상의 신하의 자손에   게 주던 관직, 3품 이상 신하에게는 사위, 동생    등에게 벼슬을 내리던 제도.

*부원군(府院君):종친 및 정1품 공신에게 내리던   작호

*증직(贈職):공신, 충신, 효자, 학덕이 높은 사람    등에게 사후에 관직을 주거나 높여 주는 벼슬 제   도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

 

 

박사공 봉단

갑산재<박사공 재실>             

2세 引文인문

일본원정전(日本遠征戰) 제2차 정벌

  원나라 세조는 1281년 제2차 일본원정을 단행하였다. 이때 원정군은 동로군(東路軍)과 강남군(江南軍)으로 편제되었다. 원·고려 연합으로 편성된 동로군은 총 4만 명이었는데, 그 중 1만 명이 고려인이었으며 전함

 

900척은 모두 고려의 부담이었다. 중국 강남지역에서 차출된 강남군은 중국총 병력 10만 명에 전함 약 3,500척이었다. 동로군은 1차 때와 같이 합포를 출발, 이키도를 비롯하여 규슈 연안의 여러 섬을 공략하고 하카타를 향했으며, 강남군은 중국 강남을 출발하여 규슈 연안의 오지마

3세 師瞻 사첨

은 찬사가 전해져 온다.  

 

敎存鯉庭 貴含光而混世   가르침은 이정에 있고 혼세에 빛 감추는 걸 귀히 여겨

仕止烏府 諒辭尊而居卑   오부의 벼슬 그쳐 높은 자리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있었네

小雅篇中 休歌鹿鳴之什  소아편 속의 아름다운 노래는 녹명장이요  

長安市上 競興馬悤馬之謠   장안 저자엔 총마 노래 흥겹네

4세 昌貴 창귀    배위 안동 권씨, 90가까이 장수

  묘는 쌍봉이며 후손 교관 석하(錫夏)가  찬사(贊辭)를 지었고 후손 진형(震馨)이 묘지(墓誌)를 지었다.

  1994년 대동보 편찬 후 묘역을 정화하고 구비는 계단 아래에 묻고 비를 고쳐 세웠다.

 

 

 

 

 

내급사공(휘 인문) 봉단

 

 

어사공(휘 사첨) 봉단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2

  

 

파시조 啓庸계용

              

 

 

 

 

 

            

                              갑산선영 사적비

 

 

 

2세 引文인문

(應島)에서 동로군과 합세하여 다자이부를 향하여 공격하였다. 하지만 다시 태풍을 만나 인명과 함선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제2차 일본원정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진양 하씨 경태보에 내급사공이 하정승과 교우한 사적이 실려 있음

 박사공(휘 계용)의 아드님인 내급사공(內給事公)이 복야(僕射 고려 정2품직)를 지낸  진양(晉陽) 하공(河公)과 종유(從遊: 학덕이 있는 사람과 사귐)한 기록이 진양 하씨(晉陽 河氏) 景泰譜(경태보 1451년 문종 1년 간행)서문에 실려 있다.

 

 

……有姜給事 贈詩我先世 稱之以河僕射 諱亦不知 悲嘆也……

……姜給事(내급사공 姜引文)라 하는 분이 우리 선조에게 시(詩)를 지어 주면서 河僕射(하복야)라 일컬은 일이 있는데 (하복야의) 이름자를 모르니 한스럽다.……

진원군(휘 창귀) 찬--교관 석하 지음

 

4世 昌壽창수

先志克遵     선대 뜻을 잘 따라

恥隨貢於計吏 계리된 것을 부끄러워 했으나

下位終屈     낮은 지위도 마침내 굽혀

甘晦跡於潛郞 잠랑으로 기꺼이 자취 감추었네

張侯之官不成 장후의 벼슬 이루지 못한 것이

豈非天意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며

 

  삼사(三司) 좌윤(左尹)을 역임했다.

  1381년 지어진 장인 윤구생(尹龜生)의 처 묘지명에는 우윤(右尹)으로 기록되어 있다.

 

   

 

王氏之福未艾 왕씨의 복이 끊이지 않아

大昌雲仍     후손이 대창했네.

 

 

 

 

 

 

 

사위 尹紹宗 윤소종

  무송인(茂松人)

  병조전서 수문전학사(修門殿學士)를 역임했다. 아버지는 효자 판전농시사 구생(龜生), 할아버지는 찬성사 율정(栗亭) 택(澤)이다.

 

 

 

진주강씨

 

박사공 6세

 

恭穆公派

 

공목공파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7

 

 

5世 君寶군보      진주강씨 중흥조

  ?~1380년 1344년(고려 충숙왕 5) 남궁민(南宮敏) 방 진사(문과)에 등재하여 1344년(고려 충무왕 즉위년) 정랑(正郞),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77년(우왕 3) 중추원첨서, 그 후 정당문학(政堂文學), 첨의평리 예문관 대제학, 삼중대광 문하좌시중에 오르고 봉산부원군(鳳山府院君)에 피봉되었다.

 

두 아들이 모두 재상(宰相)

시호는 문경(文敬)  “문경공은 천성이 영민하고 풍채가 늠름하며 학문을 좋아해 군의 향교에 나아가 공부하여 학문을 이루었다.”라고 17세손 첨지사 호부(浩溥 1690~1778)가 지은 장후서(狀後序)에 기록하고 있다. 대각(조정)에 나아가서는 5조(충목, 충정, 공양, 우, 창)를 거치면서 경(敬)으로서

6世 다스리는 곳마다 칭송이 자자

  1339년 2월 22일~1400년 11월 26일, 자는 매(某), 호는 양진당(養眞堂). 8세에 집안 음덕으로 연릉직(延陵直)을 시작으로 19세 되던 1357년(공민 6) 정유 성균시 염흥방(廉興邦) 방에 급제하고, 1362년 대관서승을 거쳐 낭장을 두 번 지내고 감찰규정을 겸직, 전공좌랑과 광흥창사를 역임하면

 

아들들을 경상(卿相)으로 키워

서 번거로운 일을 신속 민첩하게 다스리어서 가는 곳마다 칭송이 자자하였다. 합문인진부사가 되어서는 행동을 예법에 맞도록 하여 조열대부의 품계를 더했으며, 외직으로 봉성대부 지합주사(知陜州事)에 부임하여 선정을 펴 전법판도전리(典法版圖典理), 모두 총랑에 오르고 중현대부로 위위윤(衛

7世 淮伯 회백         고려 말 명신

  1357년~1402년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 1376년(우왕 2) 정총(鄭摠) 방 문과에 급제, 성균관 좨주(祭酒), 밀직제학, 1377년 밀직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첨서사사(簽書司事)에 1379년 다시 명나라에 다녀 왔다. 정몽주, 이숭인과 더불어 호복(胡服)을 화제(華制)로 바꿀 것을

 

정당문학, 대사헌 역임

건의했다.

1389년 밀직사에 오르고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 호를  받았고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부족하다고 사양했다. 다시 승진되어 판밀지사사 겸 이조판서에 오르고, 교주 강릉도 관찰출척사, 1390년  정당

8世 宗德 종덕        고려가 망하자

  호는 물계(勿溪), 음직으로 감찰 역임, 고려가 망하자 안동 물계촌으로 이거하였다. 조선조에서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할 때 사헌부 장령(掌令)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묘는 경북 예천군 감천면 정전리에 있으며 방손 응교(應敎) 세백(世白)이 비음기를 지었다.

 

안동 물계촌에 은거

  배위는 경주이씨 첨서밀직사사 월성군 정견(廷堅)의 따님이다. 할아버지는 장작소감(將作少監) 육(毓), 증조할아버지는 월성부원군 경중(敬中), 외할아버지는 밀직부사 광산 김천리(金天利)이다.

 묘는 감천면 현내동 존당현 신좌(辛坐)에 있다.

9世 子愼 자신  

9世 子儀 자의  

9世 子保 자보

9世 子儉 자검

 

 

사위 鄭豫孫 정예손 목사, 아들 상(常)

사위 李承壽 이승수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7

 

 

5世 君寶군보 불의에 빠지지 않고 수신

수신(守身)하고 효로서 부모 모시고 인(仁)으로 사물을 대하였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90 노모를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상을 마치고 별세하였다.

 

노모 앞에서 어린애처럼 즐겁게 놀아

  묘는 경남 고령군 성산면 어곡리 병좌(丙坐)에 있다. 한때 실전하였으나, 후손 동래부사 필리(必履 1713~?)가 적성을 다해 다시 찾았다.

  목은 이색(李穡), 양촌 권근(權近)이 지은 만사가 유사에 실려 있다. 신도비명은 안동 김윤

6世 시      안동대도호부사 재직중

尉尹), 중정대부로 삼사좌윤, 봉순대부로 군기시 판사를 지냈다. 1378년(우왕 4) 강릉도관찰사, 이듬해 통헌 판선공시에 제수되고 봉익대부(종2품)에 승진되어 이듬해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가 되었을 때 아버지 문경공이 세상 떠나 장례를 마치고, 일 년만에 좌상시에 기용되었다.

 

아버지 문경공 세상 떠나

  1382년 판도전서로 전직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밀직부사가 되고, 단성보리추충 보조공신의 호를 하사받았다. 그해 겨울에 광정대부 판후덕부사로  옮기어  판의전시사 상호군을 겸직하고 1383년 봄에 문하평리상의에 배명받고 겨울에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니 품계는 중대광(종1품)이다. 1390년

7世 淮伯 회백 정도전과 반목, 귀양 가

문학(政堂文學) 겸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정몽주가  주살당하고 이성계의 일파인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과 반목하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진양에 귀양갔다. 뒤에 이태조의 강권과 멸문(滅門)을 막기 위해 모친 상중에  계림부윤에  나아가고 다시

 

동북면도순문사 역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 都巡問使) 겸 병마수군절도사 영흥부윤을 지냈다. 손자 희맹(希孟)의 공적으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춘추관 성균관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증직되었다. 인품이 총명하고 의분(義奮)에 격하기를 잘 했다. 저서

8世 友德 우덕        아들이 영의정

  1385년~1439년 자는 자보(子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비길 데가 없었는데, 6세에 어머니를 잃고, 18세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예를 다해 여막생활을 했다. 1400년 감문위산원(監門衛散員), 1415년(태종 15) 승사랑 의영고 주부, 그해 가을에 선무랑으로 예안현감(禮安縣

 

문경공(文景公) 맹경(孟卿)  

監)을 시작으로 5개 현감을 지내고, 내직으로들어 와 사온서령, 의영고사(義盈庫使), 한성판관, 1434년 창녕현사(昌寧縣事)를 거쳐 조산대부에 올랐다. 임지에서 돌아가시자 읍인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듯이 복상(服喪)하였다. 아들 맹경(孟卿)의 공적으로 증 의정부 좌의

9世 孟卿 맹경

9世 叔卿 숙경

사위  曺 榮 조영 참봉

  남평인(南平人), 아버지는 부사(府使) 유인(由仁), 아들 걸(傑), 사위 사용 윤산석(尹山石), 진사 이순(李諄)

 

사위 朴居謙 박거겸

  밀양인, 중추(中樞) 밀산군(密山君) 시호 평간(平簡), 아버지는 증호조판서 경빈(景斌), 조부는 검교참찬의정부사 의중(宜中). 사위는 군수 지중추 여흥 이증석(李曾晳)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8

 

 

5世 君寶군보목은 이색, 양촌 권근이

동(金潤東)이 짓고 이창헌(李昌憲)이 썼다.  

  배위는 계림군부인 경주 김씨(金氏), 1392년에 별세했다. 아버지는 전객령 여진(呂珍),  할아버지는 태자첨사 천석(天錫), 증조할아버지는 은공(殷公)이다.

  묘는 경기도 임강현 대곡촌에 있었는데 실

 

만사 지어 업적을 기려

전하여 공의 묘 우측에 단을 세웠다.  

  13세손 교관 석하(錫夏)가 지은 찬사가 전해져 온다.

 

 

 

6世 시    진산군, 문하찬성사 역임

(공양왕 2) 여름에 광정대부 판자혜부사 상호군 동판도평의사사사가(同判都評議使司事) 되고 겨울에 추충보조공신 대광상의문하찬성사와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 겸판선공시사(兼判繕工寺事) 좌우위 상호군의 직첩을 더하였다.

 

54세에 3년간 어머니 시묘

  1392년 어머니가 별세하니 나이 54세에 3년을 시묘살이를 하여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었다. 천성이 신중하고 정성스러웠으며 풍채가 엄중하며  언어와 처사를 예법에 따라 행하고 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집안을 다검소하게 다스렸다.  내외직 벼슬을 지냈으나 법을 지켜 아첨하지 않아 사람마다

7世 淮伯 회백  여지승람, 명신열전에

로는 통정집(通亭集)이 있다. 경남 산청군 단속사에 어릴 때 형제들과 손수 심은 매화나무가 있는데, 공의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므로 사람들이 이 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고 부르고 정당매각(政堂梅閣)의 글은 진주 하룡(河龍)이 짓고 하원규(河元逵)가 썼다.  

 

사적이 실려 있어

경주부윤 이돈상(李敦相)이 지은 공의 기적비(紀績碑)가 있다. 기아(箕雅) 동문선(東文選), 여지승람, 여사 명신열전(麗史 名臣列傳)에 사적이 실려 있다.

  묘는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능촌산 유좌(酉坐)에 있다. 손자 진산군 희맹(希孟)이

8世 友德 우덕

정에 추증되었다.

  묘는 진양군 진성면 중촌리 술좌(戌座)에 있있다. 직제학 유의손(柳義孫)이 묘비문을 짓고진주 하동근(河東根)이 신도비명을 짓고 오천(烏川) 정직교(鄭直敎)가 전서를 아울러 썼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재령 이씨(李氏),  아버지는 지보주사 혜(蕙), 조부는 좌우위 중랑장 일상(日詳), 증조부는 보조공신 상호군 소봉(小鳳), 묘는 상하로 있다.

 

 

 

 

 

8世 進德 진덕    세종 때 문과급제

  자는 자수(子修), 호조좌랑으로 재직 중인 1427년(세종 9) 정미친시 문과 을과 3등으로 급제하여 1430년 병조정랑을 거쳐 세자필선, 1438년 사헌부 장령, 집현전 직제학 겸 지제교, 좌우부승지를 역임했다.

 묘는 경남 합천군 합천읍 서산리 보림촌 노

 

9世

9世

9世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8

 

 

5世 君寶군보  

陳孺子之讀書

한나라 진평처럼 글 읽기를 좋아하고

杜元凱之好學

진나라 두예같이 학문을 잘 하셨네

早鵬褰於雲露

(지위가) 일찍이 봉새가 구름 속 날 듯 했고

 

 

逐鴻漸於天衢

(지위가) 드디어 기러기 하늘거리 가는 듯 해

體道經邦贊新化於合席

도 닦아 나라 위해 정승자리 새로웠고

疎封列爵食舊德於名卿

높은 벼슬 봉해 받아 이름 높고 덕이 크도다

6世 시                              묘가 비무장지대에

엄격함을 두려워하고 존경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된 뒤 맏아들 회백(淮伯), 둘째 회중(淮仲)이 우현보, 이색, 설장수등과 고려 말 도당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했다고 직첩을 회수 당하고 먼 지방에 유배되었으나 뒤에 풀려 나왔다. 시호는 공목(恭穆)

 

있어 안타까움 더해

  묘는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나부리 황학산유좌(酉坐)에 있다. 양촌 권근(權近)이 묘지명을 짓고 목은  이색(李穡)이 양진당기(養眞堂記)를 지었다. 고려사에 이 사실이 실려 있다1979년에 양진당을 안동시 수상동에 복원하였으며 순천 김희철(金喆熙)이 양진당기를 짓고 진성 이가원(李家源)이 유

7世 淮伯 회백                         하륜(河崙)과는

행장을 지었다. 신도비명은 안동 김윤동(金潤東)이 짓고 김순동(金舜東)이 전서를 아울러 썼다.

  배위는 군부인 동래 정씨(鄭氏), 1390년 별세하였다. 아버지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양도공(良度公) 우곡(愚谷) 양생(良生), 조부는 밀직 봉산군(蓬山君) 호(瑚), 증조부는  판

 

동서지간

도진사사(判都津司事) 유의(惟義), 외조부는 찬성 문정공 순흥 안축(安軸)이다.

  묘는 임강현 도원역 뒤에 있었으나 잃어버려 공의 묘 오른편에 단을 세웠다. 3남 2녀를 길렀다.     

 

8世 進德 진덕                집현전 직제학 역임한

태산 기슭 묘좌(卯坐)에 있다 하였으나 물증이 없어 후손들이 계단 아래 단을 세웠다. 방후손 승지 휘옥(彙玉)이 찬한 전의비(傳疑碑)가 있으며 재각이 있다.

  배위는 숙부인 문화 유씨(柳氏)이다. 배위의 아버지는 검한성사 원현(元顯), 조부는 문화군 진(鎭), 증조부는 찬성 장경

 

학자로 세종의 치적에 큰 공 세워

공 돈(暾), 외조부는 파평군 윤해(尹侅)

  묘는 합장했다.

 

 

 

사위 鄭祖禹 정조우  

  광주인, 생원. 아버지는 장령 지하(之夏), 아들 승경(承敬), 승순(承順),

사위 李貴美 이귀미  

  덕산인, 현감. 아버지는 소윤 사증(師曾), 아들 지간(之幹), 지림(之林)

 

사위 李信儉 이신검  

  용인인, 군수. 아버지는 부사 수강(守綱), 계자 현감 숙(塾)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9

 

 

            문경공(휘 군보) 묘                 

 

           어곡재(문경공 재실)

6世 양촌 권근이 묘지명을 짓고

허비문을 지었다.

  배위는 정신택주(貞愼宅主) 진주 하씨(河氏), 1338년에 태어나 1399년에 별세했다. 아버지는 진천군(晉川君) 원정공(元正公) 송헌(松軒) 즙(楫),  할아버지는 정용위 호군 직기, 증조할아버지는 사직  보(保),  외할아버지는 판밀직 철성군

 

양진당기는 목은 이색이 지어

(鐵城君) 고성 이우(李瑀)이다.  묘는 경기도 파주군 보시리(普施里)에 있었으나 후에 대자암(大慈菴) 산록으로 옮겼는데 잃어 버렸다.

 

 

7世 淮伯 회백  

  배위는 증 정경부인 성주 이씨(李氏), 1445년에 별세했다. 아버지는 중대광 평양부윤 성산부원군 존성(存性), 조부는 낭장 향(嚮), 증조부는 대제학 흥안부원군 문충공 인복(仁復), 외조부는 시중 월성부원군 충렬공 경주 이성림(李成霖). 묘는 공의 뒤편 유좌(酉坐)에 있다.

 

11세손 교관 석하(錫夏)가 지은 찬사

 

華嵩德望 奎璧文章

화산과 숭산 같은 높으신 덕망이

규성과 벽성 같은 빛나는 문장이라

烏堂擊奸秉 金矢而勵節

사헌부서 간신 칠 때 금살 같은 절개지켜

8世 碩德 석덕    시호는 대민(戴慜)

  1395년~1459년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 음보(蔭補)로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된 후 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가 되어 선정을 베풀고 그 공으로 인수부 소윤(仁壽府少尹)에 발탁되었다. 이어 집의(執義)를 거쳐 1416년 공조 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1423년(세종 5) 우부승지(右

 

맏아들 희안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

副承旨)가 되고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대사성에 오르고 1446년(세종 28) 이조와 형조의 참판, 대사헌를 역임하고, 1448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1449년 자헌대부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사후에 증 추충 충적보조공신 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 춘추관 관상감사

9世 希顔 희안

9世 希孟 희맹

9世 希曾 희증  

 

 

 

사위 南 俊 남준

  의령인, 현감. 아버지는 직제학 간(簡), 아들 증참의 염(恬), 생원 전(恮), 진사 회(恢), 대사간 율(慄), 문과 이조정랑 제(悌)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9

 

 

                     공목공 봉단(연천 통정공 묘역 내)

 

             통정공(휘 회백) 묘

               

                                      정당매

 

광풍정(경북 경주)

 

鳳閣論道調 玉鉉而贊元

정당문학 도를 강논함에 구슬 같은 원리 밝혀

趙靈王胡服之風陋矣

조영왕의 호복풍속을 더럽히니

其舊孔夫子周冕之制

그 옛날 공자님의 주의 예절과

煥然維新禮敎

예법을 교화하는데 환연히 유신했네

 

 

河鄭李 一時同修相業

하, 정, 이와 같이 배워 정승자리 이어감이

祖子孫 三世迭繼

조자손이 삼세였네

滄桑忽變以 明哲而保身

세상이 바뀌어도 밝은 지혜 보신하고

金火遽遷 當廢興而知命

역사가 달라질 때 망할 줄 미리 알았네.

8世 碩德 석덕

 세자사  진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대민(戴慜)이다. 시(詩)와 글씨에 능했으며 문집이 있고 글이 기아동문선, 여지승람, 해동명신록에 실려 있다.

  묘는 연천 능촌 선영 뒤쪽 우록 신좌(辛坐)에 있으며 표석이 있다.

 

 

 아들 희맹(希孟)이 행장을 짓고 10세손 교관 석하(錫夏)가 찬사를 지었다. 신도비는 완산 이정구(李鼎九)가 짓고 방후손 정희(正熙)가 병서와 전서를 썼다. 영광 유림들이 세운 이흥사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청송 심씨(沈氏)이며 1518년에 별세, 아

사위 辛 肅 신숙  

  영산인, 판사. 아버지는 인(仁), 아들 문과 정랑 건(健)

 

 

 

 

사위 金元臣 김원신  

  연안인, 부사. 아버지는 감사 수(修), 아들부사 면(勉), 군수 여(勵), 문과 대제학 감(勘), 부윤 협(協), 참봉 훈(勛)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0

 

문경공 만사

 

年將七十侍慈顔

省宰庭中無袖斑

此時古今稀有事

凜然風采照鄕山

斐英臺閣躍氷顔

諳鍊非徒管豹斑

晩拜政堂封食邑

一時高議重於山

我生甫冠識公顔

鏡裏吾今兩鬂斑

千里末由親執紼

如聞薤曲動雲山

 

(목은 이색 지음)

 

칠십 나이 다 되도록 어머님 모시면서

재상집 뜰 안에서 색동옷 입고 춤을 추었네.

이야말로 고금에 드믄 일이 아닌가.

늠름한 그 풍채는 고향 산천 비추고

위엄 있는 얼굴로 조정에서 드날렸네

사리에 정통하여 전체를 못보고 일부만 보는 사람 아니네.

만년(晩年)에 정당 받고 식읍도 받으니

한 때의 높은 이론 태산보다 높았네

내 나이 약관에 공의 얼굴 알았는데

거울 속 내 귀밑 희끗희끗 변해졌네.

천리 길 멀고멀어 상여 줄 못 잡으니

해로곡이 구름 낀 먼 산조차 움직여 들리는 듯하네.

 

7世 淮伯 회백

 

 

 

 

 

 

 

                                        사애각

8世 碩德 석덕

버지는 영의정 안효공 온(溫), 조부는 청성백 정안공 덕부(德符), 증조부는 전랑 용(龍), 외조부는 영돈령 소의공(昭懿公) 순흥 안천보(安天保)   

  묘는 합장했다.

 

 

                               대민공(휘 석덕) 묘

사위 黃昚 황신  

  장수인, 장원군. 아버지는 영의정 수신(守身). 아들은 현감 근창(謹昌), 첨지 성창(誠昌), 경력 겸창(謙昌), 군수 예창(禮昌), 사지 경창(慶昌), 동지 순창(順昌), 호군 형창(亨昌), 별좌 의창(義昌)

 

사위 朴楣 박미  밀양인, 문과 대사간.

 

 아버지는 좌참찬 밀산군 중손(仲孫), 아들은 참의 의영(義榮), 참판 광영(光榮), 문과 교리 증영(增榮), 감사 소영(紹榮), 진사 안영(安榮), 사위 강위손(姜渭孫)

사위 安 訂 안정  

  호군, 구보에는 누락, 사숙재집 수월암에 실려 있음.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0

 

 

문경공 만사(양촌 권근 지음)

 

立身行有度 입신한 몸가짐이 법도 있고

養志孝彌豊 뜻 받들며 효도를 다 하였네.

老矣方哀毁 늙어서 모친상 에 애통해하더니

俄然已令終 얼마 있다 자기도 세상 떴네.

沙堤猶昨日 모래 언덕 놀던 일 어제 같아

廊廟有遺風 조정에 유풍이 남아 있네.

積善傳家遠 쌓은 공덕이 가문에 전해 가니

綿綿慶不窮 경사가 끊이지 않고 끝없어라.

吾生雖已晩 나는 비록 뒤늦게 태어났지만

常及老成人 이제는 늙은 사람 다 되었네.

 

 

 

勤愼持身德 조심스레 몸가짐 덕이 있었고

溫恭待物仁 온화 공손한 마음 어질게 사람을 대했네.

黃扉初罷相 정승 자리 내놓으시고 누런 초가집으로 되돌아가

綠野欲怡神 벼슬 사양하고 몸 편히 쉬고 싶었는데

豈意騎箕速 어찌 이리도 빠르게 떠나셨나

終令愴恨新 마침내 슬프고도 원통한 마음 새로워지네.

공목공 유운(遺韻)

 

久負江湖約

 오래 강호의 언약 저버리고

紅塵四十年

 홍진에 묻힌 사십년이었네

白鷗如欲笑

 백구는 웃고 싶어 하는 듯

來近釣磯邊

 가까이 낚시터까지 오네

공목공 찬(교관 석하 지음)

氣度恢弘     기개와 도량이 넓고 크며

風采嚴重     풍채가 엄정하도다

蒼門建節     동북방 관찰사로

范孟博之澄淸 범맹박의 청렴이오

紫樞柄機     자추 병기는

司馬光之勳業 사마광의 훈업이로다

躋于廊廟     낭묘에 올라

重新晉國之封 진국(진원군) 봉함에 거듭 새롭게 했고

大其門閭     그 문려를 크게 하니

果驗于公之德 우공의 덕이 과연 징험 있도다

8世 順德 순덕      

  1398년(태조 7)~1459년. 자는 자윤(子允),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묘는 시흥시 상하동 산 6번지 미좌(未坐)

  배위는 의인 안성 이씨(李氏), 1474년에 별세했다. 아버지는 찬성 안성군 숙번(叔蕃), 조부는 안성군 경(坰)

 

   

  증조부는 사정(思正), 외조부는 서원군 청주 정총(鄭摠)

묘는 합장했으며, 상석이 있다.

 

 

 

9世 希明 희명      

9世 정      

 

 

 

 

 

                   감찰공(휘 순덕) 묘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1

 

 

5世 君寶군보

 

 

 

 

 

 

 

 

6世

 

 

 

 

 

 

 

 

7世 淮伯 회백

 

 

 

 

 

 

통정공(휘 회백) 장인 정양생(鄭良生)

 文科(문과)급제. 禑王(우왕) 丙辰(병진) 1376년에 大司憲(대사헌)이 되고 동년 3월 淸白吏(청백리)에 選入(선입)되었다. 1378년 戊午(무오)에 贊化功臣 蓬原君(찬화공신 봉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良度(양도), 1392년  4월 卒(졸). 일화로는 '대동운부군옥 8권'에

어느 날 신우(우왕)가 어느 집에 가서 스스로 다듬이돌 노래를 부르며 묻기를 "이집이 누구의 집이냐"하자, 종자가 "정대부의 집입니다"하니 신우가 곧 말을 타고 떠나며 "그 사람은 두려워 할 만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것은 신우가 정양생은 굳세고 곧아서 범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위 金 張 김장  

  상주인, 문과 정언. 아버지는 부사 준(俊), 아들은 직장 극용(克用), 지평 이용(利用), 문과 좌랑 정용(貞用)

사위 南景祐 남경우.  의령인

 아버지는 밀직사사 강무공(剛武公) 은(誾)

 

 

 

 

 

 

 

감찰공(휘 순덕) 장인 이숙번(李叔蕃)

1373~1440. 1393년 문과 급제, 1398년에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있으면서 방원(芳遠:뒤의 태종)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으며, 박포(朴苞)가 방간(芳幹)을 충동하여 거병하자 군사를 동원하여 이들을 제거하였다. 태종

 

 

 

 

 

 

 

 

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이 되었다.

 1409년 참찬의정부사․겸지의흥부사(兼知義興府事)를 거쳐, 1412년말에는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 1415년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1

 

 

5世 君寶군보

 

 

 

통계공(휘 회중) 묘→

 

 

 

6世 蓍

                       소윤공(휘 안수) 묘

 

             경덕재(통계공 재각)

7世 淮仲 회중

  ?~1421년 자는 중보(仲父), 호는 통계(通溪). 1373년(공민왕 22) 군자시승(軍資寺丞)으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최영장군을 따라 탐라도를 토평하였다. 이 사실이 탐라지(耽羅誌)에 실려 있다. 1382년(우왕 8) 전농시승(典農寺丞) 재직 중 유량(柳亮) 방에 문과 동진사(同進士)에 급제하였다.

 

 

1390년 사헌부집의, 1392년 군자윤(軍資尹), 현존하는 모든 족보에는 봉익대부 보문각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면서 한 때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태조가 형조참판, 병조참판, 병조판서에 임명했지만 불응하였다. 1421년 세종대왕이 총

8世 安壽 안수

  음직으로 1400년(정종 3) 제용고주부(濟用庫主簿), 1415년(태종 15) 8월 풍저창사(豊儲倉司)를 지내고, 여러 번 벼슬을 거쳐 통훈대부에 승차하여 예빈시소윤(禮賓寺少尹)을 지냈다. 손자 반성위(班城尉) 공안공(恭安公) 자순(子順)의 공적으로 증가정대부 호조참판(戶曹參判) 겸 의금부동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贈職)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식사리 박사동 산122-1 자좌(子坐)에 있다. 1979년 비의 획이 마모되어 사적을 읽을 수 없어 비를 다시 세우고 상석도 다시 놓았다.

 

9世 휘    

9世  

9世 혜   

 

 

소윤공(휘 안수) 장인 홍서(洪恕)

?~1418. 고려말에 대호군을 역임하고, 1399년 우군동지총제, 1401년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면서 남성군(南城君)에 봉하여졌다. 1402년 전라도 병마도절제사로 파견되어 왜구를 소탕하였으며, 1407년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남양군에 개봉(改封)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강양(康襄)이다.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2

 

 

5世 君寶군보

 

 

 

 

 

 

 

 

 

 

 

 

                         봉강서원(상주 봉대)

6世

 

 

 

 

 

 

 

7世 淮仲 회중

제(摠制)에 임명했지만 역시 출사하지 않았다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392년(태조 원년) 정도전의 교서를 유사(有司)가 상고하기를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 56인이 고려말에 도당(徒黨)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해서 화단(禍端)을 일으켰다.”하여 통계공의 직첩을 회수하고 본향에 안치(安置)하였

 

 

다.

1399년 또 출사를 권했지만 불응하자 태형(笞刑)에 처하고 다시 본향에 안치(安置)하고 동년 4월에 3번째 출사를 권했지만, 역시 불응하자 이번에는 외방(外方)에 귀양보냈다. 조선이 개국한지 7년이 지나도록 통계공의 절의를 꺾지 못하

8世 安壽 안수

  배위는 증정부인 남양 홍씨(洪氏), 아버지는 남양군 강양공 서(恕), 할아버지는 충민공 사범(師範), 증조할아버지는 문정공 언박(彦博), 외할아버지는 직제학 평양 조사검(趙思儉)

  묘는 합장했으며 1997년 3월 묘역 정화시 봉분, 묘도비, 상석, 석등, 장대석을 다시 세웠다.  

 

8世 安福 안복     

  1457년(세조 3) 8월 주부(主簿) 재임 중 좌익(佐翼) 원종 3등공신(原從三等功臣)이 되었다. 그 후 조봉대부(朝奉大夫) 형조도관(刑曹都官) 정랑(正郞)을 역임했고 손자 지(漬)의 귀(貴)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고 다시 손자 징(澂)의 귀(貴)로 병조참판(兵曹叅判)에

사위 溫寧君 온령군  

  기헌공(寄軒公) 해(楷)의 가승에 의하면 장자는 증병판 휘(徽), 장녀는 온령군 차자는 정랑 윤, 다음은 군수 혜이며, 성원총록 1861년 동대문보, 상주보에는 온령군으로 돼 있다.

 

 

 

 

 

9世 利纘 이찬     

9世 利仁 이인    

9世 利誠 이성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2

 

 

5世 君寶군보

 

 

 

 

 

 

 

                           참판공(휘 안복) 세적비

         참판공(휘 안복) 묘

 

7世 淮仲 회중

자 하는 수 없이 같은 해 5월 유사(宥赦)하였다. 1400년 양촌 권근(權近)이 지은 아버지 공목공 묘지명에 통계공의 관명(官名)은 가선홍주목사(嘉善洪州牧使)이다.

 1407년(태종 7) 왕조실록에 기록된 통계공의 처음 관직은 좌우사간대부(左右司諫大夫)이다.

 

 

 1412년 의주목사, 1415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 명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다녀왔다. 1417(태종 17)년 함길도 도순문사, 경기도 관찰사 겸 개성부유후,  1418년 11월(세종즉위년) 인수부윤, 1419년 한성부윤(漢城府尹), 공조참판, 충청도관찰사, 1421년(세종 3) 4월 4일 총제(摠制)로 재

8世 安福 안복

추증(追贈)되었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내서산 감악동에 있었다. 한때 실전하여 11세손 필복(必復)이 이곳에서 훈장을 하면서 묘를 찾는데 성심을 쏟아 1749년 다시 묘를 찾았다. 7년 뒤인 1756년 11세손 문헌(文憲)이 문중에  알리고 다시

 

 

봉축하였으며 옛 비가 훼손되어 다시 비를 세웠다. 11세손 관찰사 윤(潤)이 묘음기를 지었고 승지 유(游)가 글씨를 썼다.  

  배위는 증 정부인 인천 이씨(李氏), 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판서를 지낸 효례(孝禮), 조부는 찬성 대제학 증 영

9世 利敬 이경    

9世 利順 이순   

9世 利行 이행

 

 

 

9世 利興 이흥    

9世 利溫 이온     

9世 利恭 이공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3

 

 

파주 공릉(恭陵)이 공목공(휘 시) 배위 진주

  조선 왕조실록에 의하면 박사공 6세 공목공(휘 시) 배위 진주 하씨(河氏)의 처음 묘터는 지금 파주군 조리면 봉일천리에 있는 예종의 원비(元妃) 장순 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의 공릉(恭陵)이었다. 이곳을 족보에서는 파주 보시리로 기록하고 있으며 후에 대자암(大慈庵)으로 이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462년(세조 8) 1월 4일

  임금이 고양(高陽) 뒤의 고개[嶺]에 거둥하여 장지(葬地)를 상지(相地)하고, 전지(傳旨)하기를, “이 산에는 쓸 수가 없다.”하고는

  파주(坡州)에 가서 강회백(姜淮伯)의 어미 무덤을 상지(相地)하게 하였다.<실록 7집 505>

 

 

 

 

 

 

 

 

 

 

 

 

 

 

하씨(河氏)의 묘터였다

1462년(세조 8) 1월 5일

  계양군(桂陽君) 이증 등이 와서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강회백(姜淮伯)의 어미 무덤은 풍수(風水)에 쓸 만한 땅입니다.”하였다.<왕조실록 7 집 505면>

 

1462년(세조 8) 2월 25일

   장순빈(章順嬪) 파주(坡州)에 장사지내다.

 

 

 

 

 

7世 淮仲 회중

직 중에 작고하니 나라에서 정해진 법에 따라 미두(米豆) 20석을 내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잔해고문진보지(箋解古文眞寶誌)」가 있다.

   묘는 오랫동안 실전되어 종손 응교 세백(世白 1748~1824)이  1817년  사우를 세우고경덕사(景德祠)라 이름 지었

 

 

다.  후손 세마 필효(必孝)가 글을 짓고 썼다. 1824년 후손 주영(冑永)이 상주시 신봉동 현 위치로 중건하였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자좌(子坐)에 있다. 1958년 두영(斗永), 재락(在洛), 석희(奭熙), 도희(道熙)가 적성으로 지석(誌石)을 찾아 다시 환봉하였다.  

8世 安福 안복

의정  공도공(恭度公) 문화(文和), 증조부는 전공판서 심(深), 외조부는 부윤 안동 권숙(權肅)이다.

  묘는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손좌(巽坐)에 있다. 묘석이 있다.

  1970년대에 묘역 태반이 군부대에 징발되고 재사를 옮기라

 

 

는 명이 있어 1980년  가을구파(九派) 후손이 파보를 발간하기로 결의하고 1985년 가을 묘역을 정화하고 비를 다시 세웠다. 13세손 계흠(桂欽)이  추도문을  짓고  방후손 성균과 전학 정희(正熙)가 글씨를 썼다. 후손 수동(秀東)의 협찬으로 1998년 한글로 된 세적비를 세우고 세적비문은 진주강씨참판공 세적비문편찬위원회에서 지었다

 

 

 

 

 

9世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3

 

 

通溪公(휘 淮仲) 유운(遺韻 남긴 시)

 

旅牕簷雨故難聽 여관에서 빗소리 듣기가 괴로운 것은

況復斑衣趨鯉庭 색동옷 입고 부모님 계신 곳에 가고파서다

夢似秋雲歸不住 꿈은 가을 구름같이 돌아가기를 멈추지 않으니

愁隨春酒醉無醒 시름은 봄 술에 취하여 깸이 없어라.

江山此日頭將白 이곳에서 오늘날 나의 머리 희려 하니

骨肉何時眼更靑 형제를 어느 때에 다시 반갑게 볼 것인가

宦路險夷曾歷識 벼슬길 험난한 줄 일찍 알았다면

是身天地一浮萍 이 몸은 천지의 한낱 부평초인걸.

 

 

7世 淮仲 회중 1998년에 경덕재 중건

  1954년 통계공파보를 발간하여 비와 재각을 다시 세웠다. 신도비명은 안동 김윤동(金潤東)이 짓고 묘표(墓表)는 후손 맹희(孟熙)가 지었다. 행장은 후손 신혁(信赫), 경덕재기는욱원(旭元), 재각 상량문은 봉희(鳳熙)가 지었다. 1977년 경북 상주 경덕사(景德祠)가 봉강서원(鳳崗書院)으로 승격되

 

   

어 인천 장병규(張炳逵)가 글을 지었다. 1990년 후손들이 힘을 모아 서원을 중건하여 묘역을 정화하고 석의를 갖추었다.  진성 이원영(李源榮)이  중건기를 지었다. 1998년 11월 22일 후손 민창(玟昌), 신복(信福) 등이 정성을 다하여 경덕재를 중건하였다.

8世 安命 안명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을 잘 모셨다. 부모님 사후에도 예를 다하고 살아생전처럼 받들며 시묘(侍墓)하여 1450년 나라에서 효자 정려(旌閭)를 내렸다. 여지승람(輿地勝覽)과 해동삼강록(海東三綱錄), 진주읍지(晉州邑誌)에 사적이 실려 있다.

 

 

  묘는 실전하여 김제군 백산면 송하리에 봉단을 세웠다.

  배위는 죽산 안씨(安氏), 아버지는 참봉 수(洙)

 

 

 

9世

 

 

 

 

 

 

 

                     효자공(휘 안명) 단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3

 

 

5世 君寶군보

 

 

 

 

 

 

 

통계공 배위 전주최씨의 조부 최을의(崔乙義)

?~1392(태조 1). 1375년(우왕 1) 이인임(李仁任)을 해하려고 모의하였다 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고, 1385년 우왕이 태묘(太廟)에 분황(焚黃:나라에서 관직이나 시호를 내리면 그 내린 명령을 누런 종이에 옮겨 써서 선조의 사당 앞에서 태우고 제사를 드리는 것)하는 제사를 지낼 때 동지밀직으로서 제사에 쓴 고기를 장부(張溥)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공양왕 초에 밀직사에 이르렀으나, 1392년(공양왕 4) 이성계(李成桂)가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하고 정부를 개편할 때 경상도에 유배되었다가 조선 개국과 함께 배소에서 죽었다.

 

6世

 

 

 

 

 

 

 

7世 淮仲 회중

   

  배위는 의령 남씨(南氏), 1407년 별세, 1남을 길렀다. 아버지는 판사(判事) 징(徵), 통계공 묘의 왼쪽에 있다.

  배위는 전주 최씨(崔氏) 1413년 혼인, 아버

 

 

지는 통정대부 지성주사(知星州事) 영(寧). 할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 완성군(完城君) 을의(乙義), 증조할아버지는 전교서승 사검(思儉), 외할아버지는 판사 남양 홍보현(洪普賢)이다.  

  묘는 고양군 덕수(지금의 고양시 오금동 일대)인데 잃어버려 통계공 묘 우측에 봉단을

세웠다.

 

1960년(경자년) 통계공파보 발간

거액 헌성자 명단

  신각(信珏) 대전 100만환

  봉희(鳳熙) 칠곡 100만환

  순찬(淳璨) 제주  30만환

              통계공 재각 경덕재<경기도 고양시>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3

 

 

5世 君寶군보

 

 

 

 

 

 

 

 

6世

 

 

 

 

 

 

 

7世 淮順 회순

  자는 숙보(叔父), 사재소감(司宰少監)을 지냈다.

  배위는 전씨(全氏), 아버지는 이(理)

 

 

 

 

 

8世

  1429년(세종 11) 기유 식년시 문과 동진사(同進士)에 급제하여 1433년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을 지내고 1440년(세종 22) 예산현감(禮山縣監), 그후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묘는 논산군 가야곡면 함적리 갈마산 원대동 갑좌(甲坐)에 있다. 은진에 살기 시작했다.

 

 

  배위는 정부인 완산 이씨(李氏)

  묘는 쌍분이다.

 

 

     ▼ 지중추부사공(휘 의) 묘

9世 應亨 응형

9世 응정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4

 

 

5世 君寶군보

 

 

 

 

 

 

 

 

6世

 

 

 

 

 

 

 

7世 淮順 회순

 

 

 

 

 

 

 

           

사위  尹 汴 윤변

  무송인, 증 중추부사, 아버지는 도사 강(江), 아들은 문과 직제학. 사위는 혜령군(惠寧君) 지(祉), 사정 권계우(權繼祐), 현감 송관(宋觀),

 

 

 

 

 

 

9世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4

 

 

5世 君寶군보

 

 

 

 

 

 

 

6世

 

 

 

재신공(휘 회숙) 묘→

 

 

 

7世 淮叔 회숙

  자는 정보(正父, 또는 正輔), 제위장군(諸衛將軍), 혹은 재신(宰臣)을 지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진주 금산(金山)에 은거하였다. 1406년(태종 6) 외방에 유배되었으나, 태종이 누차 불러 낙천(洛川), 지함안군사(知咸安郡事)를 역임했다.  

 

   

  묘소는 진주시 상대동 후도곡(後桃谷) 임좌(壬坐)에 있다. 후손 신구(信九)가 적성을 다하여 다시 찾았다.

  배위는 정부인 남양 홍씨(洪氏) 무육, 아버지는 세준(世俊)

  묘소는 같은 곳 간좌(艮坐)에 있다.

 

8世 孝孫 효손

  자는 효원(孝元), 생원. 양친을 극진히 모셔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배위는 벽진 이씨(李氏),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평청공 약동(約東), 조부는 현령 증 호조판서 덕손(德孫), 외조부는 부사 전주 이지명(李知命) 묘는 선영 아래 합장했다.

 

 

 

  

 

 

 

9世 國老 국로

9世 國沖 국충

 

 

 

 

 

사위 鄭 伸 정신

  연일인, 사윤(司尹), 아버지는 종본(宗本), 조부는 포은 정몽주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4

 

 

5世 君寶군보

 

 

 

 

 

 

 

6世

 

 

 

 

 

 

 

7世 淮叔 회숙

  배위는 정부인 순흥 안씨(安氏), 아버지는 찬성사 소(沼)

  묘소는 공의 묘와 나란히 있다.

 

 

 

 

 

 

 

 

 

8世 孝昆 효곤

  자는 인원(仁元)

  배위는 장수 황씨(黃氏), 염(琰)의 따님이다.    묘는 실전하였으며 정려가 있다.

사위 金 健 김건 경주인, 부사

 

 

 

8世 仲德 중덕

  자는 중원(仲元). 방어총관으로 함경도에 들어가 연대(烟臺)를 만들어 야적들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알리어 백성의 폐해를 미리 막아 이것을 강중덕연대(姜仲德烟臺)라 부른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회령 오봉산에 은거했다.   

   묘는 회령군 벽성면 봉산 비석동 유좌(酉坐), 표석이 있다. 남원 보절 성남 낙동에 단을 세웠다.

 

 

 

 

 

 

9世 복정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5

 

 

5世 君寶군보

 

 

 

 

 

 

 

 

6世

 

 

 

진원군공(휘 회계) 단비→

 

 

 

7世 淮季 회계         공양왕 사위

 1364년~? 자는 계보(季父), 1388년(우왕 14) 별장(別將) 재직 중 김여지(金汝知) 방에 등재하여 1390년(공양왕 2) 고공좌랑(考功佐郞)으로 세자 석(奭)의 시학(侍學)이 되었고, 이후 공양왕의 딸 경화궁주(敬和宮主)와 혼인, 진원군(晉原君)에 봉해졌다. 고려가 망하여 공양왕이 폐위되자 동서 우

 

    

성범(禹成範)과 함께 참화 당했다. 그러나 대비의 간청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가솔을 이끌고 개성에서 500여 리 떨어진 평안북도 안변군 배화면 수악리에 피신하여 이름을 회조(淮祖)로 고치고 아들 염(溓)의 효성으로 95세까지 살았다는 이야기와 고려사에는 공양왕 4년 공양왕을 폐하고 원주로

8世 濂(廉)

  음직으로 통훈대부, 사재령(司宰令)

  묘는 안변군 배화면 구악리 수재봉 서쪽 산기슭 용우골 간좌(艮坐)에 합장했다.

  배위는 숙인 양천 허씨(許氏)이며 용진현령 미(微)의 따님이다.

 

 

8世 胥祐 서우

  고려말 상서예부(尙書禮部) 시랑(侍郞)으로 재직중 역성 혁명이 일어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해 영평현(永平縣) 동쪽 20리 되는  심곡에 은거하며 문밖도 나가지 않고 북쪽 하늘은 쳐다보지 않았다. 묘는 나주군 다도면 시랑 심곡산 기슭 임좌(壬坐)

9世 福海 복해

9世 巨道 거도

 

 

 

 

 

9世  

9世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6

 

 

5世 君寶군보

 

 

 

 

 

 

 

 

6世

 

 

 시랑공(휘 서우) 묘→

 

 

 

 

7世 淮季 회계

내보낼 때 단양군 우성범, 진원군 강회계를 회빈문 밖에서 참했다는 소리를 이태조가 대비전에서 듣고  대노하며 그것을 멈출 것을 명했으나 미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묘는 안변군 배화면 송산리 해좌(亥坐)에 있으며 나주군 남평면 심치리에 봉단을 세웠다.

 

   

  배위는 공양왕(恭讓王) 딸 경화궁주(敬和宮主)이며, 외할아버지는 창성군(昌城君) 교하(交河) 노정(盧禎)이다.

 

 

 

8世  

  1382년~1464년(향년 83) 1398년 판병조사, 1419년(세종 1) 형조판서, 1450년 안변으로 퇴거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월성 김씨(金氏), 1384년에 태어나 1468년에 별세하였다. 이부상서 한인(漢仁)의 따님이다. 묘는 사동 격산에 있다.

 

8世  순     

  묘는 상도슬동 집 뒤 상지 위 산기슭에 큰 묘가 있는데 강씨 성의 묘라 한다. 묘 아래에  창고가 있다.

 

 

 

9世 仁周 인주

9世 和周 화주

 

 

 

 

 

9世 思敏 사민

9世 思轍 사철

 

 

 

 

 

 

진주강씨

 

박사공 6세

 

良僖公派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6

 

 

5世 君寶군보

 

 

 

양희공(휘 서) 묘→

 

 

 

6世

  1344년~1419년 자는 면여(勉汝), 호는 청은(淸隱). 음직으로 벼슬에 나아가 통례를 거쳐, 사인, 군기시 소윤, 판군기감사, 친어군(親禦軍) 상호군이 되었다, 장인 이인임(李仁任)의 사거 후 밀직부사(密直副使) 자리에 물러났다가 1375년(우왕 2) 화척(禾尺)이 떼를 지어 거짓 왜구가되어 경상도

 

    

영해군에 침입하여 관아와 민가를 노략질하자 판밀직 임성미(林成味)와 함께 나아가 남녀 50여 명과 말 200여 필을 추포하여 공을 세웠다. 1384년 문하평리, 1391년(공양왕 3) 경상도병마절제사, 1403년 판승령부사, 1403년 판한성부사, 1415년 검교 의정부찬성사, 1416년 벼슬을 그만두었다.

7世

  1383년 (우왕 9) 종부시승(宗簿寺丞), 그 후좌랑(佐郞)을 역임했다.  

  묘는 경기도 장단군 고랑포에 있었으나 실전했다.

  배위는 의인 청주 한씨(韓氏), 아버지는 도평의사사 문렬공(文烈公) 상질(尙質), 할아버지는 청청성(淸城君) 문경공

 

   

수(脩), 외할아버지는 시중(侍中) 충렬공 경주 이성림(李成林)이다.

  묘는 합장했지만 실전되었다.

 

 

8世

 

 

 

 

 

 

 

9世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7

 

 

5世 君寶군보

 

 

 

 

 

 

 

 

6世

1418년 태종이 좌의정(左議政)에 제수하였으나  병을 칭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호는 양희(良僖). 6촌 동생 손기(孫奇)가 쓴 제문과 만사가 있다.

  묘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암현리 산83번지 유좌(酉坐)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후손 두성(㪷聲)이 성심을 다하여 1954년 

 

   

다시 찾았다. 2006년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마중리 산 166-6번지에 초혼하여 이장하고 비를 세웠다.

  배위는 정경부인 성주 이씨(李氏), 아버지는 시중 광평부원군 문숙공(文肅公) 인임(仁任), 할아버지는 시중 경원공(敬元公) 보(藵),  증조할아버지는 성산후(星山侯) 문렬공 조년

7世

  1365년~1426년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재임 중 고려가 망하자 진주로 낙향하였다가 전남 강진군(康津郡) 금여리(金輿里)로 이거하였다.

  묘는 강진군 금여리(金輿里) 계봉(桂峯) 을좌(乙坐)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봉상동(鳳翔洞)에 단을 세웠다.

 

   

  배위는 하동 정씨(鄭氏), 아버지는 참의 석린(錫麟)

  묘는 합장했다.

 

 

 

8世 信德 신덕

  1387년~1442년(향년 56) 사헌부 장령을 거쳐 집의를 역임했다.  

  묘는 금여 봉상동 상산 묘좌(卯坐)

  배위는 숙인 도강 김씨(金氏)이며 1444년에 별세하였다. 아버지는 참판 휼(鐍)

  묘는 쌍분이다.

 

 

9世

9世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7

 

 

5世 君寶군보

 

 

 

 

 

 

                            참판공(휘 주) 단

6世

(兆年)

   묘는 이장한 곳에 합장했다.

 

 

 

7世

  ?~1441년, 1423년 상호군(上護軍)으로 등용, 1430년 예조참의(禮曺叅議), 이어 예조참판(禮曺叅判), 이조좌참찬(吏曹左叅贊) 1432년 한성부윤(漢城府尹)을 거쳐 동년 절일사(節日使)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1433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뒤에 이조와 공조에서 참판을 지냈다.

1437년 동지중추 원사(同知中樞院事)를 거쳐, 1440년(세종

 

   

22년) 인수부윤(仁壽府尹)이 되었다. 묘는 실전, 2001년 용인에 설단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수안 이씨(李氏), 아버지는 정당문학 염(恬), 할아버지는 수춘군 수산(壽山), 외할아버지는 성산군 성주 이원구(李元具)

 

8世 帶生대생

  조봉대부 사정(司正) 역임

  배위는 숙인 해평 윤씨(尹氏)

 

 

 

 

8世 瑞生 서생

  직장(直長)을 거쳐 이조좌랑을 역임했다.

 

 

 

 

9世

9世

9世

 

 

 

9世 繼宗 계종

9世 繼山 계산

9世 麟玉 인옥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8

 

 

 

양희공 장인 이인임(李仁任)

?~1388(우왕 14). 문음(門蔭)으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된 후 1358년(공민왕 7)에는 좌부승선(左副承宣)이 되었다. 1363년 삼사우사(三司右使)․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좌시중(左侍中)을 지내고,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1374년(공민왕 23)잠시 면직되었다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되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참판공(휘 주) 장인 이염(李恬)

?~1403(태종 3).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내고 추충보절익대좌리공신(推忠保節翊戴佐理功臣)에 봉해진 수산(壽山)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1392년(공양왕 4)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는데, 연회에서 만취되어 왕에게 중방의 처벌을 강요하다가 순군(巡軍)에 갇히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도움으로 합포(合浦)에 장배(杖配)되는 데 그쳤다. 그뒤에 경상도절제사가 되고, 조선건국 후에는 정당문학(正堂文學)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7世

  일명 회여(淮餘) 1370년 12월 20일~1404년, 자는 운수(雲叟). 공양왕 때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했다. 이성계 즉위 후 이방원의 일당에 의해 공목공(휘 시)과 함께 외방(外方)인 함평 나산에 유배당했으며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부터 후손들이 그곳에 살게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전주 이씨(李氏), 아버지는 군사 중명(仲明)

  묘는 합장

 

 

 

8世 明德 명덕

  1389년~1448년 자는 국일(國逸) 호는 이인정(里仁亭). 1411년(태종 11)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에 급제하여 고령현감,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헌납 겸 서장관을 역임했다.    묘는 함평군 나산면 남쪽 산기슭 해좌(亥坐)

 

 

  배위는 숙인 광산 김씨(金氏), 부사 백린(白麟)의 따님이다.

  묘는 합장했다.

 

9世 宜卿 의경

9世 寀卿 채경

사위 李承文 이승문

사위 李允昌 이윤창

 

사위 趙逢辰 조봉진

사위 崔 淵 최연

사위 鄭次恭 정차공

  동래인

 

 

 

4 昌貴

3 師瞻

2 引文

파시조 啓庸

 

 

 

 

 

 

 

1-18

 

 

5世 君寶군보

 

 

 

 

 

 

 

6世

 

 

 

 

 

 

 

사위 崔士康 최사강

  전주인(全州人), 문과 좌찬성 경절공. 아버지는 좌찬성 평도공 유경(有慶). 아들은 증좌의정 승녕(承寧), 사위는 함령군 이인(李裀), 부사 안동 권총(權聰), 청풍군수 진주 강혜(姜徯)

 

 

 

 

8세

 

 

 

 

 

 

 

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