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라의 삼국 통일

  

    삼국은 7세기에 접어들어 서로의 영토를 뺏고 빼앗기는 등 치열한 영토 전쟁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고구려는 수·당의 대대적인 공격을 막아내면서 동북 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하였다. 백제도 신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빼앗았다. 위기 의식을 느낀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였고,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신라까지 지배하려고 하자, 신라는 당나라를 몰아 내기 위한 전쟁을 치러, 마침내 대동강 이남의 땅을 차지하여 최초의 민족 통일을 이룩하게 되었다.

 

  

태종 무열왕릉|경북 경주 태종 무열왕의 외교적 성과와 국가 체제의 정비는 산국 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1]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삼국의 대외 관계

  삼국은 국가 발전 과정에서 자기 나라의 이익과 한반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대립하거나 연합하였다. 그러면서도 세가 불리할 때는 중국과 외교 교섭을 벌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데 잘 활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국은 중국과 평화적인 교섭을 벌이기도 하고, 중국의 침략에 과감히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로서 오랜 분열을 겪고 있었으며, 삼국은 저마다 이를 외교적으로 활용하였으며, 북방 민족이나 왜 등과 교류하였다. 그리고 자기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정치적, 문화적 이익을 얻었다.

  6세기 중엽에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으로고립되었다. 고구려는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백제는 전사한 성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신라를 협공하였다. 두 나라는 중국 교류의 관문인 신라의 당항성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590년 고구려 영양왕 1년

  고구려, 수(隋)가 진(陳)을 멸망시킨 소식을 듣고 국방을 엄히 하였다.  

  ◇10월-평원왕이 죽고 영양왕(영陽王) 즉위. 온달(溫達) 전사.

 

597년 고구려 영양왕 8년

  ◇5월-고구려 수에 사신을 보냈다.

  ◇9월-수나라 문제, 고구려에 국서(國書)1>를 보냈다.

 

 

대흑산 산성|중국 요령성 대련  천리장성의 남쪽 끝인 비사성으로 추정된다.

  1> 수 문제의 국서(國書) "짐(수나라 문제)이 하늘의 명을 받아 온 천하를 다스리면서 고구려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긴 것은 백성을 잘 다스려서 사람으로서 그 천성을 다하게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使節)을 보내 조공하였으나 비록 번부(藩附 황국의 울타리 노릇을 하는 속국)라 일컫기는 하지만 성의가 부족하다. 고구려왕은 이미 짐의 신하로 짐의 덕을 배워야 함에도 말갈족을 핍박하고 거란족을 굴복시켜 휘하에 두어 신첩으로 만들고 짐에게 조공하는 일을 막다니 이 어찌도 해가 심한가, 작년에는 몰래 병사를 늘리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은 무엇을 뜻함인가? 고구려가 영토가 좁고 백성이 소수이니 고구려왕을 내쫓고 반드시 다른 속관(屬官)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씻고 행동을 바르게 하면 짐의 충신이니 어찌 속관을 두랴. 고구려왕은 다시 한 번 생각하라, 요수(고구려 영토 안에 있는 강)가 넓다한들 장강(양자강)과 비교할 것이며, 고구려 병사가 많다한들 진(陳)나라 병사만도 못하다. 짐이 마음만 먹으면 한 명의 장군을 보내어 힘들이지 않고 고구려를 멸할 수 있지만 순순히 타이르니 고구려왕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이 무렵, 오랜 분열과 혼란을 거듭해 온 중국이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589년). 이에 국가적인 위기에 빠져 있던 신라는 수나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한편, 수나라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같은 처지에 놓인 유목 민족인 돌궐과 연합하여 먼저 수나라 요서 지방을 침공하였다. 이에 수문제는 대군을 보내 고구려에 쳐들어 왔으나 고구려는 임유관에서 잘 막아내었다.

  그리고 신라와 적대 관계에 있던 백제는 고구려와 힘을 합쳐 신라에 맞섰다. 이리하여 6세기 말 동북 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고구려, 백제, 왜, 돌궐을 연결하는 남북 세력과 신라, 수(당)를 연결하는 동서(東西) 세력간 다툼의 양상을 띠었다.

 

살수대첩

  앞서, 고구려는 수의 침입을 미리 막고 전략상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먼저 랴오허(요하) 강을 건너 전략적 요충지인 요서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에 수 문제가 침공해 왔으나, 고구려는 이를 물리쳤다.(임유관 전쟁)1>

  그 후, 수 양제가 황제에 올라 천하의최고 통치자임을  내세우고 동북 아시아 의 강국 고구려까지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줄기찬 공격을 받아 고전하던 신라는 이 기회를 이용하야 원광을 수에 보내어 군사 원조를 요청하여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 보려하였다.

                                    

1> 임유관 전쟁-진주강씨 도시조 강이식 장군이 참전하여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이 사실은 보책과 한말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상고사에 실려 있다.

 

598년 고구려 영양왕 9년

  ◇2월-고구려, 말갈군사 1만으로 요서(遼西)를 침공하였으나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沖)이 기습하여 퇴군하였다.

   ◇9월-이에 수(隋)의 문제(文帝)가 왕세적(王世績)을 원수로 하여 수·육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임유관전투(臨關戰鬪)1>에서 강이식(姜以式)43>에게 참패하고 물러갔다.

600년 고구려 영양왕 11년

  ◇9월-대학박사(大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이 옛 역사 유기(留記) 1백권을 정리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고구려,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 만듦.

608년 영양왕 19년

  ◇2월-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을 기습하였다.

살수대첩(민족기록화) 고구려는 중국 수·당의 침략을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612년에 수 양제는 직접 11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먼저 요동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이 수의 식량 보급을 차단하고 지구전을 펴는 바람에 실패하고, 이번에는 바다를 건너 평양성 부근까지 침략한 수군(水軍)이 또한 참패하자, 초조해진 수 양제는 30만 명의 별동대를 투입하여 곧바로 평양성을 치게 하였다.

  수나라 우중문 등이 거느린 별동대는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에 말려들어 평양성 부근까지 진군하였다가 크게 지치고 굶주려 결국 후퇴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 틈을 타서, 적군이 살수를 건널 때 그 주력 부대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리하여 별동대 30만 명 중에서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겨우 27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싸움이 유명한 살수 대첩이다(612년).

  한편, 대동강으로 침입한 수군도 장군 건무가 격퇴하였다.

  그 뒤에도 고구려는 수나라의 공격을 몇 차례 더 물리쳐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수나라는 무리한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와 내란으로 결국 망하고 말았다.

 

 

 

 

 

 

 

608년 영양왕 19년

  ◇4월-신라의 우명 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았다.

 

612년 고구려 영양왕 23년

  ◇1월-수(隋)의 양제(煬帝)는 부왕 문제(文帝)의 원한을 풀고자 고구려를 침략하니 수.육군 1백13만 3천 8백이고 수송자만도 이 배가 되었다. 그러나 을지문덕의 활약으로 적은 살수에서 참패하고 돌아갔다.

 

613년 영양왕 24년

  ◇4월-수 양제가 다시 요수(遼水)를 건너 침략하였으나, 요동성에서 굳게 항쟁하니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614년 영양왕 25년

  ◇4월-다시 수(隋)의 침략이 있었지만,

  ◇7월-고구려왕이 화친하여 돌아갔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

 

안시성 싸움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당 고조는 수나라의 멸망을 교훈삼아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초기에는 고구려와 화친을 꾀하였다. 수와 전쟁할 때 잡힌 포로들을 서로 교환하기로 하여 고구려는 1만여 명의 포로를 중국에 송환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이 즉위한 뒤부터는 두 나라의 관계가 점차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라의 기틀이 잡히자, 당 태종은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주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는   한편, 고구려에도 압력을 가해 왔다. 이에 고구려는 당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랴오허 강 주위의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쌓고 당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 때,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을 제거하였다.

  이어 연개소문은 왕의 조카를 보장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어

 

618년 고구려 영양왕 29년

  ◇3월-수 양제가 강도(江都)에서 피살되었다.

   ◇5월-이연(李淵)이 황제를 칭하였다.(당 고조)

   ◇9월-영양 열제가 승하하였다. 27대 영류왕(榮留王-建武) 즉위.

  

 

고구려와 당의 전쟁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고구려 영양왕의 즉위년(618)에 중국에서는 수(隋) 나라를 이어 당(唐) 나라가 건국되었다. 고구려로서는 수 나라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함과 아울러, 새로 등장하는 당 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당 나라도 국내의 완전한 통일 작업과 민심의 수습, 그리고 돌궐의 위협에서 벗어나기까지는 고구려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여야 하였다. 이에 양국은 외교 사절을 자주 교환하고, 고구려와 수 나라의 전쟁시 사로잡힌 포로들을 622년(영류왕 5)에 교환하는 등 현실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해나갔다.

  그러나 당 나라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아가서 630년 동돌궐을 격파하고, 640년 고창국(高昌國)을 복속시키면서 양국 간에는 점차 긴장이 고조되어 가는 관계에 이르렀다.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연개소문은 강경한 대외 정책을 써서 신라와 당에맞섰다. 백제와 힘을 합해 신라에 대한공격을 한층 더 강화하였으며, 신라에대한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당의 간섭을 단호히 물리쳤다.

  이에 당은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삼아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당 태종은 육군과 수군으로 양쪽에서 공격해 왔다. 먼저, 랴오허 강을 건너 요충지인 요동성, 백암성 등을 차례로 함락한 후,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강운기(姜雲紀)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642년 고구려 보장왕 1년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寶藏王)을 옹립(∼647). 신라,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에 군사 요청.

 

643년 고구려 보장왕 2년

  당주(唐主)가 행군총관 강행본(姜行本)을 안라산에 보내어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를 만들 게 하였다.

  

 

 삼년 산성|충북 보은  5세기에 쌓은 돌성으로 3년 만에 완성하였다.

  이 성은 신라가 서북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전초 기지의 구실을  하였다.

 

  안시성은 조그마한 산성이었지만  서쪽 변경에 있는 전략적으로  요동성(遼東城) 다음으로 중요한 요새였다. 고구려에서는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이 이끄는 고구려·말갈 연합군대 15만 명이 출병하였으나 당나라 군대에 패배하였다. 안시성은 당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하루에도 6, 7회의 공격을 받았으며, 마지막 3일 동안 총공격을 받았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안시성에서는 성주를 비롯한 모두가 굳세게 저항하여 끝내 당군을 물리치고 성을 지킬 수 있었다(645년).

  그 후에도 고구려는 당의 침입을 몇 차례 받았으나 이를 모두 물리쳤다. 고구려가 수·당과 거듭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잘 훈련된 군대와 성곽을 이용한 견고한 방어 체제, 탁월한 전투 능력 및 요동 지방의 철광 지대 확보 그리고 굳센 정신력에 있었다.

  수·당의 침입에 맞서 고구려가 거둔 승리는 우리 역사상 매우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수·당은 고구려를 정복하여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들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지만, 1980년대부터 중국은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어 새로운 역사 침입이 시작되고 있다.

  안시성은 고구려가 멸망한(668) 후 검모잠(劒牟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부흥운동의 요동지역 중심지가 되었으나 671년 7월 당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다.

 

 

645년 고구려 보장왕 4년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10만 대군으로 고구려 공격을 개시.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한 당나라 군대를 격퇴. 신라,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공격. 백제, 신라의 7성을 공략.

646년 보장왕 5년

  고구려, 천리장성(千里長城) 완성.

 

647년 보장왕 6년

  ◇2월-당나라 이세적, 고구려에 침입

 

 

 

  

백암성|중국 요령성 동탑  강을 끼고 절벽에 쌓은 전형적인 돌성이다.

 

[3]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과정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가 중국과 598년 임유관에서 처음 크게 충돌한 이후 망할 때까지 수·당군과 치열한 전쟁을 계속하여 국력이  심하게 소모되었고 내분까지 겹쳤다.

  한편 백제 의자왕은 즉위부터 선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신라를 자주 공격하여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위기에 처한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신라에서 당으로 가는 교통로를 끊기 위해 당항성을 공격하였다.

  외톨이가 된 신라는 김춘추를 당에 보내어 나·당 간의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에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과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다.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당군과 함께 사비성을 함락하였다(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 신라와 당은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당군은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는 이를 잘 방어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진데다가,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자 지도층 안에서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이 기회를 틈타 나·당 연합군은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년). 한편,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은 부흥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660년 신라 무열왕 7년/백제 의자왕 20년

  신라 김유신,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는 황산벌에서 계백(階伯)장군이 전사(?∼)하고,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항복하였다.<백제 멸망>

661년 신라 문무왕 1년/백제 의자왕 21년

  ◇1월-백제 부흥군,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부흥 운동 전개.

  ◇7월-당나라 군대 고구려를 공격. 압록강에서 격전. 신라, 태종무열왕 죽고(?∼), 문무왕(文武王) 즉위(∼681). 신라왕이 고구려 정벌에 나섬.

662년 신라 문무왕 1년/보장왕 21년

  고구려, 연개소문이 사수(蛇水)에서 당나라군을 대파. 당나라군 평양성을 포위. 신라, 백제 부흥군 토벌.

663년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 백강(百江)에서 일본 구원군을 대파.

  ◇9월-부여 풍(扶餘豊)은 고구려로 망명.

666년 고구려 보장왕 25년

  고구려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 형제간 불화

  ◇8월-난건(男建)이 막리지가 되고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淵淨土)가 신라에 항복.

 

나·당 전쟁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은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준다는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백제에 웅진도독부, 669년에는 고구려에 안동 도호부를 세워 군대를 주둔시키고, 신라에도 계림 도독부를 설치하여 지배하려고 하였다.

 

강수손(姜秀孫) 우부위 대장군

강박(王卜) 정동대장군

강극용(姜克庸) 태사 태보

강택인(姜擇仁) 밀직 교도

 

667년 신라 문무왕 7년/ 보장왕 26년

  ◇8월-신라, 문무왕이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9월-고구려, 당 나라의 공격받음.

668년 보장왕 27년

  ◇9월-나·당 연합군이 평양성을 포위. 고구려의 보장왕이 항복함으로써 고구려 멸망.<고구려 멸망>

 

 

  이에 신라는 당군을 몰아 내기 위한 전쟁에 나섰다. 먼저, 신라는 백제의 옛 땅을 찾기 위해 고구려의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다. 고구려 유민들을 이용하여 당 침략군을 몰아 내려고 한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왕족 안승으로 하여금 금마저(전북 익산)에 보덕국이라는 나라를 세우도록 하였다. 아울러 신라군은 당군이 주둔하고 있던 사비성을  함락하여 웅진 도독부를 없애고 백제의옛 땅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그 후, 당군은 말갈군과 거란군을 앞세워 계속 침범하였으나, 신라는 장기간의 끈질긴 항쟁으로 이들을 물리쳤다. 신라군은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크게 물리쳐 군마 3만 마리와 많은 무기를 빼앗았으며, 당의 수군을 금강 하류 기벌포에서 격파하였다. 이렇게 되자, 당은 675년 마침내 안동 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겨 한반도로부터 물러나 신라는 드디어 대동강 이남 땅에서 당군을 완전히 몰아 냄으로써 통일을 이룩하였다(676년).

  신라의 삼국 통일은 그 과정에서 중국 세력인 당의 도움을 얻었다는 점과 대동강 이남 지역에 한정되었다는 점에 한계가 있으나 우리 역사상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우리 민족이 이룬 최초의 통일로서 새로운 민족 문화를 이루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신라가 당의 야욕을 물리치고 통일을 완수하였다는 사실은 신라인의 자주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강진(姜縉) 진양후(晉陽侯) 활동 연대 추정

 

백제, 고구려의 부흥 운동과 나·당 전쟁

 

 

 

남한보에 실린 진양후 강진의 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