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次 高隋戰爭(臨유關 戰捷)에서의 장마

 

                              변희룡 부경대학교 대기과학과교수

(서울대학교 기상학 전공 이학박사)

 

다음 글은 필자의 양해하에 일부 전재했습니다. 필자는 密陽 卞氏입니다. 임유관 전첩을 기상학적 차원에서 다루었지만 우리에겐 여늬 역사 논문보다 값진 글입니다. 다만 끝 부분에서 강이식 장군이 귀화 인물이라고 단정한 것은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 <편집자주>

초록

 

   고구려와 수나라의 제 1차 전쟁은 정사의 기록이 부실하여 추측과 논쟁이 난무하는 상태이다. 이에 관한 작금의 기록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다음 네 가지의 결론을 얻었다. 첫째, 장마가 전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정사의 기록과는 달리, 전쟁은 장마만으로 인해 종료된 것이 아니고 두 군대의 접전이 있었다. 셋째, 이 전쟁은 임유관을 주무대로 전개되었다. 넷째, 당시 고구려 군은 우연히 장마의 혜택을 입은 것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장마를 전투에 이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다섯째, 이 전쟁의 지휘관이 강이식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미완으로 남아 있다.

 

1. 서론

 

   국가의 존망이 걸린 대규모 전쟁에서 일기변화가 승패의 결정적 요인이 된 사례는 많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 사례로 중국에서는 적벽대전, 곤양대전, 일본에서는 문영(文永)의 전쟁, 홍안(弘安)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여몽 연합군과의 전쟁, 유럽에서는 4차에 걸친 페르시아의 그리이스 침략 등을 들 수 있다 (卞熙龍, 1994). 이 사건들은 모두 역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기도 하고, 바뀌는 역사의 흐름을 정체시키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들보다 정치적, 군사적, 자연과학적으로 결코 가볍지 않은 사건이 고구려에서도 있었는데 아직 명확하게 조명되지 못하고 있어 그 인과를 정리하고자 한다. 수문제(隋文帝)의 고구려 침략과정에서 발생한 임유관 전첩(臨유關 戰捷)이 바로 그 것이다. 이 전투에서 장마가 우연히 승패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 아니면 계획적으로 장마현상을 작전에 이용한 것인지에 관하여는 아직까지 분석된 사례가 없었다. 전투가 정말로 있었는지, 전투장소가 어디였는지, 고구려 측 지휘관은 누구였는지, 그리고 전투당시에 장마현상이 정말로 발생하였는지 에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만약, 전투도 장마도 실존하였고, 또 고구려 군이 계획적으로 장마현상을 작전에 이용한 사례였다면 이 전첩은 전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 작품이다. 반대로 전투 중에 우연히 장마가 발생한 것이었다면, 천우신조의 한 역사가 한반도에도 있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에 관한 작금의 역사 기록은 대단히 혼란한 상태이다. 정사라고 인정되는 수서(隋書, 長孫無忌 등 636)와 삼국사기(三國史記, 金富軾, 1145 ; 金鐘權, 1960)의 기록이 부실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 부실함에 편승하여 정사는 아니지만 인정해야 할 만한 사료들이 많이 있는 것이 두 번째 원인이다. 관련된 기타 사료들을 분석한 결과, 작금의 역사서적의 내용 중에 정리되고 고쳐져야 할 중요한 부분들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2. 경위

 

2.1 당시 주변 정세

 

   서기 589년 주(周)나라를 멸망시키고 일어난 양견(楊堅)은 마지막으로 진(陳)나라까지 병탄하므로서 오랜 남북조 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이 양견이 곧 수(隋)나라의 문제(文帝)이다. 이 때 북쪽의 돌귈은 스스로 가한(Kahn, 可汗, 황제를 의미)이라 칭하는 자가 4명이나 될 만큼 분열되어 있는 시기였고 고구려는 이들과 동맹관계에 있었다. 돌궐, 중국 남쪽에 있는 만족 등과 함께 고구려도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는 있었지만 수나라에 대해 만만하지는 않은 존재였다. 더구나 광개토 대왕(廣開土大王) 이래로 해군력이 강화되어 동래(東來=山東城 登州) 이동과, 남해안까지의 재해 권을 장악하고 백제와 일본을 견제하고 있었다. 당시 신라와 백제는 마동과 선화의 결혼으로 사돈 국이 되어 좋은 관계였었다는 설화도 있다. 고구려는 또 진(陳)과도 친교가 깊었는데 진이 수나라에 멸망하자 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던 시기였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관계에 있었다는 기록(李基白, 1978, 1997)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2.2 전쟁 전후의 경위

 

   전쟁발발 과정을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申采浩 1905)에서는 "서기 597년, 곧 고구려 영양왕 8년, 수문제가 중국을 통일한지 8년 되는 해, 수문제는 먼저 고구려에 매우 모욕적인 국서를 보냈다. 국서를 받은 고구려의 영양왕은 수문제의 무례함에 대노하여 회답하려 하였다. 이에 강이식(姜以式)이 '이 같은 무례한 글에는 붓으로가 아니라 칼로서 회답해야 한다' 하고 주장하였다. 영양왕이 이를 받아 들여 강이식으로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침공을 시작하였다. 강이식은 먼저 예(濊, 수서에 나오는 말갈)병 일만으로는 만리장성 서쪽 영평부(永平府) 지방인 요서(遼西)를 쳐서 임유관(지금의 山海關, 요령지방의 고구려와 수나라의 국경요새)을 차지하고, 글안(契丹 선비족)병 수천으로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을 치게 하였으며, 자신은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전략 요충지인 임유관을 넘어 요서까지 공략하였다. 다음 해에, 요서총관 위충(遼西總管 韋沖)과 접전하고 거짓 패하여 임유관까지 후퇴하자 고구려군의 도발 소식을 들은 수문제가 대노하여 30만 대군을 발진하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한왕(漢王) 양양(楊諒, 문제의 넷째 아들)으로 하여금 임유관을 공격하게 하고, 수군(水軍)의 주라후(周羅喉)는 바다로 나오게 하였다. 이때 주라후는 평양으로 향한다고 헛소문을 내었는데 실제는 양곡을 수송하여 양양의 군사에게 군량을 대어 줄 목적이었다. 강이식은 고구려 수군을 보내 바다에서 수나라 수군을 대파시켰고 자신은 성곽을 굳게 지켜 출전치 아니하였다. 이에 요서의 유성(柳城)까지 나왔던 수나라 군사는 식량이 떨어지고 또 6월 장마를 만나 굶주림과 질병에 수없이 죽어갔다. 견디지 못한 수나라 군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강이식이 이를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전멸시키고 무수한 전리품을 얻고 개선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상고사는 수서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임할 수 없다 하여 대동운해(大東韻海), 서곽잡록(西郭雜錄) 등의 실전(失傳)된 야승적사료(野乘的史料)를 인용하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수서(隋書)는 "영양왕 9년에 말갈이 군사 일만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였다. 수나라의 영주총관 위충(韋沖)이 이를 방어하여 퇴각시켰다. 이에 수문제가 노하여 양양(楊諒)과 왕세적(王世積)을 행군도총관으로 삼아 수륙군 삼십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양양은 육군을 이끌고 임유관으로 진군하다가 홍수를 만나서 군량을 운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군사들은 굶주리고 질병에 걸렸다. 또 주라후는 해군을 이끌고 동래를 거쳐서 평양으로 쳐들어오다가 역시 풍랑을 만나서 군선이 많이 파선되었다. 그래서 9월에 퇴귀하였는데 군사가 십중팔구는 죽었다." 라고 만 기록한다.

 

   십팔사략(十八史略, 曾先之,1280?) 에는 "수륙 30만 대군이 식량부족과 풍토병으로 쓰러졌고 수군은 폭풍으로 배가 뒤집혀 산산이 흩어졌다. 열 명중 팔 구명은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고 한다.

 

   어느 기록을 따르더라도 장마가 수나라의 패퇴에 큰 영향을 미쳤음이 확인된다. 가장 큰 차이점은, 수서와 삼국사기는 수나라 군대는 천재지변 때문에 전투도 하지 않고 철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조선상고사는 고구려 군사의 활약에 의한 전승(戰勝)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수서와 삼국사기와는 달리, 십팔사략과 조선상고사에서 이용한 사료들은 정사로서의 가치를 의심받는 사료들이다. 그런데 수서나 삼국사기는 오기(誤記)와 의문점들이 발견될 뿐 아니라 누락된 부분이 많다.

  

3. 수서의 오기

 

3.1 국서 통보연대

 

   삼국사기에는 문제의 국서가 평원왕 말년인 32년 서기 590년에 보내진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수서에는 수문제 개황(開皇) 17년에 평원왕에게 보낸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수문제 개황 17년은 서기 597년으로 평원왕이 죽은지 7년이 되는 때이므로 서로 맞지 않는다. 이 점은, 수서의 기록이 자국의 연대를 착오하였다고는 보기 어렵고 다른 나라의 왕 이름이나 왕대 (王代)를 착각할 소지는 있다고 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수서의 "평원왕"이란 글에 집착하여 연대를 착오한 듯하다. 따라서 연대는 수서의 기록을 따르고 고구려의 왕대는 영양왕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영양왕 즉위 후 수나라는 영양왕에게 높은 벼슬을 주는 등 교류가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아도 문제의 국서는 평원왕 때 전달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수서의 이러한 오기에 기인하여,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현재까지 발간되는 많은 역사서적에서는 국서 통보연대를 평원왕 32년으로 기재하거나 연대를 기재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또 고구려의 요서에 대한 선제공격은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한 기록도 있다(李基白, 1978 ; 震檀學會, 1959). 韓國文化硏究所(1994)나 崔實光 (1989)의 진양 강씨(晉陽 姜氏) 편에는 이 국서를 ( 임유관 전첩을 초래한 국서가 아니라) 살수대첩을 초래한 국서라고 하는데 이는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4. 수서의 기록 부실

 

4.1 수문제의 패인

 

   수나라의 국력을 기울인 삼십만 대군이 대패했는데 그 원인으로 천재지변만 기록했다는 것이 첫 번째 의문이다. 임유관은 고구려 영토가 아니라 수나라 영토였다 (Fig. 1). 천재지변과 풍토병이 생겼다면 원정군인 고구려군의 피해가 더 클 가능성이 있는 데, 오히려 수나라 대군이 고구려 땅을 한치도 밟아보지 못하고 전멸했다는 점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수나라 군대는 천재지변에 간단하게 전멸할 만큼 오합지졸이 아니었단 사실이 두 번째 의문이다. 그들은 수많은 전쟁을 통하여 남북조 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군대였다. 수 문제 양견은 진나라를 병탄할 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책을 사용할 만큼 병법의 달인이었다. 육군의 경우, 비가 심하면 진지를 옮기거나 철수하거나 하여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군의 경우 간단하게 장마에 휩싸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4.2 천재지변에 의한 민간피해

 

   수문제 시대에 요서지방에 홍수가 발생하여 민가의 피해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전염병이 발생하여 많은 민간인이 죽었다는 기록이 수서의 다른 부분에서라도 발견된다면 수나라의 패인이 순전히 장마 때문이었다고 풀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대목은 발견되지 않았다.

 

4.3 고구려군의 저항 기록

 

   수서에는 고구려의 저항에 대하여도 한마디도 기록하지 않았다. 고구려에 대군이 있었음은 분명한데 고구려군의 군세라던가 장수 이름 등의 상황설명이 하나도 없는 점에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본래 고구려도 기록된 역사책이 있었다. 영양왕 12년 (600년)에 이문진(李眞文)이 편찬한 신집(新集)이 그것인데 모두 당나라에 탈취되어 그 종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4.4 기록부실의 원인 추측

 

   고수전쟁(高隋戰爭)의 기록이 다른 사서에서도 찾기 어렵다. 수서의 기록이 빈약함과 같은 맥락이기에 소개한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친정하기 전, 돌궐을 평정한 명장 이정(李靖)과 나눈 대화가 당서(唐書, 長昭遠 등, 940)에 있다. (이를 기록한 책이 李衛公 兵法이다.) 당서에나 이위공 병법에는 이정이,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병법을 아는 사람이나 삼 만의 군대를 준다면 생포해 오겠다" 라고 했다는 기록만 있다. 불과 수 십 년 전에 있었고, 수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살수대첩(薩水大捷)에 대해서 상의한 기록이 한마디도 없다. 고구려 원정을 가면서도 적지와 적정과 적장에 대하여 의논한 대화가 한마디도 없는 것이다. 이정은 5년간이나 치밀한 계획을 세워 돌궐을 평정했던 명장이다. 그가 고수전쟁을 몰랐을 리 없고, 전쟁에 앞서 적정 살피는 일의 중요함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기록이 없는 이유는 후세에 누군가가 기록을 삭제하고 변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정이 삼 만 군사면 된다는 전쟁을, 당태종은 친정을 하면서 삼십만 씩 동원한 것을 보더라도 여기에는 분명 다른 사연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춘추필법을 이탈하는 추측을 피할 수가 없다.

 

   "이정의 제자 이세적(李世勣)이 팔십 세의 노쇠한 나이로 고구려를 멸했으니 그의 스승이요 명장인 이정이라면 삼만의 군사로도 연개소문을 생포할 수 있으리라" 라는 후세의 추측이 역사책의 기록으로 둔갑한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당서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변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변조과정에서 고구려군의 활약상은 모두 지워 버렸을 것이다. 소위 중화사상(中華思想)의 발로라는 시각이다.

 

   수서의 기록도 같은 연유로 변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수나라는, 조공을 바치러 오는 외국 사신들에게 수나라의 번영을 과시하기 위한 허세가 역대 왕조 중 가장 심했다고 십팔사략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임유관 전첩의 상세한 전황을 야승적사료(野乘的史料)를 이용하여 기술한 조선상고사의 내용뿐 아니라 기타 사료들을 이용하여 다시 판단해야 한다. 강이식이 장마를 전첩에 이용하였는지 아니면 장마가 우연히 발생하여 고구려군의 승리를 도왔는지는 이를 토대로 하여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5. 기록의 차이들

  

5.1 전쟁 발발의 원인

 

   양국의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국서의 내용은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왕이 매양 사절을 보내어 해마다 조공하나 그 성의가 미진(未盡)하다. 왕이 짐의 신하인 즉 짐의 덕을 닳음이 가하거늘 왕이 말갈을 겁박하고 짐에게 내조함을 방해하니 어찌 이 같이 독해(毒害)가 심한고. 짐이 태부(太府))에 공인(工人)이 적지 아니하니 왕이 필요하여 청하면 얼마든지 보내 줄 것인데, 가만히 뇌물을 써서 노수(弩手, 활과 무기를 만드는 사람)를 빼 가고 병기(兵器)를 수리 하니 이것이 무엇을 위함이냐? 고구려 일 국이 비록 토지가 좁고 인민이 많지 않으나 이제 왕을 쫓아내면 비워둘 수는 없으므로 따로 관리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왕이 만약 마음을 씻고 행동을 고치면 짐의 좋은 신하이니 다른 사람을 보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왕은 요수가 넓다고 말하나 어찌 양자강과 같으리요. 고구려 사람들은 다소 진나라를 생각하겠으나, 짐이 만약 그 마음을 포용할 생각이 아니라면 왕의 허물을 책망하겠는가? 일개 장수를 보내어 큰 힘들이지 않고 왕의 죄과를 물을 수 있으나 그래도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허락하노라."

 

   그런데 십팔사략에는 침공이유를 달리 해석하고 있다.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한 수의 문제는 전공을 치하하고 포상하는 데 대단히 인색했던 사람이었다. 남북조의 통일 전쟁이 중국의 내전이었으므로 함부로 약탈을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포상을 감당할 재원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 즉 고구려를 정벌하여 포로를 데리고 와서 노예로 나누어주자는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5.2 강이식 장군

 

   강이식이란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는 장마통에 전쟁을 벌인 고구려 군의 활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삼국사기나 수서, 십팔사략에는 강이식이란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근세에 출판된 서적들 중에도 李弘稙(1962, 1968, 1990), 李丙燾(1972), 宋明煥(1986), 圖書出版 범한(1998a), 李基白 (1978, 1997), 民衆書館(1990) 등에는 강이식이란 이름이 없다. 1998년 현재 사용중인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문교부, 1990)에도 강이식도, 임유관 전첩도 전혀 소개되지 않는다. 국역된 가장 상세한 한국사 서적으로 보이는 김인호(1976)는 임유관 전투는 기록하였지만 강이식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영양왕이 친히 말갈병 일만을 거느리고 요서를 공격했다고 한 기록 (김인호, 1976) ; 李丙燾, 1972)도 있다.

 

   그러나 韓國文化硏究所(1994)나 崔實光(1989)의 진양 강씨 편에는 강이식을 살수대첩의 병마도원수라 소개한다. 이와는 달리 조선상고사는, 대동운해에는 강이식이 살수대첩 때의 병마도원수로, 서곽잡록에는 강이식을 임유관 전쟁 때의 병마도원수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살수대전 때는 왕의 동생 건무(建武)가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이 육지를 맡았으니 강이식이 병마 도원수이었을 가능성은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조선 상고사의 내용대로 기록된 사전류는 民衆書館(1993), 梁聖模(1996), 東西文化社(1996), 中央日報史(1989), 이현재(1991)등이다. 臨溪亭(1986 =晉陽 姜氏 世譜)도 씨족의 시조인 강이식의 기록을 조선상고사에서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한편 臨溪亭(1986)은 강이식의 묘소가 高句麗 瀋陽縣 元帥林에 있다 하고 지금도 滿洲 奉吉線 元帥林驛 앞에 兵馬元帥 姜公 之塚이라는 큰 비석이 있으며 수십년 전까지 여러 후손이 참배하고 왔다고 전한다. 그리고 高麗 光宗(서기 950) 때 강이식의 사당이 건립되었었다는 口傳이 있었음과, 1593년, 1714년, 1911년, 1920년, 1975년에 각각 사당이나 재실을 중건하거나 신축한 기록이 있음을 제시한다.

 

    이상을 종합하면 강이식이, "1) 실존인물이며 임유관전첩과 살수대첩의 최고지휘관이었거나, 2) 임유관 전첩에서 최고지휘관이었고 살수대전에서는 참전만 하였거나, 3) 살수대첩에 참전했을 뿐인 장수이거나, 4) 허구의 인물" 인 중에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 최소한 4) 가 아닌 것은 확실한 것 같다.

 

5.3 임유관 전첩의 기록

 

   위에 소개한 한국사사전이나 백과사전류 중에 임유관 전첩을 독립항목으로 따로 기록한 서적은 없다. 강이식이란 항목은 있으면서도 그 안에 임유관 전첩이나 살수대첩을 소개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宋明煥, 1986 ; 朴永根, 1994 ; 曺治根,1996). 강이식에 관한 기록은 없어도 임유관 전첩에 관한 기록은 있는 경우(김인호, 1976)도 있다. 이와 같은 혼란은 수서만 정사로 인정하는 춘추필법의 부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강이식의 후손들이 강이식의 이름을 역사에 기록하는 일은 열성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예 : 姜舞鶴, 1981), 임유관 전첩의 재조명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부작용도 조금은 가미된 것 같다.

  

6. 전첩에서의 장마

  

6.1 발생여부

 

   장마 발생에 관한 기록이 수서에는 부실한 까닭에 그 발생 여부를 다른 사료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수문제의 아들 수양제(隋煬帝)는 즉위하자마자 두 가지 대 사업을 벌였다. 하나는 대 운하 건설인데 그 목적이 풍요한 남방에서 북방으로의 물자수송 뿐 아니라, 고구려 침공을 위한 물자 수송이었다고 십팔사략은 기록하고 있다. 수양제는 고구려 침공을 위해서는 수송능력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운하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사업은 산동반도에서 대형 선박을 대량 건조한 것이다. 조선공은 수년간 물 밖으로 나가지 못해 허리아래에는 구더기가 우글거렸다는 기록이 있다. 역시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는 장마시의 풍랑을 이길 수 있는 대형 선박을 건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수양제는 고수전쟁의 패인이 장마비 때문이었다고 끝까지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장마의 영향은 확실하게 있었다. 장마의 민간 피해 기록이 없다하여 장마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姜舞鶴, 1981)은 지나치게 강이식을 미화하려는 의도의 소산일 것이다.

 

6.2 장마 후에도 계속된 전투

 

   수나라 군대가 장마를 만난 것은 6월이고, 패퇴한 것은 9월이다. 함경도 이북지방에서 장마는 아무리 늦어도 음력 8월 이전에 종료한다. 음력 9월이면 한반도 전역에서 장마가 끝나고도 한참 지난 시기이다. 그러니 수나라 군대는 장마가 끝나고도 계속 전투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장마 때문에 전투력의 80-90%를 손실한 상태에서 장마가 끝난 9월까지 버티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또 3개월간 전투가 없었다고도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장마는 초전에 수나라 군대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지만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었다.

  

6.3 계획적으로 장마를 이용했을 가능성

 

   장마를 계획적으로 이용했을 만큼 강이식이 탁월한 병법가였을 가능성은 다음 다섯 가지로 풀이된다. 첫째, 강이식은 고구려로 귀화하기 전에 이미 수나라의 대장군 병마사였다. 중국의 남북조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를 거쳤을 것이다. 그러니 병법을 익힌 사람이다.

 

   둘째, 개전 시기에서 약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수문제로부터 무례한 국서를 받고는 전략요충지인 임유관을 선공으로 점거한 다음 한 해를 넘긴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수나라 대군이 발진한 시기는 고구려 군이 요서총관 위충과의 소규모 접전에서 (거짓)패하여 임유관에 들어간 다음이다. 수나라 군대와 싸울 장소를 임유관으로 정한 계획이 미리 세워져 있었음을 뜻한다. 전투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한 군대이니 전투시기까지 주도적으로 계획했을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작전구사능력이다. 개전 즉시 임유관에 들어가 수비만 한 것이다. 장마는 지구전에서 수비하는 측에는 유리하게, 공격하는 측에는 불리하게 마련인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수비만 하는 중에도 바다에서는 수나라 해군을 격파하여 보급로를 차단한 것을 보면 전체 작전이 일사불란했다고 보인다. 이러한 주도면밀한 작전에서 장마를 활용하는 계획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살수대첩에서도 드러난 탁월한 작전 구사 능력이다.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면서 수나라 육군을 평양성 가까이 까지 유인한 다음, 지쳐 패주하는 수나라 군대가 청천강을 반쯤 건너는 순간에 총 공격을 가하여 대승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청천강의 강물을 막아 수공을 했다는 기록(姜舞鶴, 1981)은 삼국사기에는 없다.- 평양성 까지 진군한 수나라 육군에게 빈성 하나도 탈취 당하지 않았다는 점이 시종일관 철저한 유인작전이었음을 증거한다. 임유관 전첩에서 적지에서 전투함으로서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한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수나라 해군도 유사한 유인작전에 말려 참패하였다. 이러한 유인작전은 지형 등의 자연조건을 충분히 활용하는 작전이다. 고구려 군대는 자연조건을 잘 활용하는 군데이니 기후조건 즉 장마를 잘 활용했을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

 

   다섯째는 강이식의 후손 중에 강감찬, 강민첨 등의 명장이 속출했다는 점이다. 자연 조건을 잘 활용하는 쪽이 승리한다는 선조의 가르침이 대대로 이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6.4 우연한 장마였을 가능성

 

   위에 나열한 모든 분석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장마시기에 전투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나, 전투 중에 장마가 시작되었기에 이를 잘 활용했을 뿐일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신집(新集)을 찾아내어 더욱 자세히 밝혀야 할 부분이다.

 

 7. 맺는 말

  

   이상을 종합해 보면, 수문제의 고구려 침공 시 장마에 연관된 천재지변은 있었다. 그리고 이 천재지변이 종료된 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따라서 임유관 전첩도 있었다고 봐야 한다. 임유관에서는 장마 현상을 고구려 군이 미리 예측하여 작전에 활용한 것도 사실인 듯하다. 강이식이 임유관 전첩의 지휘관이었는지는 일말의 의문이 재기되지만, 이 시기를 즈음하여 활약한 것도 사실인 듯하다. 따라서 이 전첩은 세계 전사에 빛나는 환상적인 전첩이다.

 

   그런데 1998년 현재까지 임유관 전첩을 독립항목으로 취급한 사전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1998년에까지 강이식이란 이름이 없는 사전류도 발간되고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 때문에, 그 이후는 강이식이 수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이라는 민족주의 사상 때문에 그냥 덮어만 두고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크게는 기후를 이용하는 지혜가 국가의 존망까지 좌우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기기 위해, 작게는 이런 위대한 선조가 있었다는 사실을 후세에 밝혀두기 위해, 더 작게는 한민족도 하늘의 특별한 옹호를 받은 역사가 있다는 격려를 전파하기 위해, 임유관 전첩의 재조명은 필요하다. 최소한 한국사사전에는 모두 이 어휘들이 독립항목으로 등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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