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대제국(東方 大帝國) 정일영 지음 한국 고대사에서

 三十一. 隋文帝(수문제)의 高句麗 侵入과 姜以式摠管의

            隋軍殲滅(수군 섬멸)

 1. 수문제가 고구려를 위협하는 국서를 보내오다

 고구려 영양제(영陽帝) 대에 이르러 수는 중원에서 열국을 정복하고 5호 16국 시절의 막이 내려졌다. 수 문제(隋 文帝)는 중원 열국을 멸하고 항복한 왕들을 축출하고 중원 황제로써 위세를 떨쳤다.

  (隋文帝 開皇十七年 高麗王湯聞陳亡 大懼 治兵 積穀 爲拒守之策是  歲常賜湯 爾書責以 雖稱藩附 誠節未盡 且曰 彼之一方 雖地挾人少 今若黜王 不可虛置 終須更選官屬 就彼安撫 王若酒心易行 卒由憲章 卽是朕之良臣 何勞別遣方彦也…王謂遼水之廣 何如長江 高麗之人多少 陳國 朕若不存含育 責王前愆 命一將軍何待多力 殷勤曉示 許王自新耳 <隋志>

  (개황 17년 수 문제는 고구려가 진이 수나라에 패망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다음은 고구려를 칠 것이라고 짐작하고 군사를 징모하는 한편 군량을 쌓아 국방에 분망한다는 첩보를 보고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책망하여 가라대,  "고구려가 번국(색위의 부용국)이라 하나 성의가 없으니 중원 변경의 작은 지방으로서 인구가 적고 땅이 좁다고 하여도 그 왕을 한 번 내치면 비워 둘 수 없고 새로이 통치자를 선정해야 하는데 있는 왕을 위무하니 왕이 말하는 요하가 크다고 하나 양자강과 같지 못하며, 고구려 인구가 많다하나 진나라 인구만 못하니 마음을 돌려 신복하면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아니할 것이니 짐이 만약 없으면 누가 보전케 하랴! 그대 왕의 지난 허물을 문책하고자 한다면 큰 힘을 들일 것도 없이 한 장수를 보내 문책할 것이나 은근히 이르나니 왕호(王號)를 허락하는 바 그간 생각을 새로이 하기 바라오."하였다. ) 

  이것은 고구려가 이미 중원 영토를 얻고 요동으로 후퇴한 소국(小國)이라 멸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제는 군신을 모아 상의하였다.

  "수왕이 사자를 보내 이런 국서를 보내여 짐을 욕하였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군신이 고하되 수 문제가 근간 진을 멸하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니 의기양양하여 협박을 하는 것이오니 강박하면 필연 군사를 일으켜 침공할 구실을 삼을 것이고 응하면 미약하게 볼 것이옵고 칭신을 강요할 것이오니 사자를 불러 좋은 말로 위로하고 돌려보냄이 옳을 것이옵니다."하였다.

  "수왕은 지금 주황실을 찬탈한 후 진을 멸하여 중원을 완전 장악하여 위기 충전하니 그들에게 불복하는 적은 이제 우리 나라뿐이니 필연코 언젠가는 침범할 것이오니 서둘러 방위책을 강행하여야 하옵니다."하고 상국이 아뢰었다. 그것이 군신의 일치된 견해였다.

  당시 수나라가 국세는 전국 190군 1255군현 890만 호 5천만 인구에 육박하는 거대한 국가로 등장하였다. 이때 고구려 인구는 말갈 예맥과 합쳐 350만, 註. 백제와 신라는 각기 독립 정부가 있어 구별하나 말갈 예맥 물길 걸란 오손 선비 등은 고구려 열후로서 때로는 이탈하나 별도 취급이 필요 없는 동본 동족이나 사서에 별명을 붙여 기록하여 분열을 나타내니 그들 기록을 참고하였기에 따라 쓴 것임.

  수나라에 관하여는 기록이 있으나 우리 나라의 그것은 여러 정황으로 추산한 것임.

  조선 반도에 있는 백제 신라 50만으로 추산되나 백제 신라는 오히려 수나라 편이였다.

2. 수가 칭신을 강요하자 미리 요서에 출병

 수는 다시 고구려 문제로 의논이 분분하였다. 수 왕이 서역을 순행함에는 서역 27국이 길가에서 비단옷에 금옥 패물을 장식하고 향을 피우고 가무(歌舞)하며 수 왕을 환영하고 수 왕은 스스로 궁녀를 성장하여 둘러 모시게 하고 거마(車馬)를 장식하고 호위병이 수십 리를 시위하여 서역 수 천리 땅을 이와 같이 행차하였다. 그리고 서남북의 색위 20여 국 사자가 배석하여 대연을 배설하고 구부악을 연주하고 그 호화 찬란한 연회는 필설(筆說)로 다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밤늦도록 호위하는 사병의 동사자와 마노의 동사 후궁비는 길을 잃고 낭패하여 군사 속에 섞여 산간에 잡숙하는 자 등 수왕의 시위하는 행차는 그치지 않고 동도에 초대하여 백가지 노름판을 벌리는 노름장이 5천 보에 이르고 소리가 수 십 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수는 다시 사신을 보내 고구려왕 元(영陽王)을 요동근공 낙랑 고구려 왕을 봉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은밀히 고구려 정벌의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그것은 고구려는 봉왕하여도 사은입조를 하지 않고 수 왕의 우위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준비를 확충하였다. 이때 신입한 원 황제는 백관을 모아 의논하였다.

   "수 왕이 우리를 업신여겨 칭신을 강요하고 불응하면 침공할 것을 비추어 위협을 계속함에 선제께서는 그로 인하여 근심 끝에 병이 악화하여 붕어하였으니 짐은 열성 조의 유언을 지켜 고토 회복에 힘 쓸 것이고 결코 수적에게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수는 우리 영토 요서를 점거하고 태수를 봉하여 요동을 넘보고 있으니 우리는 요서를 회복하여 태조 대왕이 축조한 요서 요동 10성을 회복하여 수를 막을 것이로다."하고 천자 친정할 새 말갈병 수만을 선봉으로 요서에 출정, 수의 요서 영주총관 위충(韋沖)을 공격 파하고 나왔다. 이를 수는 침략의 명분으로 하여 대군을 일으켜 수십만 치중군으로 군량과 전마를 동경 일대에 집결하고 출병에 착수하였다.

  수 문제는 옛날 진시황과 한 무제의 중원 사방 정벌의 진취적 거사를 흠모하였다. 이제 삼방이 수나라의 위세에 눌러 입조칭신(入朝稱臣)하고 조공을 바치는데 고구려는 태조 황제를 칭하고 입조를 거부하였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나 수 문제 일당은 단군 대제국의 지난날의 은의나 신의를 모르는 무골(武骨) 집단이었다.

  다른 삼방의 미개족에 준하여 인국이 아닌 부용국으로 예속해야 한다고 망상을 버리지 못하였다. 수 왕은 천하 유일의 황제가 되겠다는 위대한 야심을 품고 동방 침략의 계책을 실행에 옮겼다. 왕자 진왕 소(昭)를 장안을 지키게 하고 수십만 인부를 동원하여 용문에서 동으로 장평에 접하는 군(郡)의 물을 끌어들이고 임청관(臨淸關)을 쌓았으나 물을 건너 준의 양성에 도달하고 上洛에 關을 설치하여 고구려를 막게 하고 윤락에 동경을 새로이 건설하여 고구려 침략의 기지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수 문제는 고구려 정복을 위한 방대한 계획을 수립한 후 본격적으로 침략전쟁을 시작하였다.

3. 고구려 군 도원수 강이식(姜以式)은 삼군을 긴급 소집

 수 문제의 아들 韓王 양(凉)은 전쟁 경험을 많이 쌓았음으로 양으로 하여금 원수(元帥)를 삼아(양은 隋王의 第五子) 水陸 30만 군으로 18년 6월 출사한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고경(高傾)으로 장사를 삼고 주라후(周羅喉)로 수군 총관을 삼고 육군은 임유관(臨투關, 浿水?)으로 삼아 진출하여 물 건너 요동으로 진출하고 수군은 동래(東萊, 天津입구)로 모여서 평양성으로 향하여 수륙으로 공격을 강행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각 요새와 각 성을 굳게 지키고 응전하지 아니하였다. 수군은 한 달을 공격하였으나, 사상자만 늘어날 뿐 요하를 전군(全軍)이 건너보지도 못하고 피폐하여 전의를 상실하였다.

 

  고구려 군은 수군이 차츰 군량이 어려워짐을 탐지하고 정예 경기병 만 명으로 적의 수송로와 창고를 급습하여 불태워 벼리고 적의 수송선을 급습하여 군량 수송선을 발해에서 불태워 버렸다. 적은 군량이 떨어지고 후속 보급이 오지 않으니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 굶주리는 병사는 이미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명령을 듣지 않고 달아날 궁리만 하였다. 수나라 장수들은 회군의 불가피 함을 수제에게 주달하고 회군을 시작하였다.

  고구려 군의 추격을 경계하여 요소 요소에 매복하고 철군하였으나 고구려 군의 맹렬한 추격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때에 고구려 군 도원수 강이식(姜以式)은 삼군 긴급 소집하여 적정을 토의한 후 명을 내렸다.

  "적은 지금 아군의 경기병이 그들의 군량미 보급로 차단으로 전의를 잃고 후퇴하고 있으나 굶주림으로 대오(隊伍)가 무너지고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적군은 아군의 포위망을 해쳐 나가지 못할 것이다. 제장은 분발하여 대공을 세우라, 제일군은 정예보기(精銳步騎) 5만으로 적의 선발 퇴각군을 추격 섬멸하고 패수를 넘어 적의 임유관을 격파할 것이며 우북평으로 진격하여 그들의 보급창을 탈취하고 임유관을 점거하여 퇴각하는 적을 섬멸하라, 우북평의 군량을 소각하되 때를 놓치지 말고 시일을 주지 말라, 2군은 5만 정병으로 해빈으로 진격하여 해상에서 우리 수군에 패하고 풍파에 침몰한 패잔병의 집결을 완려하기 사전에 섬멸하라. 제 이군은 전군을 동원하여 각성에서 포위를 풀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라. 내 스스로 후군을 이끌고 삼군을 접응하리라."하였다.

 4. [수서]에는 출정군이 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十中 八九로 기록

  이에 고구려 군은 총공격에 나섰다. 요수가에 무수한 시체를 버리고 간 수군은 고구려군의 추격에 산산조각이 나고 발해의 수나라 출정 함정에서 살아남은 패잔병은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 군에게 섬멸되어 발해만에는 수나라 수군의 시체가 무수히 떠다녔다.

  수군 대장군 한왕 양(漢王 凉)은 全軍에 퇴각 명령을 내리고 요소 요소에 고구려 군 추격을 저지하는 모든 조치를 마치고 요동성 전군 지휘소를 소각하고 퇴군의 길에 올랐으나 어느 사이 고구려군이 접근하여 오고 있었다. 그 추격이 너무나 급하여 후군이 대항할 겨를이 없었다. 한왕 양은 본부군을 이끌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군은 추격하여 오면서 외쳤다.

  "도적의 괴수가 저기 있다. 저 놈을 잡으면 천금의 상이 걸렸다." 하고 급습하였다. 양(凉)은 다급해졌다.

  만군지중을 무인지경으로 해쳐오는 고구려 경기병의 습격에 수군 총대장의 근위대는 화살에 맞고 창에 찔리고 칼에 목이 달아나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근위대장이 한王 양(凉)에게 말하였다.

  "지금 우리 군사가 많으나 굶주리고 피로하여 적의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대장군께서는 근위 기병을 이끌고 사잇길로하여 동도로 달아나시면 소장이 죽음으로써 고구려군의 추격을 가로막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凉은 중군을 빠져 나와 급히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량은 九死一生으로 동도에 도착하였을 때는 전상한 10여명의 수하가 따라왔다. 대군을 황야에 버리고는 총대장 凉은 패잔군이 속속 도착할 줄 알았다.

  그러나 간간이 살아 돌아오는 수군의 패잔군의 입을 통하여 들리는 상황은 비참한 것 뿐이었다. 각군 지휘관은 퇴각명령을 한 번 내린 후 다시는 소식을 알 수 없고 다만 저마다 살아서 돌아갈 궁리밖에 없었다. 대군이 굶주림 속에서 주야로 행군하여 패수가에 이르렀으나 고구려군은 추격을 늦추지 않았다. 전군이 패수를 건너니 임유관은 고구려군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군의 대부분은 이미 병장기도 버리고 달아날 궁리만을 하였다. 후군은 추격하는 고구려군에 의해 패수가에 섬멸되고 전군은 패수를 건너 수나라 땅에서 섬멸되고 싸우지 않고 달아난 자는 굶어죽고 패수가의 임유관 일대는 시체가 겹겹이 쌓였다. 수나라 군사는 많은 전쟁경험을 쌓았으나 고구려군의 용맹과 탁월한 용병술과 능수능란한 전술 앞에서 30만 수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고구려군은 10만 보기정병으로 맹열히 탁록까지 추격하니 살아남은 적이 거의 없었다. [수서]에는 9월 기축 출정군이 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10중 8, 9였다. 즉 '九月己丑師還死者什八九'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전쟁의 비참한 결과는 소수의 살아서 돌아간 자도 상이 전상자뿐인 것으로 치중 운량병도 모두 전사하여 총 100만이었다고 전해졌다. 다음 모병에도 요동출정군이라 하면 결사도피 했음을 알 수 있다.

5. 수 문제가 화의의 국서를 보내오다

 슬픈 노래들이 전해졌다. 수왕은 거의 전멸한 출전군의 비극을 감추고 '군사들이 운량관의 잘못으로 양식이 떨어져 죽고 수군은 풍파로 배가 가라앉아 죽었다.' 하고 싸워서 전장에서 죽은 자는 입이 없고 고구려군과 싸워본 일도 없는 것 같이 공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강력함은 민간에 널리 전하였다.

  고구려군의 추격으로 패수를 건너지 못한 수군의 전사한 시체는 옛 진시황이 설치한 空地에 흩어져 있었다. 수 문제는 화의의 국서를 보내왔다. 제는 계속 추격하여 동도에 있는 수 문제를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征隋副摠管 을지문덕(乙支文德)은 패수를 넘어 수문제가 머무는 동도를 공략하기 위하여 시간을 늦추지 말고 수왕의 동도를 포위하면 그들의 구원군이 오기 전에 수왕을 사로 잡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하고 表를 올린바 있다. 요대 욕살과 여러 도사도 찬동하여 군사 동태를 시찰하러 나온 天子의 특사에게 말하기를 이제 수군 30만을 멸하고 치중병마 수십만을 섬멸하였으니 아군의 패해 또한 심하오나 우리의 피해는 수에 비하여 극히 적은 편이옵니다. 아군 십만 정예는 수의 동도 수어군 20만을 격파하는데 어려움이 없사옵니다 하였다.(여기 도사란 고구려군의 지휘관 계급 호칭이다.) 천자가 결단을 내었으나 지난날 모구검이 침공시의 전철의 두려움이 있었다. 비록 진격명령을 내렸으나 불안하였다.

  천자는 대대로를 돌아보고 물었다. "경은 국상으로서 어찌 말이 없는고?" 하자 대답하기를,

  "신은 병법을 깊이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옛 사람이 말하기를 병은 흉기라 하였습니다. 수가 비록 강하나 인국을 멸하고 홀로 천하를 차지하고자 하여도 병을 회롱하는 자는 그로 인하여 망한다고 하니 지금 수가 인국에 항복을 강요하고 남의 영토를 강점한 후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남의 나라를 침략하니 망국의 길을 걷고 있사옵니다. 우리가 지금 군사를 내어 적도를 공격하다가 성이 빨리 함락하지 않으면 수 천 리 적지 군량을 감당할 수 없고 적의 援軍이 후군을 끊으면 진퇴양란에 빠지는 위험이 있사오니 이 틈에 백제가 배후를 침공하면 만사휴입니다. 이번에 적이 우리에게 당한 것과 같은 틀이오니 아군이 진격하여 일거에 멸할 만반의 준비가 없는 요행을 바람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은 즉 승패를 점칠 수 없는 전쟁이오니 폐하의 영단이 있을 뿐이옵니다" 하였다.

  여기서 아무도 만전을 장담할 자 없었다. 이에 천자는 말하기를 "적이 패하고 돌아갔으니 지금 곧 위험이 닥쳐올 것이 아님에 위험을 행할 것이 아니니 이제 전쟁을 종결하기로 원전군에 명령하리라" 하였다.

  때에 고구려는 우북평을 공략하였으나 수 문제는 장안으로 달아나고 없어 잡지 못하고 다시 추격하던 중에 본국의 반사명령을 받았다. 신라 백제를 그대로 두고 원정군이 적국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국서를 보내어 좋은 말로 위로하고 선린관계를 허락하였다.

6. 대고구려 황제는 수 문왕에게 글월을 보내다

 (大高句麗皇帝致書于隋文王麾下耳往時天道不順以天下大亂群雄厥起於四方而萬民陷墜塗炭之際貴王門?義伐凶終乃鎭壓海內一統乎此非但貴王室家之譽誠天下萬民之大幸焉朕亦如此蓋世之盛遠爲慶幸不己之念焉雖然今此不想侵功我彊境不法無謀之擧乎遼西之土本不隋地也我皇朝累世宗社絶不侵他邦往時魏妖將母丘儉犯境來侵以後連年兵擾于今矣昔旣漢高祖劉邦和朝鮮約定于浿水爲界詳悉故事之明然依考爲之如促王之察焉今番大戰於兩後而隋國軍兵橫死於遼西浿水之?者無數而朕亦憐憫不己是今接王表至此果見認前過之悔是幸則今擧者王之傍側妄臣之誤乎以慰朕慮兼且由望願後好以不咎先愆以垂深慮也留不具比平陽九年冬至大高句麗國皇帝 戒書. 漏錄補記)

  (대고구려 황제는 대 수문 왕에게 글월을 보내노니 지난날 천도가 불순함으로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뭇 호걸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만민이 도탄에 빠진 때에 그대 왕문에서 대의를 잡고 일어서서 흉악한 무리들을 진압하고 해내를 안정하였는바 이는 비단 그대 왕문의 영광일 뿐 아니라 천하 만방에 다행한 일이라. 짐 또한 이와 같은 세상을 덮는 대덕을 멀리서 경행한 바이오. 그러나 이번에 뜻밖에 우리 나라를 침공함은 불법무도한 행동이라 요서는 본래 수나라의 땅이 아니며 우리 나라는 열성조 이래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아니하는데 지난날 위 나라의 요망한 장수 모구검이 우리를 침범한 후부터 지금까지 침략을 계속하였는바 옛날에 한 고조와 조선사이 패수를 국경으로 한다는 약정을 하였으니 자세히 그 사실을 살펴서 참고하여 주기 바라며, 이번 대전은 이웃나라끼리 싸워서 수나라군병이 요서와 패수에서 다수 죽어 짐이 또한 연민하는 바이고 왕의 표를 접하여 보니 과연 전과를 뉘우침이라.  지난 일은 필연코 측신에 망령된 자가 있어 일을 그르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로써 위로하는 짐의 뜻을 전하는 바이요. 또한 이웃끼리의 친선을 위하여 지난날을 허물치 아니하며 앞날의 선린을 원하는 바이오.)

  이에 수 문제는 국서를 받아보고 부끄럽고 분하였다. 그러나 감정을 감추고 고구려에서 항복한다고 사신이 왔다고 공포하였다.

  고구려 국서에 계속 공격해올 뜻이 없는 것으로 보이나 그 진실을 믿기 어려워 수 문제는 공포에 떨었다. 그것은 조정 중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중원을 통일하였다고 하나 아직 틈만 있으면 봉기할 반란의 소지가 남아 있었다.

  다만 믿는 것은 백제였다. 때마침 백제는 수가 대패하여 점멸함도 모르고 고구려를 협공할 계책을 제출하였다. 수 왕은 백제 사신에게 알렸다. "고구려가 항복한다고 하니 일시 징병을 중단하였으니 기회를 보아 출사할 것인즉 백제는 만반의 공격준비를 갖추어 고구려 국경에 전군을 배치하고 다음 지시를 기다리라"하고 후한 상을 주고 격려하였다.

  수나라는 원정군이 전멸했다는 소문은 널리 퍼지기 시작하여 수 문제의 위신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백제의 배후 위협을 무시할 수 없어 수나라 정복의 의론을 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