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을 지낸 조선 초기 명신

            양평 문경공(휘 孟卿) 묘소

540년 세월을 이고 고고히 서 있는 신도비는 고령군 신숙주가 명을 지어

                 묘 앞 석등은 우람하면서 귀품스러워

아버지

 友德(우덕) 창령현사

 동생-叔卿(숙경) 집의

 孟卿(맹경)◇*<박사공 9세/1-65><통정공파> 영의정 역임

  1410∼1461년 4월 7일 별세, 자는 자장(子章). 1426년(세종 8) 진사에 입격, 1429년(세종 11) 허사문(許斯文) 방에 문과에 급제. 1430년 종사랑 예문관 검열(檢閱), 1431년 태종실록 편수관이 되고, 1433년(세종 15) 한림, 승정원 주서(注書), 이듬해 사헌부 감찰, 1443년(세종 25) 조봉대부, 충청도사, 이조좌랑, 의정부 검상, 7월 봉직대부 의정부 수사인, 1447년(세종 29) 수지승정원사(守知承政院事), 이듬해 1월 일본국 사신 선위사가 되었다. 1449년(세종 31) 의금부 부진무(副鎭撫) 1450년 1월 수사헌부집의(守司憲府執義)를 거쳐 이듬해 1월 동부승지, 1451년(문종 1) 1월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오고 5월 우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1452년(문종 2) 도승지(都承旨), 지이조(知吏曹)를 역임하고 1453년(단종 1) 11월 예문관 제학, 6월 판한성부사, 이듬해 8월 의정부 우참찬, 12월 좌참찬,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때 수양대군을 도와 세조 즉위 9월 수충경절 좌익공신(輸忠勁節 佐翼功臣) 2등으로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예문관 춘추관 서운관사 세자사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455년(세조 1) 7월 세자우빈객, 겸 판예조사(判禮曹事), 이듬해 10월 의정부 좌찬성, 1457년(세조 3) 우의정으로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12월 좌의정을 거쳐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1459년(세조 5) 8월 진주에 가서 모친을 뵙는 일로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술을 내려 주었으며 영천부원군 尹師路(윤사로)에게 명하여 한강에 가서 전별하도록 했다. 11월 영의정부사,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1459년(세조 5) 8월 영의정(領議政) 강맹경(姜孟卿)이 아뢰기를,

  “신의 노모(老母)가 경상도(慶尙道) 진주(晉州)에 있는데, 신이 병에 걸린 것을 듣고 근심하고 염려하여 병이 되었습니다. 지금 신의 병이 나았는데, 어미의 근심이 풀리지 않아서 지금 복종(僕從)을 보내어 신과 신의 처를 보기를 원합니다. 청컨대 가서 보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역마를 주고, 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여 강맹경의 어미에게 잔치를 주고 또 내외(內外) 선영(先瑩)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1461년(세조 7) 4월 종기로 고생을 했는데 임금이 약화십선산(略和十宣散)을 복용토록 하였으나 화농(化膿)이 심한 뒤라 효험이 없었다.  

  영의정(領議政) 강맹경(姜孟卿)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매우 슬퍼해서 소선(素膳)을 듣고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공신(功臣) 등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곡(哭)하게 하였다. 쌀과 콩 아울러 70석과 종이 1백 권(卷)을 내려 주었다. 강맹경은 성품(性稟)이 관후(寬厚)하고 활달하며 풍채(風采)가 훌륭하였다. 젊어서 과거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議政府)의 사인(舍人)이 되고, 문종조(文宗朝)에 미치어서는 판내자시사(判內資寺事)로 전직(轉職)되었다가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고, 여러 번 도승지(都承旨)에 올랐었는데 병 때문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바꾸었다. 세조(世祖)가 임금의 계통을 잇게 되자 좌익 공신(佐翼功臣)에 참여하여 더욱 알아줌을 받아서 드디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힘써 대체(大體)를 따르고 대신(大臣)다운 위엄이 있어서 매양 담론(談論)하고 주대(奏對)할 때마다 말이 급히 흐르는 물과 같이 거침없이 유창하다. 정인지(鄭麟趾)가 일찍이 면대(面對)하여 말하기를,

  “경(卿)은 정사(政事)에 재주가 있으나, 다만 박학(博學)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

  라고 하였다. 시호(諡號)를 문경(文景)이라 내려 주었는데, 충성(忠誠)하고 신의(信義)가 있으며 예 문(禮文)에 의거한 것이 문(文)이요, 의(義)로 말미암아 구원한 것이 경(景)이다. 임금이 너무나 슬퍼하여 7일동안 육선을 들지 않았고 충훈부에서 단오(端午)를 만났으니 풍정(豊呈)을 올리기를 청했으나 "강맹경이 죽은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 무슨 마음으로 잔치를 베풀겠는가?" 하였다. <왕조실록 2집 252면∼7집 460면>

배위

정경부인 파평  尹氏(윤씨) 1409년에 태어나 1486년에 별세하였다. 아버지는 사간 수미(須彌), 할아버지는 부사 보로(普老), 증조할아버지는 판서 승례(承禮), 외할아버지는 대제학 문화 유사눌(柳思訥)이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301 묵지산 국사봉 아래 경좌(庚坐)에 쌍분, 신숙주(申叔舟)가 짓고 종제 희안(希顔)이 쓰고 희맹(希孟)이 신도비 음기를 지었다. 졋适떴┫?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 나래 2리에 있으며 별묘(別廟)는 충남 부여군 규암면 부여두리에 있다. 유허비는 진주 반야동 입구에 있으며 광주 노상직(盧相稷)이 짓고 진주 하두근(河斗根)이 글씨를 썼다.

아들

允範(윤범) 경상도관찰사

사위

南희(남희)의령인(宜寧人), 도정(都正). 아버지는 판중추 경우(景佑)

朴壽長(박수장) 밀양인(密陽人), 아들은 부정(副正) 번(蕃)

문경공 부조묘(경기도 장호원)

부조묘-공신의 신위를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나라에서 허가받은 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