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
毅(의)○가선대부 중추원 부사, 검교 |
형-應亨○ |
應貞(응정)◇<박사공 9세/1-219><소감공(휘 회순)파> 자는 公直(공직), 호는 中和齋(중화재), 1470년(성종 1) 2월 충청도관찰사 金良璥(김양경)이 치계하기를 강응정은 검중추(檢中樞) 강의(姜毅)의 아들인데, 어미가 오랫동안 병을 앓으니, 강응정이 두어 달 동안이나 옷에 띠를 풀지 않고 밤이 새도록 자지 않았습니다. 또 아비가 병이 위급해지니, 강응정은 분향하여 하늘에 빌면서 몸으로 대신하기를 구하였고, 똥을 가져다가 맞보아 병이 덜하고 더한 것을 점쳤으며, 부모가 죽자 5년 동안이나 여묘(廬墓)살이하며 술·과실·소금·채소를 먹지 않았습니다.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1478년(성종 9) 4월 주계부정(朱溪副正) 深源(심원)이 상소에서 강응정이 정극인, 정여창, 이윤종, 남효온 등과 어울려 소학계(小學契)를 만들어 사람들이 이들을 십철(十哲)이라 불렀으며 강응정을 부자(夫子)라 추존한다고 했으며 관직에 천거하였으나 이내 사퇴하고 경서, 사주관상, 의술에 정진하였다. 1483년(성종 14)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 2등에 입격하였다. 성균관 유생 金用石(김용석), 申從濩(신종호), 朴演(박연) 등과 향약(鄕約)을 만들어 소학을 강론했다. 늙도록 과거를 안보고 잠시 훈도를 지내 무오, 갑자사화 때는 화를 면했으나 1506년(연산 12) 병인사화 때 화를 입었다. 과거를 안 보고 잠시 훈도를 지내고 무오, 갑자 사화 때는 화를 면했으나 1506년(연산 12) 병인사화 때 화를 입었다. 고향에 현동 강층리에 사림들이 효자 정문(旌門)을 세워고 선조는 효암(孝岩)이란 사액을 내렸다. 임란 때 타버리고 1713년(숙종 39)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갈마산 아래에 중건하였다. 1868년(고종 5) 훼철되어 1893년 단을 세웠다. 1929년 사림들이 옛터에 중건하였으며 실기(實記) 1권이 있다. 이 사실이 국승지지와 추강집 등에 실려 있다. 기일은 6월 8일이다. <왕조실록 8집 463면∼14집 46, 47면> [저서] 中和齋集(중화재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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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 |
상산 金氏(김씨) 기일은 12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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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
논산시 가야곡면 함적리 아버지 지중추공 묘 위쪽 갑좌(甲坐)에 쌍분이며 황강 김주정(金奏定)이 묘지를, 예창 박성양(朴性陽)이 비명을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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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
演麟(연린) 참봉, 瀚麟(한린) 참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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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
宋琥(송호) 여산인, 李文亨(이문형) 전의인, 金允球(김윤구) 함창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