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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世應(세응) 충순위 수의부위 |
동생-珷, 瑞, 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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瑀(우)◇<박사공 12세/1-146><청풍공(휘 혜)…통계공파> 1495∼1577년 3월 2일 별세, 자는 玉如(옥여), 伯圭(백규) 호는 모암(慕庵), 의령에 살았다. 1513년(중종 8)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 진사(進士) 3등에 입격하였다. 학문이 밝아 남명 조식(曺植)과 도의 지교를 맺었고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 어머니 병환에 탕제를 지극 정성하고, 상을 당하여는 양근에서 여막살이를 하다가 피를 토하고 어머니 중상일(中祥日)에 별세하였다. 1743년(영조 19) 임금이 그 일을 알고 1744년에 정려가 내려졌다. 이 사실이 의령군지와 삼강록, 남명집에 실려 있다. 용재 강덕보(姜德溥)가 행장을 짓고 승지 서명서(徐命瑞)가 효문기를 지었다. 1847년(헌종 13) 정려 뒤쪽에 사우를 세웠다. 사우의 이름은 효충(孝忠), 손자 초정공 언룡(彦龍), 동호공(東湖公) 기룡(紀龍)이 함께 배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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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 |
의인 창녕 曺氏(조씨) 7월 20일 별세, 아버지는 승지 계형(繼衡). 조부는 사직 증 참판 순(珣), 증조부는 생원 증 참의 명수(命壽), 외조부는 목사 익산 이효양(李孝陽). 묘는 의령군 용덕면 정곡 소윤공 묘 위 경좌에 있으며 상석과 망주석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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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
경기도 양평 어머니 묘 아래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11세손 우영(佑永)과 여러 후손들이 배위 창녕 조씨의 묘 우측에 단을 세우고 비문에 그 일을 적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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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
復敦(복돈)선공감 주부, 증 소윤, 復休(복휴) 군자감첨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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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 안내(주요시설 및 이용요금, 교통편, 인근관광지) 의령군 의령읍(宜寧邑) 동동 1134의 3번지, 지금의 의령종합고등학교 동편 담장옆 도로변에는 진양강씨(晉陽姜氏) 일문의 칠정려각(七旌閭閣) 6동(棟)이 가지런히 서 있다. 이 정려각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진양강씨(晉陽姜氏) 문중이 낳은 일곱분의 충(忠) 효(孝) 열(烈) 삼강(三綱)을 기리기 위한 정려각(旌閭閣)이니 일명 삼강문(三綱門)으로도 불리워져 왔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충절(忠節)과 효열(孝烈)을 일러 삼강(三綱)이라 하고 나라에서는 이를 실천한 사람을 정려(旌閭)하여 후세의 영원한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으니, 진양강씨(晉陽姜氏) 일문의 칠정려(七旌閭)는 우리고장 의령의 영원한 귀감이요 자랑이다. 이 정려각(旌閭閣)은 오랜 풍우에 더러는 허물어지고 파손되었으나 문중에서 틈틈히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고 1972년에는 새로 내부수리를 말끔히 하여 보존하여 온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정려(旌閭)는 1495년(燕山君 1년)에 태여나 천출(天出)의 효도로 정려된 모암공(慕菴公) 강우(姜瑀)의 정려이니 1744년(英祖20년)에 건립된 맛배 목조 와가이다. 그의 자(字)는 백규(伯圭), 호(號)는 모암(慕菴)이니 충순위(忠順衛) 세응(世應)의 아들이다.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태종(太宗)의 손(孫) 의천군(義泉君)의 따님이다. 19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올랐으며 특히 경사(經史)에 밝아서 사방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또 천성이 효도하여 모친의 병환에 지성으로 간병하고 당상에 몹시 애통하여 신병을 얻으니 시묘(侍墓) 3년을 마치는 대상일(大祥日)에 급기야 본인도 생을 마쳤다. 1744년(英祖20년) 정려(旌閭)를 내리고 1847년(憲宗13년) 충효사(忠孝祠)에 배향(配享)하였다. 충열공(忠烈公) 강수남(姜壽男)은 효행으로 정려(旌閭)된 강서(姜瑞)의 아들이다. 그는 1552년(明宗7년)에 태어나 일찌기 벼슬에 올라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있던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삭령(朔寧)싸움에서 순절(殉節)한 분이니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려(旌閭)되었다. 참의공(參議公) 강기룡(姜起龍)장군 또한 내 고장이 낳은 충절(忠節) 가운데 한 분이다. 그의 초명(初名)은 기룡(起龍)이요, 자(字)는 응문(應文) 호는 동호(東湖)이니 직장(直長) 강복남(姜福男)의 아들이다. 그의 형 강언룡(姜彦龍)은 망우당(忘憂堂)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운 임란(壬亂) 17의병장(義兵將) 가운데 한분이다. 임진왜란에 그의 형은 망우당(忘憂堂)의 휘하에서 싸웠으나 뒤에 진주성(晋州城)에서 삼절사(三節士) 최경회(崔慶會)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끝까지 성을 지키다가 역시 촉석루(矗石樓)에서 순절하였다.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61년 (哲宗12년) 정려(旌閭)를 내리고 이조참의(李曹參議)를 추증하니 이 정려(旌閭) 또한 이곳에 있다. 열부(烈婦)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정려(旌閭)도 이곳에 있으니 이 정려는 1882년 (高宗19년)에 건립한 맛배 지붕이다. 열부허씨(烈婦許氏)는 강시주(姜時周)의 처이니, 시주(時周) 형제가 부친을 가해(加害)한 불한당을 쫓다가 살인죄를 쓰고 감영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여기서 아우는 죽고 남편 시주(時周)만 남아서 모진 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열부허씨는 열손가락을 깨물고 혈서로서 남편의 신원(伸寃)을 호소하였으나 소득이 없고 남편의 죄는 죽음을 면할 방도가 없었다. 이에 열부허씨(烈婦許氏)는 다시 혈서 한장을 남기고 자진(自盡)하니 그 혈서에 써있기를. 남편을 대신해서 먼저 죽는 바 내죽은 시체는 장사도 하지 말고 동문 밖에 내어서 옥사(獄事)의 종말을 보게 해 달라」는 간곡한 사연이였다. 이 말을 듣고 세인들은 모두 만고에 없는 열행(烈行)이라 감복하니 나라에서 1882년에 정려(旌閭)를 내렸다. 수재공(修齋公) 강재중(姜在重)과 그의 처 함안조씨(咸安趙氏)의 쌍효(雙孝)를 기리는 정려(旌閭) 또한 이곳에 있다. 수재공(修齋公)은 모암(慕庵)의 9代손으로 자(子)는 거보(擧甫)이니 수재(修齋)는 그의 호(號)다. 1797년(正祖21년)에 태어나 천성이 효도했으며 그의 처 함안조씨(咸安趙氏) 또한 숙행 (淑行)으로 세인의 많은 칭송을 받았으니 고방에 있는 음식을 쥐도 더럽히지 않았고 썩는 일도 없었다 한다. 부친이 오랫동안 설사병으로 고생을 할 때 일일이 대변 맛을 보아가며 병의 경중을 가렸고 80세가 넘은 모친이 종기로 고행할 때는 부부가 번갈아서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었다. 또 부친이 꿩고기를 원하니 저절로 꿩 한 마리가 주방으로 날아들었으며, 한 겨울에 밭에서 자라를 잡아와서 부친이 원하는 자라고기를 해드리는 기적을 낳았다. 또 겨울철의 가뭄에 물이 말랐으나 조씨 부인이 우물가에서 지성으로 빌었더니 문득 우물이 솟아났으므로 사람들이 효도샘(孝道泉)이라 불렀다. 이와 같은 수재공(修齋公) 부부의 효행이 알려져 1845년(高宗11년)에 쌍효(雙孝)의 정려(旌閭)를 내렸다. 이상 강씨일문(姜氏一門) 일곱분 6동(棟)의 동국삼강(東國三綱) 정려(旌閭)는 우리 고장의 자랑이요 천추에 빛나는 귀감이 될 것이다. 한편 이 칠정려각(七旌閭閣)은 지방기념(地方記念物) 제35호(1977.12.28)로 지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