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億(억)◇○ 정언, 중직대부 사성

형-命瑞, 聖瑞

德瑞(덕서)◇○<박사공 12세/1-184><판서공(휘 이행)…통계공파>

  1540년 7월 4일∼1614년 7월 21일 별세, 자는 득길(得吉), 서울에 묵사동(墨寺洞)에 살았다.  어머니 생전인 1573년(선조 6)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  진사 2등에 입격하였다. 1586년 남근(南僅) 방 병술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봉사, 그후 한림(翰林)에 뽑혀 호당에 들어갔고 홍문관 응교(應敎)와  평창군수를 지냈다. 한산군수(韓山郡守) 재직 시 몽학란(夢鶴亂)을 한산에서 토벌 평정하였고, 1596년(선조 29) 4월 한산의 백성들이 길거리에 모여 "전군수가 직무에 심력을 다하였는데도 파직되었으니 유임시키기 바란다"고 호소하였다. 1601(선조 34) 2월 덕원부사(德源府使)를 역임했고 1605년(선조 38) 7월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역임했다. 또 선조 때  정란원종훈(靖亂原從勳)으로 도승지 겸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정에 증직되었다. 율곡 문성공 이이(李珥)와 교우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교우간에 의리가 있어 높이 추앙받았다. <왕조실록 22집 668면∼25집 96면>

 

배위

숙인 죽산 朴氏(박씨) 1537년 2월 20일생∼1582년 4월 26일 별세, 아버지는 감역 사관(思寬), 조부는 참봉 환(煥), 증조부는 판관 겸문(兼文) 묘는 친정 아버지 묘 앞 사좌에 있으며 상석이 있다.

  

파주시 금촌읍 야동 아버지 묘 위쪽 묘좌에 있으며 상석이 있다.

아들

c◇통훈 성현도찰방

 

사위

李日名 (이명) 완산인, 첨지, 아들은 만엽(萬葉), 만지(萬枝) 첨지, 만근(萬根), 사위는 유지번(柳之번)

金得雲(김득운) 아들은 중수(重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