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신라와 발해

 

 

 대왕암(문무왕릉)|경북 경주 감포  "내가 죽은 뒤에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지키려고 한다."(문무왕의 유언 중에서)

 

 

1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통일 신라는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었지만, 영토는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에 국한되었다. 고구려의 옛 땅에는 발해가 건국되어 남북국(南北國)의 형세를 이루었다. 신라는 무열왕계가 전제 왕권을 확립하면서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주변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한편, 발해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펴면서 나라를 정비하여 동북 아시아의 강국으로 떠올랐다.

  

  

성덕 대왕 신종과 비천상무늬  성덕 대왕 신종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종이다.

 

[1] 신라가 통일 후에 새로 마련한 제도는?

 

무열왕계의 왕위 세습

  신라는 삼국 통일로 영토와 인구가 많이 늘어났고, 백제·고구려 유민들과 힘을 합쳐 당 침략군을 몰아 내는 전쟁에서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도 생겨났다. 이렇게 달라진 사정에 따라 여러 면에서 새로운 모습들이 나타났다.

  통일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진골 출신 김춘추는 김유신 등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라 이후 왕위는 무열왕의 직계 후손들이 독점하였다. 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은 무열왕의 아들로 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왕의 권위를 크게 강화시켰으며, 죽는 순간에도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겠다는 호국 정신으로 동쪽 바다 대왕암 가운데 상징적이나마 수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신문왕은 다른 진골 세력들의 반란을 누르고 전제 왕권을 확립해 나갔다.

  신라는 그간의 왕위 계승으로 인해 씨족간 암투가 이어져 상당한 국정 혼란이 있었으나, 이때에 이이르러 무열왕의 직계 자손에 의해 왕통이 이어짐으로써 왕실이 100여 년동안 안정되고 왕권이 크게 강화어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고 문화도 융성해졌다.

 

669년 문무왕 9년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

670년 문무왕 10년

  ◇4월-고구려 유민 검모잠(劍茅岑)이 한성에서 안승(安勝)을 왕으로 추대하고 부흥운동 전개.

  ◇8월-안승을 금마저(金馬渚)에 두어 고구려왕으로 책봉함.

672년 문무왕 12년

  ◇8월-신라, 고구려병과 합세하여 백수성(白水城) 근처에서 당군 격파.

673년 문무왕 13년

  신라, 김유신 죽음(575∼). 당군이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을 공략.

 

김유신 묘비와 묘역|경북 경주

 

새로운 제도의 마련

  통일 후 신라는 통일 국가에 걸맞게 여러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직속 기관인 집사부가 정치 의 중심부가 되었으며, 그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시중은 왕명을 받들어 행정을 집행하고 국정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였다. 집사부의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귀족 대표자들의 화백 회의의 기능이 축소되고, 그 의장인 상대등의 권한도 약화되었다.

  삼국 통일로 영토가 크게 넓어짐에 따라 지방 통치 조직도 새롭게 정비하였다.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밑에 군과 현을 두었으며,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말단 행정 구역인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9주 5소경

 

675년 문무왕 15년

  ◇2월-당나라가 유인궤(劉仁軌)를 계  림대총관(鷄林大摠管)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

  ◇9월-신라, 옛 고구려 남쪽 지역에   주군(州郡) 설치. 설인귀(薛仁貴)의 당군을 대파함.

676년 신라 문무왕 16년

  ◇2월-당,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김(이듬해 다시 신성으로 옮김), 의상(義湘)이 경북 영주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

681년

  신라, 문무왕 죽고(?∼), 신문왕(神文王) 즉위(∼692). 동해 대왕암(大王巖)에 문무왕릉 조성.

682년 신문왕 2년

  ◇6월-신라, 국학(國學)을 개편.

683년 신문왕 3년

  보덕왕 안승에게 소판의 위(位)와 김(金)씨의 성을 주어 서울에 머물게 함.

 

 

 

  주요 지방에는 특별 행정 구역으로 5개의 소경(小京)을 두어 일부 중앙 귀족과 옛 고구려·백제의 귀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것은 수도 금성이 한반도의 남동쪽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또 지방 세력의 성장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통일 신라는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9서당(誓幢)과 10정(停)을 편성하였다. 중앙군인 9서당은 신라인 외에 고구려인, 백제인, 말갈인도 포함된 부대였다. 서당이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직속부대로 중앙의 군단이었다. 지방의 각 주에는 1개의 군단인 정을 배치하였는데 특히 한주(漢州)에는 2개의 정을 두어 전국에 모두 10정을 두었다. 정(停)이란 원래 기치(旗幟) 등 특정한 표지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하여 군단·부대 등을 지칭하였다.

  통일 신라는 국가의 수입을 늘리고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토지 제도를 정비하였다. 통일 후, 신문왕 때에는 문무 관료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이전에 귀족에게 주었던 녹읍을 없앴다. 그리고 농민들에게도 정전을 주어 경작하게 하고 국가에 조세를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후에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되었고 귀족들은 이를 토대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관료전-관리들이 복무하는 대가로 받은 토지.

녹읍(祿邑)-귀족들은 수확물의 일부와 특산물을 거두었고, 주민의 노동력도 부릴 수 있었다.

 

687년 신문왕 7년

  신라, 전국을 9주(州) 5소경(小京)으로 편성.

 

692년

  ◇7월-신라, 신문왕 죽고(?∼), 효소왕(孝昭王) 즉위(∼702). 강수(强首) 죽음,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702년

  신라, 효소왕 죽고(?∼), 성덕왕(聖德王) 즉위(∼737), 중 의상 죽음

 

 

 

 

 

 

[2] 통일 신라의 대외 교류는 어떠하였나?

 

활발한 대외 교류

  당의 침략을 물리친 후 통일 신라 사회가 안정되면서 당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공식 사절을 비롯하여 유학생, 승려, 상인 등의 왕래와 문물 교류가 빈번해졌으며, 해상 무역도 번성하였다. 신라는 당과의 교류를 통해 당의 선진 문화와 서역 문화까지 받아들였으며, 당으로부터 '군자의 나라'로 칭송을 받았다.

  통일 후, 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무역량의 비약적인 증가로 신라의 경제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통일 전에는 주된 수출품이 토산 원료품이었으나, 통일 후에는 금·은 세공품, 인삼 등으로 바뀌었다. 특히, 신라의 수출품 중에서 '신라 칼'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704년 신라 성덕왕 4년/ 발해 고왕 6년

  ◇3월-김사양, 당에서 돌아와 최승왕경을 받쳤다.

  ◇김대문이 한산주(漢山州-지금의 서울 부근) 총관이 되었다.

723년 성덕왕 22년

  신라, 처음으로 왜국에 사신을 보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733년 성덕왕 32년

  신라, 당나라의 패강(浿江) 이남 영유를 승인.

735년 신라 성덕왕 34년

  ◇2월-당, 패강(浿江-대동강) 남쪽을 신라 영토로 승인하였다.  

 

  

금제 여래 좌상|경주 황복사 3층 석탑 출토

 

 

  

통일 신라의 토용|문인상(문인)과 남자상(오른쪽), 남자상을 서역인처럼 표현한 것은 서역 간에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당에서 진귀한 고급  비단과 옷, 책, 공예품 등을 수입하였는데 대개가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 아라비아 상인들도 울산항을 통해 진귀한 보석, 모직물, 향료 등의 남방 물산을 들여와 신라 귀족들의 사치심을 조장하였다. 이리하여 흥덕왕 때에는 '진귀한 외래품만을 숭상한다.'고 하여 사치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일도 있었다.

  당으로 가는 바닷길로는 통일 전부터 이용하였던 당항성에서 산둥 반도로 가는 길과, 울산만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을 지나 흑산도 부근에서 산둥 반도나 남중국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울산항은 당시 국제 무역항으로서 크게 번성하여 아라비아 상인까지도 내왕하였다. 또 신라인들이 자주 당을 왕래함 에 따라 산둥 반도와 화이허(황하) 하류 일대에는 신라인 마을인 신라방이 생기고, 신라소라는 감독 관청과 신라원이라는 절까지 있었다.

  종교나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신라 유학생들이 당에 파견되었다. 의상은 당에서 화엄종의 교리를 배우고 귀국하여 신라 화엄종을 열었다. 그 밖에 원측은 불교 이론을 한 단계 높여서 당의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혜초는 당을 거쳐 인도에 가 순례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썼다.

  유학생들 중에는 당의 교육 기관인 국자감에서 공부하여 당의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김운경, 최치원 등이 유명하였다. 최치원은 뛰어난 문장으로 당에서도 이름을 떨쳤으며 시문집 '계원필경'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이 책은 저자의 명문만을 가려 넣은 동방 최고의 문집으로 일컬어진다.

 

 

737년

  신라, 성덕왕 죽고(?∼), 효성왕 즉위(∼765).

742년

  신라, 효성왕 죽고(?∼), 경덕왕 즉위(∼765).

751년 신라 경덕왕 10년

  신라,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754년 신라 경덕왕 13년/발해 대흥왕 18년

  황룡사 종을 수리하였다.

756년 신라 경덕왕 15년

  발해, 돈화(敦化) 동모산(東牟山)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천도.

759년 신라 경덕왕 18년

  신라 국학을 대학감(大學監)으로 개칭.

  

신라방과 신라·발해의 무역·교통로

 

  신라는 당과의 관계가 개선된 이후, 귀족의 자제를 당에 보내어 대학에 입학시켜 공부를 하게 하였다. 일종의 국비 유학생으로 이들 중에는 6두품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은 10년간 유학 생활에서 풍부한 학문적 지식을 쌓고 귀국하였지만, 신분적인 제약 때문에 관직 승진이 제한되는 골품제의 모순을 앞장서서 지적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불교는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의상, 원효를 비롯한 신라 승려들이 저술한 책들이 일본 불교계에 널리 읽혔다. 의상과 그를 도운 선묘 이야기가 일본에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원효는 일본 불교계에서 크게 존경을 받았다.

 

 

 

 

765년

 신라, 경덕왕 죽고(?∼), 어린 나이의 혜공왕(惠恭王) 즉위(∼780). 신라 권력 투쟁 시작됨.

 768년 신라 혜공왕 4년

  당나라, 귀숭경, 육정, 고음 등을 신라에 보내어 왕을 책봉

  신라, 대공(大恭)의 난 발생. 5도(五道) 주군(州郡)의 96각간(角干)이 서로 싸움. 대공 피살.

 770년 신라 혜공왕 6년

  신라,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신라인들이 당과 무역할 때

이용하였던 견당 무역선 모형

    발해의 돌사자상|중국 길림성

     발해의 강한 힘을 보여 준다.

   불국사|경북 경주  불교 세계의 이상을 표현하였다.

 

 

[3] 발해는 왜  '해동성국'이라고 불리었나?

대조영의 발해 건국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은

 여러 갈래로 분산되었다. 일부 귀족들과 백성들은 당으로 끌려가기도 하였으나, 많은 유민들이 당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당의 군대와 안동 도호부를 요동 지방으로 몰아 냈다.

  때마침 당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던 거란의 추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요서 지방에 있던 대조영(大祚榮)은 이를 틈타 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을 이끌고 랴오허 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은 말갈인 부대를 격파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뒤쫓았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당군을 격파하고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모아 길림성의 동모산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발해를 세웠다(698년).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 하였으나, 당나라가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면서부터 발해라는 구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문에 중국이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는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발해를 고구려로, 발해 왕을 고구려 왕으로 칭하여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발해의 주민은 주로 고구려인과 말갈인이었다. 지배층의 핵심은 고구려인이었고, 피지배층은 주로 말갈인이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건국으로 우리 역사는 통일 신라와 발해가 양립하는 남북국(南北國)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696년

  발해(渤海), 고구려 유민과 속말 말갈을 통합.

698년

  발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이 진(震)을 건국.

713년

  발해, 국호 진(震)을 발해로 고침.

719년

  발해, 고왕 대조영(大祚榮)이 죽고(?∼), 무왕(武王) 즉위(∼737).

 

 

 

 

정효 공주 묘실|중국 길림성 화룡현

 

해동성국

  건국 후,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정신이 뚜렷했기 때문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과 신라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발해는 북쪽으로 돌궐과 통하고 바다 건너 일본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

  당은 신라와 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했기 때문에 발해 무왕은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안정을 회복한 문왕 때에는 대외 정책을 바꾸어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발달한 문물 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에는 발해와 신라 사이에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신라 국경에서 발해의 동경 용원부까지 역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두 나라 사이에 어느 정도 교류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발해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9세기 전반 선왕 때였다. 이 무렵 발해는 당에 유학생을 보내어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말갈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요동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발해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헤이룽 강,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영흥 지방에까지 이르렀으며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되찾았다. 그러므로 만주 지역이 계속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로 이어졌다.

 

 

 

737년

  발해, 무왕 죽고(?∼), 문왕 즉위(∼793).

793년

  발해, 문왕 죽고(?∼), 대원의(大元義) 즉위(∼794).

794년

  발해, 대원의 피살되고(?∼), 성왕(成王) 즉위(∼795). 국도를 동경(東京)에서 다시 상경 용천부로 옮김.

795년

  발해, 성왕 죽고(?∼), 강왕(康王)이 즉위(∼809).

809년

 발해, 강왕 죽고(?∼), 정왕(定王) 즉위(∼813).

813년

  발해, 정왕 죽고(?∼), 희왕(僖王) 즉위(∼817).

817년

  발해, 희왕 죽고(?∼), 간왕(簡王) 즉위(∼818). 연호를 태시(太始)로 함.

 

 당시 중국에서는 발해를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을 가진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만주에서 세력을 떨쳤던 발해는 9세기 후반부터 국력이 약화되어 당이 망한 뒤 916년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요를 세운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였다(926년).

  

전성기 발해의 영역

 

818년

  발해, 간왕 죽고(?∼), 선왕(宣王) 즉위(∼830).

830년

  발해, 선왕 죽고(?∼), 대이진(大彛震) 즉위(∼858).

858년

  발해, 대이진 죽고(?∼), 대건황(大虔晃) 즉위(∼871).

871년

  발해, 대건황 죽고(?∼), 대현석(大玄錫) 즉위(∼892).

  

 

   

 치미|중국 길림성 영안현 동경성 출토    보상화 무늬 벽돌|상경 용천부 출토

 

발해의 정치 제도

  발해는 나라의 기틀을 다진 뒤, 독자적인 연호를 쓸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면서 정치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당의 문물 제도를 받아들여 세련된 제도를 갖추는 데 힘을 기울였다.

  중앙에는 왕 밑에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의 3성이 있었고, 그 아래에 6부가 있었다. 발해의 3성은 외형상 당의 제도를 모방하였으나, 운영 방식은 독특하였다. 즉 3성은 정당성을 중심으로 운영하였고, 정당성 아래에 6부를 두어 나라의 일을 나누어 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일은 귀족들이 정당성에 모여서 회의를 열어 결정하였다.

  지방 행정 구역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특히 5경은 상경을 중심으로 하여 5도의 교통망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말단에 있는 촌락은 토착 세력가에 의해서 다스려졌다. 이것은 고구려 계통의 지배층이 말갈의 전통적인 사회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두 민족 사이의 조화를 꾀한 것이었다.

 

893년

  발해, 대현석 죽고(?∼), 대위해(大瑋해) 즉위(∼906).

 

906년

  발해, 대위해 죽고(?∼), 대인찬 즉위(∼926).

 

926년 대인찬

  발해, 거란족의 침입을 막지 못해 멸망(698 ∼).

  

 

 

 

 

발해 멸망의 시대적 배경-10세기 초의 동아시아는 중국이 5대·10국의 혼란기였고, 한반도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발해는 이러한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성장한 거란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상경성 제1궁전 및 회랑 터|궁전 기단 아래쪽으로 회랑 주춧돌이 ㄴ자   형으로 돌아간다.

 

2  신라의 동요와 후삼국의 형성

 

  8세기 후반 이후 신라는 중앙의 진골 귀족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심해지고, 왕권이 동요되어 각 지방에서도 호족 세력이나 해상 세력이 성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진 농민들이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대한 사람들이 나라를 세워 후삼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금동제 용머리 당간|경북 영주 출토  통일 신라 말기의 것으로, 지방 세력의 상징을 반영하고 있다.

  

 

 견훤 산성|경북 상주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관련 있는 것으로 전해 진다.

 

 

[1] 신라 말기에 지식인들과 지방 세력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나?  

 

흔들리는 신라 사회

  7세기 후반에 삼국을 통일한 후 번영을 계속하던 신라는 8세기 후반부터 귀족들의 권력 다툼에 휘말리게 되었다. 소수의 진골 귀족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왕과 귀족 사이에, 그리고 귀족들 서로 간에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국가는 이를 통제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권력 다툼은 혜공왕 때 시작되었다(768년).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귀족들의 다툼이 시작되어 결국 혜공왕은 죽음을 당하였다. 신라가 중앙 집권국가로 모습을 갖추게 하였던 내물왕 계의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무열왕 계의 왕위 세습이 끊어지고  후손이 졌다. 이후 신라에서는 왕위 다툼이 심해져서 150여 년 동안에 20명의 왕이 바뀌는 큰 혼란이 일어나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때에 지방에서도 반란이 이어졌다. 9세기 전반에는 웅주(공주) 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고(822년), 청해진을 지키던 장보고도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 모두가 중앙에서 벌어진 왕위 다툼과 관련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새로 등장한 지방 세력들

  귀족들 간의 격심한 왕위 다툼은 신라의 전통적인 신분 질서인 골품제도를

 

780년 신라 선덕왕 1년

  ◇4월-이찬 김지정(金志貞)의 반란. 혜공왕과 왕후 살해됨. 김양상(金襄相)이 김지정을 죽이고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785)

785년

  신라, 선덕왕 죽고(?∼), 원성왕(元聖王) 즉위(∼799). 9주(州)의 총관(總管)을 도독(都督)으로 고침.

788년 신라 원성왕 4년

  신라,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함

798년

  신라, 원성왕 죽음(?∼).

799년

  신라, 소성왕(昭聖王) 즉위(∼800).

800년

  신라, 소성왕 죽고(?∼), 애장왕(哀莊王) 즉위(∼809).

801년 애장와 2년

  신라, 5묘(五廟)의 제(制)를 개정. 탐라국(耽羅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뒤흔들어 사회의 혼란을 가져왔다. 신라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6두품 세력과 지방의 호족 세력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회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었다.

  6두품 세력은 진골 위주의 사회 체제에 특히 반발을 보인 계층이었다. 그들은 중앙 귀족이면서도 관직 승진에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골품 제도의 모순을 앞장서서 비판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고 하였다. 6두품 출신인 최치원이 정계를 떠나 유랑 생활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정치 감각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추구하였다.

  한편, 중앙에서 진골 귀족들이 서로 다투는 동안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 온 호족들이 진골 귀족 중심 사회를 타도하고자 나섰다. 이들 호족 중에는 촌주 출신이 많았으나,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온 세력이나 해상 세력, 군사 세력도 있었다.

  촌락의 행정을 맡고  있던  촌주들은

 

802년 신라 애장왕 3년

  신라,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 창건. 3층석탑 건립.

 804년

  신라, 왜국의 국사(國使)가 와서 황금 3백 량을 바침.

805년

  신라, '공식(公式) 20여조(條)'를 반포.

809년

 신라, 김언승이 애장왕을 살해하고(788∼), 헌덕왕(憲德王) 즉위(∼825).

 

                               장보고 영정 

청해진 건물 터

호족의 성터|광주 무진

 

일반 농민들보다 많은 토지와 소, 말 등의 가축을 소유하여  경제력을  키울수 있었다. 호족들은 촌락민을 동원하여 촌락 주위에 성을 쌓고 자신의 군대를 거느리면서 스스로 성주나 장군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이들은 지방을 직접 다스리면서 관리를 두어 세금을 거두었다. 그리고 농민 세력을 모으는 한편, 선종 승려나 6두품의 지식인을 맞아들이면서 통치력을 길렀다. 그리하여 호족들은 신라 정부에 도전하면서 점차 새로운 사회를 준비해 나갔다.

 

  

청해진 전경|전남 완도

 

819년 현덕왕 11년

  신라, 사방에서 초적(草賊)이 일어남. 당나라에 군사를 보내어 이사도(李師道)의 난 평정을 지원.

 822년 현덕왕 14년

  ◇3월-신라, 웅천주 도독 김헌창(金憲昌)의 난 일어남. 실패하여 김헌창 자살.

826년

  신라, 헌덕왕 죽고(?∼), 흥덕왕(興德王) 즉위(∼836).

828년 흥덕왕 3년

  ◇4월-신라, 장보고(張保皐)가 완도에 청해진을 일으켜 대사(大使)에 임명됨.

836년

  흥덕왕 죽고(?∼), 희강왕(僖康王) 즉위(∼837).  

  

성주사 터 전경 및 출토된 막새기와|충남 보령

 

[2] 신라는 왜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는가?

 

온 나라를 뒤흔든 농민 봉기

  신라 말의 사회 혼란은 9세기 말 진성 여왕 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중앙 귀족들은 부패하고 사치와 향락에 젖어 있었다. 나라 안의 여러 주·군에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 나라의 창고는 비고 재정이 궁핍해졌다. 이에 왕이 지방에 관리를 보내어 독촉하였으나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최치원이 진성 여왕에게 개혁안을 건의한 것은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러한 때에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나돌아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비참하였다. 농민들은 굶주린 끝에 고향을 버리고 떠돌거나 도적 떼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9세기 말, 농민들은 전국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중앙 정부에서 재정 부족을 이유로 관리를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자. 그 동안 억눌려 왔던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조세를 거부하고 떼를 지어 각 지역의 관청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국가의 통치 질서를 위협하는 반란군으로 변한 것이었다.

  상주 지방을 근거로 하여 원종과 애노가 일어났고, 그 밖에 북원(원주)의 양길, 죽주(죽산)의 기훤, 완산주(전주)의 견훤, 그리고 양길의 부하인  궁예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838년

  ◇1월-희강왕 자살하고 민애왕(閔哀王) 즉위(∼839).

  ◇2월-김양(金陽)이 청해진에서 반란.

839년

  ◇윤1월-신라, 민애왕 피살되고(?∼),    ◇4월-신무왕(神武王) 즉위.

  ◇7월-신무왕 죽고(?∼), 문성왕 즉위(∼857).

846년 문성왕 8년

  ◇봄-신라의 장보고 반란, 무주인 염장(閻長)에게 피살.

857년

  신라, 문성왕 죽고(?∼), 헌안왕(憲安王) 즉위(∼861).

861년

  신라, 헌안왕 죽고(?∼), 경문왕(景文王) 즉위(∼875).

875년

  신라, 경문왕 죽고(?∼), 헌강왕(憲康王) 즉위(∼886).

877년 헌강왕 3년

  고려의 태조 탄생(∼943).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 호족들 중에는 농민 봉기를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점차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무기를 갖추고 차츰 힘을 모아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지방 세력가로 성장하여 중앙 정부의 위협이 되고 있었다.

 

새로운 사상의 유행

  신라 말에는 사회가 변화하면서 사상도 바뀌어 불교의 새로운 종파인 선종(禪宗)이 크게 발전하였다. 교종(敎宗)이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여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발전한데 비하여 선종은 교리보다는 각 개인의 마음 속에 있는 불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며 정신 수양을 통한 해탈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신라 말에 이르러 왕실보다도 지방 호족들이 선종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선종은 지방의 호족들이 백성들을 포섭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선종은 전통적인 권위를 부정하였으므로 호족과 백성들의 환영을 받아 신라 말에는 9산(山)이 성립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도선에 의하여 풍수지리설이 널리 보급되었고, 최치원 등 유학자들도 선종과 풍수지리설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신라 말에는 선종, 유교, 풍수지리설이 서로 결합되어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신라, 문하시중 강청(姜淸) 출생

886년

  신라, 헌강왕 죽고(?∼), 정강왕(定康王) 즉위(∼897).    

889년 진성왕 3년

신라, 원종(元宗)·애노(哀奴)의 난 일어남.

892년 신라 진성왕 6년

  ◇견훤(甄萱), 완산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무진주(武珍州)에서 스스로 왕을 칭함(후백제 건국)

895년 진성왕 9년

  ◇8월-궁예(弓裔),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내외 관직을 설치하였다.(후고구려 건국)

897년

  신라, 진성여왕이 효공왕(孝恭王)에게 선위(禪位).

898년 효공왕 2년

  ◇7월-궁예, 송악부(松岳部)로 본거를 옮김.

899년 효공왕 3년

  북원(北原)의 양길이 궁예를 공격하다가 대패.

900년 신라 효공 4년

  ◇견훤, 완산에서 후백제(後百濟) 왕이라 자칭하고 각 관직을 둠

 

  특히 풍수지리설이 인간의 길융화복이 산천이나 지세의 영향을 받는다는 새로운 사상의 등장과, 문자를 통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사색하여 마음 속에 있는 진리를 깨달아 정토(淨土)에 살 수 있다는 선종과 함께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한 가닥 희망으로 작용하며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계의 변화는 중앙의 6두품 세력과 지방의 호족 세력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후삼국 시대의 개막

  9세기 말, 골품제도의 모순으로 귀족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고, 이러한 분열은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다. 더구나 농민들의 봉기는 신라의 거의 모든 지역을 휩쓸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세력을 크게 모으고 나라를 세우는데 성공한 사람은 견훤과 궁예였다.

  견훤은 상주 출신으로, 본래 서남 해안을 지키던 군인이었다. 때마침 전국 여러 곳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여 나라를 뒤흔들자, 그는 황해안의  해상 세력과 도적떼 등을 자신의 군사 기반으로 흡수하여 자립하였다. 견훤은 나주를 거쳐 무진주(광주)를 점령한 후 북상하여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년). 대외적으로는 남중국의 오월, 일본과 활발히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자 힘썼으며, 신라의 경주까지 쳐들어가 신라왕을 바꾸는 등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901년 효공왕 5년

  ◇8월-후백제, 대야성 공격, 궁예가 왕을 칭하고, 국호를 고려라 일컬음.

 

903년 신라 효공왕 7년

  ◇3월-왕건,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 10여 성을 공취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라 개명

 

904년 신라 효공왕 8년

  ◇7월-궁예, 백관을 설치,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칭함.

 

905년 효공왕 9년

  마진, 국도를 철원(鐵原)에 옮김.

 

906년 효공왕 10년

  마진, 왕건을 보내어 사화진(沙火鎭)에서 견훤을 대파.

   

   후삼국의 형세

 

 

  궁예는 신라 왕족 출신인데,  중앙의권력 다툼에서 희생되어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였다. 궁예는 처음에 양길의 부하로 있었으나, 점차 세력을 키워 자립한 후 강원도, 경기도 일대에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어 송악 지방의 왕건 부자를 포함한 중부 지역의 일부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송악을 근거로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901년). 전성기의 영토는 강원, 경기, 황해도 일대를 차지하여 발해와 맞닿았고 전라남도 서해안 일대를 점령하여 후백제를 견제하면서 신라를 침략하여 영토를 넓혀갔다.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친선 관계를 맺으며, 대내적으로는 관직 체계를 마련하는 등 나라의 모습을 갖췄다. 이리하여 신라는 분열되고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강종일(姜宗一) <은열공의 증조부>

강궁진(姜弓珍) <인헌공 강감찬 장군의 아버지>

 

907년 신라 효공왕 11년/발해 애왕 7년

  ◇4월-후량(後梁) 태조 주전충(朱全忠)이 당(唐)나라를 멸망시킴

909년 효공왕 13년

  ◇6월-마진, 왕건이 진도(珍島)·고이도(皐夷島)를 점령,

911년 효공왕 15년

  ◇1월-마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침.

914년 신덕왕 3년

  태봉의 왕건, 백선장군(百船將軍)이 되어 나주에 출진(出鎭).

 912년

  신라, 효공왕 죽고(?∼), 신덕왕(神德王) 즉위(∼917).

916년 신라 신덕왕 5년/발해 애왕 16년

  ◇12월-거란(契丹)의 아보기(阿保機), 황제를 칭함(거란 건국)

917년

  신라, 신덕왕 죽고(?∼), 경명왕(景明王) 즉위(∼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