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성립과 발전

 

 

 

  석촌동 돌무지무덤과 출토 유물|서울 송파   고구려 초기의 무덤 양식과 비슷한  백제 초기의 무덤이다.

 

 

1  삼국의 형성

 

    삼국 연맹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하여 종래의 군장이 정부의 귀족이나 관료로 흡수되고, 반면에 왕위가 세습되고 행정 제도 등을 정비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이와 함께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낙동강 유역에서 성장한 가야 연맹은 삼국과 함께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가야 고분의 내부 모습

경북 성주

  

 신라 금관

 경북 경주 천마총 출투 

 

무용총 수렵도|중국 길림성 집안

 

 몽촌 토성 전체 모습|서울 송파  초기 백제의 한강 유역에서

발전했을 때의 대표적인 토성이다.

 

[1] 고구려는 어떻게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나?

 

고구려의 성장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고구려의 지배 세력은 부여 계통의 이주민이었으며,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토착민들과 힘을 합하여 나라를 세웠다(기원전 37년).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의 국내성(통구 지방)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여 평야 지대로 진출하는 데 힘쓰는 한편, 중국의 침략을 여러 차례 물리치면서 발전하였다.

  고구려가 성장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태조왕 때부터였다. 이 때, 고구려는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물자가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옥저와 동예를 정복하였으며, 요동 지방으로도 진출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복 활동에 힘입어 5부족 중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할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다.

  그 후,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 전통을 가진 5부족을 동, 서, 남, 북 중의 5부로 바뀌었다. 그리고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꾸어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4세기 초 미천왕 때에는 남으로 대동강 유역을 확보한 후,  요동  지역으로

 

                                            

5부족-계루부, 절노부, 순노부, 소노부, 간노부

 

 

BC 37년

  주몽이 고구려 건국(∼후 668).

BC 19년

  고구려, 동명성왕 죽고(BC 58∼), 유리왕(琉璃王) 즉위.

BC 18년

  고구려, 유리왕 죽고(?∼), 대무신왕(大武神王) 즉위.

3년 유리왕 22년

  고구려, 졸본(卒本)에서 국내성으로 천도.

14년 유리왕 335년

  고구려, 양맥(梁貊)을 멸하고, 한(漢)의 고구려현을 공격.

22년 대무신왕 5년

  고구려, 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帶素王)을 죽임.

26년 대무신왕 9년

  고구려, 개마국(蓋馬國)을 멸함.

 27년 대무신왕 10년

  고구려, 낙랑을 멸함.

44년

  고구려, 대무신왕 죽고(4 ∼), 민중왕(閔中王) 즉위(?∼48).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그후 남쪽의 백제의 침략을 받고, 서북쪽의 전연(前燕)의 침략으로 환도성이 함락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소수림왕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국가 조직을 재정비하였으며, 우리 나라 최초의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받아들여(372년) 이전의 다양한 신앙을 불교 중심으로 통합하는 등 여러 정책을 실시하여 왕실의 권위가 높아졌다. 이로써 고구려는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새로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후 계속하여 발전하였다.

 

고구려의 정치 제도

  고구려에서는 왕족인 고씨(高氏)를 포함한 5부족의 귀족들이 최고 지배층을 이루었으며, 이들이 왕과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하였다. 이 중에서 계루부 출신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절노부에서는 왕비를 배출하였다.

  중앙의 정치는 대대로를 비롯하여 10여 등급의 관리들이 나누어 맡았다. 확대된 영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행정 구역은 수도와 전국을  각각  5부로 나누었으며, 고구려는 평지성과 산성을 각지에 쌓아 생활 근거지로 이용하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지방 장관은 중앙에서 파견하였는데, 행정과 군사를 함께 맡았다.

 

53년

  고구려, 모본왕이 살해되고(? ∼), 태조왕(太祖王)이 즉위(∼ 145).

 105년 태조왕 53년

  고구려, 한의 요동 6현을 공략하였다가 패퇴.

 179년

  고구려, 신대왕 죽고(? ∼), 고국천왕(故國川王) 즉위(∼ 197).

194년

  고구려, 진대법(賑貸法) 실시.

197년

  고구려, 고국천왕 죽고(? ∼), 산상왕(山上王) 즉위(∼ 227).

206년

  강유(姜維)1> 출생

209년 산상왕 13년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으로 천도.

227년

  고구려, 산상왕 죽고(? ∼), 동천왕(東川王) 즉위(∼ 234).

244년 동천왕 18년

  고구려, 위(魏)의 관구검이 침공.

1> 姜維(강유)

  206∼264년 자는 백약(佰約), 중국 천수(天水) 기현(冀縣) 출신으로 기성(冀城)에서 제갈량(諸葛亮)에게 항복한 후 공명(孔明)의 중원(中原) 정벌에서 여러 방면에서 활약했으며, 제갈양이 죽은 후 후계자로서 병법을 전수받아 스스로 자신을 믿어 아홉 번이나 중원을 쳤으나 실패하여 국력을 쇠퇴시켰다. 촉(蜀)이 망한 후 위(魏)에 거짓 항복을 하고 종회(鍾會)와 모반을 일으키나 실패하자 스스로 자결(59세)했다.

 

  수상의 위치에 있는 대대로는 귀족들이 선출하였고, 귀족 대표자 회의인 제가 회의에서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이것은 예전의 씨족 회의의 전통이 남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녀 산성|중국 길림성 환인  고구려의 첫 도읍지이다

 

248년

  고구려, 동천왕 죽고(209∼), 중천왕 즉위(∼270).

 270년

  고구려, 중천왕 죽고(224∼), 서천왕(西川王) 즉위(∼292).

 292년

  고구려, 서천왕 죽고(?∼), 봉상왕(烽上王) 즉위(∼300).

 300년

  고구려, 봉상왕을 폐하고 미천왕(美川王)을 세움. 봉상왕 자살(?∼).

331년

  고구려, 미천왕 죽고(?∼), 고국원왕(故國原王) 즉위(∼371).

342년 고국원왕 12년

  고구려, 전연(前燕)의 모용황이 침공으로 환도성 함락됨.

371년

  고구려, 백제군과 싸워 근초고왕 전사됨(?∼), 소수림왕(小獸林王) 즉위(∼384).

375년 소수림왕 5년

  고구려, 불교를 공인(公認).

 

[2] 백제의 성장 과정은? 

 

백제의 건국

  백제는 북쪽에서 내려온 고구려계의 유이민(流移民)들이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자리 잡으면서 마한의 한 나라인 백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기원전 18년). 백제의 건국 설화에 백제 왕실이 부여씨(夫餘氏)를 칭한 것이나, 서울 석촌동의 돌무지무덤이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무덤과 관련이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한강 유역은 일찍부터 철기 문화와 농경 문화가 크게 발달한데다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 좋은 곳이기 때문에 일찍 건국한 고구려보다 나라가 빨리 발전하였다.

 

백제의 성장과 중국 진출

  백제는 성장 과정에서 중국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여 그곳에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중국 역사서에 나와 있다. 또한 중국 군현의 압력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다.

  백제가 중국 세력의 간섭과 침략을 물리치면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3세기 중엽 고이왕 때였다. 고이왕은 밖으로 마한의 중심 세력인 목지국을 병합하고, 한반도의 중부 지역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안으로는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관리의 복색(服色)과 중요한 법령을 제정하는 등 국가 조직을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BC 18년 고구려 유리왕 2년

  온조(溫祚)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백제국(百濟國) 건국(∼후660).

BC 5년 온조왕 14년

  백제, 한산(漢山)으로 천도.

 8년 온조왕 26년

  백제, 마한(馬韓)을 멸하고 병합.

18년 온조왕 36년

  백제, 탕정성(湯井城)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축조.

28년

  백제, 온조왕 죽고(?∼), 다루왕(多婁王) 즉위.

37년 다루왕 10년

  백제, 후한의 낙랑군을 멸함.

128년

  백제, 기루왕 죽고(?∼), 개루왕(蓋婁王) 즉위(?∼165).

132년 개루왕 5년

  백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

166년

  백제, 개루왕 죽고(?∼), 초고왕(肖古王) 즉위(∼214).

 

  백제가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은 4세기후반 근초고왕 때였다. 왕위의 부자(父子) 상속이 이루어졌으며, 영토 확장에 나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시키고 황해도 일대를 장악하고, 남으로는 마한 전 지역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영토가 크게 확대되자, 백제의 국제적 지위도 한층 높아졌다.  

  백제는 가야, 왜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동진(東晋)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를 기반으로 백제는 황해를 건너 중국의 요서·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 진출하여 활동 무대를 해외로 넓혔다.

  이 무렵, 백제는 동진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사상을 통일하고자 하였으며, 이에 따라 높아진 왕실의 권위를 바탕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백제 전성기의 세력 범위(4세기)

 

214년

  백제, 초고왕 죽고(?∼), 구수왕(仇首王) 즉위(∼234). 신라의 요차성을 침.

234년

  백제, 구수왕 죽고(?∼), 사반왕(沙伴王)이 즉위하였다가 어리므로 폐위되고 고이왕(古爾王)이 즉위(∼286).

286년

  백제, 고이왕 죽고(?∼), 책계왕(責稽王) 즉위(∼298).

344년

  백제 비류왕 죽고(?∼), 계왕(契王) 즉위(∼346).

346년

  백제, 계왕 죽고(?∼), 근초고왕(近肖古王) 즉위(∼375).

371년 근초고왕 26년

  백제, 한산(漢山)으로 천도

375년

  백제, 근초고왕 전사하고(?∼). 근구수왕(近仇首王) 즉위(∼384).

385년

  백제, 침류왕 죽고(?∼), 진사왕(辰斯王) 즉위(∼392).

 

백제의 정치 제도

  백제는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면서 왕족인 부여씨와 8개의 귀족 가문이 중심이 되어 귀족 중심의 정치를 하였다. 이들은 정사암에 모여서 재상을 선출하였는데, 이는 귀족 회의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중앙에는 왕 밑에 좌평을 비롯한 16등급의 관리가 있어 나라 일을 맡아보았는데, 그 중에서 상좌평이 최고 책임자였다. 사비로 천도한 이후에는 6좌평 외에 새로 22부의 실무 관청을 두어 행정을 분담하였다. 그 후 수도는 5부로, 지방은 5방으로 각각 나누었으며, 지방에는 중앙의 관리를 보내 행정과 군사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지방의 요지에는 한때 22개의 담로를 두고 왕족을 보내 다스렸는데 이것은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였다.

                                       

좌평-오늘날의 장관에 해당

담로-지방 세력의 억제와 왕권 강화를 위해 왕족을 파견하였다.

 

 

392년

  백제, 진사왕 죽고(?∼), 아신왕(阿辛王) 즉위(∼405).

 405년

  백제, 아신왕 죽고(?∼), 전지왕 즉위(∼420).

 420년

  백제, 전지왕 죽고(?∼), 구이신왕(久爾辛王) 즉위(∼427).

 427년

  백제, 구이신왕 죽고(?∼), 비유왕(毗有王) 즉위(∼455).  

 455년

  백제, 비유왕 죽고(?∼), 개로왕(蓋鹵王) 즉위(∼475).

 

궁남지|충남 부여  백제 시대의 별궁-연못, 연꽃 무늬의 벽돌과 목제, 새 조각품 등이 발견되었다.  

 

[3] 신라가 국가 체제를 정비해 간 과정은?

 

신라의 건국과 성장

  신라는 진한의 여러 나라 가운데 경주 평야에 있던 사로국에서 시작하였다(기원전 57년).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고, 바다 건너 왜의 침략을 자주 받았기 때문에 성장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라가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춘 것은 4세기 후반 내물왕 때였다. 이 때, 신라는 진한의 여러 부족 국가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백제가 동진과 외교 관계를 맺자, 신라는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맺고 광개토 대왕의 도움으로 왜군을 격퇴하였다. 종래에는 박, 석(昔),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으나, 이때부터는 김씨가 왕위를 계속 이어 가게 되었다. 그리고 왕호도 대군장이라는 뜻을 가진 '마립간'을 사용하였다.

 

BC 57년

 신라, 혁거세 거서간 즉위. 왕호를 거서간,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칭함.

BC 37년

 신라, 경성(京城)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칭함.

BC 27년

 신라, 천일창(天日槍)이 왜 땅으로 가고, 신라의 도공이 왜에 건너가서 신라식 도자기 제작.

BC 19년

 신라, 석탈해(昔脫解) 탄생.

BC 14년

 신라, 병선 100여 척으로 왜구 격퇴.

AD 4년

신라, 혁거세거서간 죽고(BC 69∼),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즉위.

42년  신라, 이서국(伊西國)을 병합.

65년

 신라,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개칭. 신라, 김알지(金閼智) 탄생.

황남동 고분군|경북 경주

 

골품 제도와 정치 제도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지방의 부족장들을 그 세력의 크기에 따라 등급을 두어 중앙 귀족에 편입시키면서 독특한 신분 제도인 골품 제도를 마련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 기반을 정비해 나갔다. 골품 제도는 각  왕족은 성골(聖骨)·진골(眞骨)에 속하고, 일반 귀족들은 6두품(頭品) 이하의 각 두품에 속하였다.

  왕위는 처음에는 성골에서 차지하였으나 삼국을 통일한 무열왕부터는 진골 출신이 왕이 되었고, 3두품 이하는 평민 신분이 되었다. 신라인의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은 골품에 따라 결정되었다. 진골은 최고 귀족으로서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였고, 6두품도 귀족이지만, 6등급 아찬까지의 벼슬만 할 수 있었으므로 정치보다는 주로 학문과 종교 쪽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금관 장식|황남 대총 출토

 

77년 탈해왕 21년

  신라, 가야와 싸워 대승.

80년 파사왕 1년

  신라, 우시산국(于尸山國)·거칠산국(居漆山國)을 멸함.

108년 파사왕 29년

  신라, 비지국(比只國), 초팔국(草八國),다벌국(多伐國)을 병합.

134년

  신라, 지마 이사금 죽고(?∼), 일성 이사금(逸聖尼師今) 즉위(∼154).

184년

  신라, 아달라 이사금 죽고(?∼),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즉위(∼196).

230년

  신라, 내해 이사금 죽고(?∼), 조분 이사금(助賁尼師今) 즉위(∼247)

247년

  신라, 조분 이사금 죽고(?∼), 첨해 이사금(沾解尼師今) 즉위(∼262).

261년

  신라, 첨해 이사금 죽고(?∼),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 즉위(∼284). 

 

  신라는 귀족 대표들이 모인 화백 회의에서 국가의 중요한 일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화백 회의를 주재하는 상대등은 귀족 세력의 대표자로서 수상 의 지위에 있으면서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왕권이 강화되면서 상대등의 역할은 줄어들고 대신 왕의 직속 기구인 집사부의 중시가 장관으로서 행정을 총괄하였다. 747년(경덕왕 6) 중시의 명칭이 시중으로 바뀌어 고려 시대까지 쓰이었다.

  행정 구역은 수도를 6부, 지방을 5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삼국 시대에는 삼국 똑같이 씨족 사회와 부족 사회의 흔적이 계속 남아 있어 고구려는 제가 회의, 백제는 정사암 회의, 신라는 회백 회의가 있었는데, 특히, 화백 제도는 귀족 대표자 회의로 왕의 세습이 어려울 때는 만장일치로 왕을 선출하였고 진골 중심의 귀족 세력과 왕권사이에서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었다.

 

 

  

 천마도|경북 경주 천마총 출토

 

284년

  신라, 미추 이사금 죽고(?∼),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즉위(∼298).

307년 기림왕 10년

  신라, 국호를 계림에서 신라로 고침

310년

  신라, 기림 이사금 죽고(?∼), 흘해 이사금(訖解尼師今) 즉위(∼356).

 356년

  신라, 흘해 이사금 죽고(?∼), 내물 마립간(柰勿麻立干) 즉위(∼402).

402년

  신라, 내물 마립간 죽고(?∼),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즉위(∼417).

417년

  신라, 눌지(訥祗)가 실성 마립간을 죽이고(?∼) 즉위(∼458).

458년

  신라, 눌지 마립간 죽고(?∼), 자비 마립간(慈悲麻立干) 즉위(∼479).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 전파함.

479년

  자비 마립간 죽고(?∼), 소지 마립간(炤知麻立干) 즉위(∼500).

 

[4] 가야가 연맹 왕국 단계에 머무른 까닭은?

철의 나라 가야

  가야의 여러 나라는 낙동강 하류 유역의 변한 땅에서 세워졌다. 삼국이 중앙 집권 국가로서 국가 조직의 정비에 힘을 기울이고 있을 무렵에 가야는 연맹 왕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초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연맹을 주도하다가 고구려의 침입으로 주도권을 잃고, 후기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 연맹을 주도하였다.

  금관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질 좋은 철을 많이 생산하여 각종 철제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덩이쇠를 만들어 화폐와 같은 교환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낙동강 하류 지역의 해상 활동에 유리한 입지 조건을 기반으로 교역 활동을 하여 성장하였다.

  가야는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신라를 견제하면서 낙동강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신라에 가로막혀 번번이 좌절되었다. 고구려가 왜군과 싸우는 신라를 돕기 위해 5만의 군대를 보내어 가야 지역을 공격해 오자, 금관가야는 큰 타격을 입어 맹주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었다.

  그 후, 낙동강 서쪽의 여러 가야는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연맹체를 이루었다. 고령의 대가야는 질 좋은 철을 많이 생산하였고, 좋은 농업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대가야

 

42년 신라 유리왕 19년

  변진구야(弁辰狗耶)의 9간(九干)이 수로(首露)를 추대하여 금관가야(金官伽倻)를 건국.

94년 신라 파사왕 15년

  가야, 신라의 마두성을 포위

115년 신라 지마왕 4년

  가야, 신라의 남쪽 변경을 침략

199년

  가야, 수로왕 죽고(42∼), 거등왕(居登王) 즉위(∼253).

346년

  이품왕 즉위

 

 

 가야 연맹

 

는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5세기 이후 금관가야를 대신하여 가야 연맹체의 중심 세력으로 가야 맹주 역할을 하였다.

 

연맹 왕국 가야의 멸망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은 5세기 후반에 크게 성장하여 그 세력 범위를 소백산맥 서쪽까지 확장시켰다. 또,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 교통하였으며,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백제와 함께 구원하기도 하였다.

  6세기에 이르러 가야 연맹은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한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서 두 나라의 압력을 계속 받아 위축되었다. 이는 한강 유역을 신라에 빼앗긴 백제가 그 보상을 가야 지역에서 찾으려 하였고, 신라도 이에 자극을 받아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가야 지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백제와 신라가 이미 중앙 집권 체제를 마련하여 강력한 왕권 국가가 된 것에 비하여 가야 연맹은 각 소국이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유지했으므로 그 지배력을 집중시키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야 연맹은 지역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두 나라의 세력다툼을 위한 전장이 되었으며, 이들 나라의 압력을 받으면서 불안한 정치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가야 연맹은 두 나라의 침략으로 영토가 점차 축소되는 가운데 가야는 554년의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패한 백제군을 돕다가 상당히 많은 수의 군대를 잃은 데다가, 신라가 한강유역 경영을 마치고 가야 지역 병합을 시도하자, 신라  법흥왕 때에는 금관가야(532년)가, 진흥왕 때에는 대가야(562년)가 멸망하였다.

 

407년

  가야, 이시품왕 죽고(?∼), 좌지왕(坐知王) 즉위(∼421).

 451년

  가야, 8대 질지왕 즉위

 492년

  가야, 겸지왕 즉위

 

  

수로왕릉|경남 김해

  

고구려의 전성|5세기

 

  국력이 서로 비슷한 수준이었던 가야 연맹은 결국 통일왕국을 이루지 못한 채 멸망한 것이다.

  그러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발전하였던 가야 문화는 뒤에 신라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또, 가야의 일부 세력이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의 고대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가야 문화의 성격은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 등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고고학 유물 상으로 보나, 문헌 기록 상으로 보나 가야연맹은 백제나 왜국 등의 외부 세력에게 복속된 증거가 나타나지 않으며, 반면에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독자성은 확인되고 있다.

 

521년

  가야, 겸지왕 죽고(?∼), 구형왕(仇衡王) 즉위(∼532).

 522년

  가야왕, 신라에 청혼, 신라 이찬 비조부(比助夫) 누이를 보냄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

  ◇3월-금관국왕 구해(仇亥) 신라에 항복하였다. 신라는 여기에 금관군을 둠

562년

  ◇9월 이사부를 보내 가야를 토벌<대가야 멸망>

 

 

 

판갑옷과 투구|고령 출토    지산동 고분군|경북 고령

 

 

2  삼국의 발전

 

 

   삼국은 서로 대립, 협력하면서 국력을 확장하는 데 힘썼다. 고구려는 5세기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때에 만주 지방과 한반도 중부 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확보하였다. 고구려에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겨 행정 구역을 정비하는 등 중흥을 꾀해 국력을 성장시켰다. 신라는 6세기 이후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펴면서 한강 유역을 확보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광개토 대왕릉비

광개토 대왕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무령왕릉 복원도 백제는 무령왕 때에 국력을 점차 회복하였다.***

 

황룡사 9층탑 복원 모형

영토 확장의 꿈을 담고 있다. 

 

 

 

 

 

 

 

[1]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정복왕 광개토 대왕

   중국 세력과 싸움을 통해 성장한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이 즉위한 4세기 말부터 삼국 간의 세력 다툼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이것은 삼국의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광개토 대왕은 강화된 국력으로 영토를 크게 넓혀 고구려의 전성 시대를 열었다. 고조선이 한에 빼앗겼던 우리의 영토 요동을 600여 년 만에 되찾는 위업을 남겼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정벌하여 한강 이북의 땅을 점령하고,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5만의 군사를 보내 낙동강에서 물리쳤다. 이러한 업적은 만주 집안에 남아 있는 광개토 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

  광개토 대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고구려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왕은 장수왕이었다. 장수왕은 영토가 넓어지자, 중국의 남북조를 견제하는 동시에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기 위해, 남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수도를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옮기고(427년) 체제를 재정비하여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391년

  고구려, 고국양왕 죽고(?∼), 광개토왕(廣開土王) 즉위(∼413).

400년 광개토왕 10년

  고구려,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을 격파.

413년

  고구려, 광개토왕 죽고(374∼),

  ◇10월-장수왕(長壽王) 즉위(∼492).

414년 장수왕 2년

  고구려, 광개토왕비 세움. 장군총(將軍塚) 축성.

427년 장수왕 15년

  고구려, 평양으로 천도. 안학궁(安鶴宮) 건립.

475년 장수왕 63년

  ◇9월-고구려,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 개로왕 죽고(?∼),

  ◇10월-문주왕(文周王) 즉위(∼479).

491년 장수왕 79년

  ◇12월-장수왕 죽음(394∼).

492년

  고구려, 문자명왕(文咨明王) 즉위(∼514)

 

  이에 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였는데, 고구려는 3만의 군대를 보내 백제를 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삼국간의 세력 다툼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475년).

  이 때의 고구려 영토는 한반도의 중부 서쪽 아산만에서 소백 산맥을 넘어 동쪽 영일만을 연결하는 지역에까지 뻗쳤으다. 이러한 사실은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으며, 북쪽 영토는 요동을 포함한 만주 땅을 차지하여 동북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위세를 떨쳤다.

  당시 중국의 북위에서 여러 나라의 외교 사절을 접대할 때에 특별히 고구려 사신을 우대하였는데, 이로써 당시 고구려가 동북 아시아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강이식(姜以式) 장군 540년 전후 출생<추정>

 

 

 

 

519년

  고구려, 문자명왕 죽고(?∼), 안장왕(安藏王) 즉위(∼531).

531년

  ◇5월-고구려, 안장왕 죽고(?∼), 안원왕(安原王) 즉위(∼545).

545년

  ◇3월-고구려, 안원왕 죽고(?∼), 양원왕(陽原王) 즉위(∼559).

559년

  ◇5월-고구려, 양원왕 죽고(?∼), 평원왕  즉위(∼590).

582년 (고)평원왕 24년/신라 진평왕 4년

  고구려, 신라, 백제, 각각 수(隋)에 사신을 보냈다.

586년

  고구려, 평양의 대성산(大城山)에서 장안성(長安城)으로 천도.

 

 

도시조님 영정

진주강씨 도시조

姜以式(강이식)

   서기 598년(고구려 영양왕 9) 수 나라와의 제1차 전쟁인 「임유관 전쟁」에서 정병 5만을 이끌고 임유관(지금의 중국 산해관 부근)에서  수나라  군사30만 명을 섬멸시킨 고구려 대모달(지금의 야전사령관)이다.

  

 도시조 위패와 영정을 모신 봉산사(鳳山祠)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비봉산 아래에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0일 춘향제(春享祭)를 올린다.

 

[2] 백제는 중흥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는가?

 

천도와 국가 재건 노력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키는 등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5세기 후반에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직접적인 침략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에 백제는 중국의 북위에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수도인 한성을 비롯한 한강 유역을 빼앗겼으며, 개로왕이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수도를 웅진성(지금의 공주)으로 옮겨야 했고(475년),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다툼으로 왕권이 쇠약해지고, 한강 유역의 상실로 국력은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듯했다.

  이러한 때에 백제의 부흥을 꾀한 왕은 동성왕이었다. 동성왕은 신라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고구려의 침략에 대항하는 한편, 국력의 회복에 힘썼다.

  백제는 무령왕 때 중국 남조(南朝)의 양 나라와 국교를 맺고 문화 교류에 힘썼다. 또, 지방의 요지인 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하고, 고구려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펴 국력을 점차 회복하였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많은 유물들을 통해 당시 백제가 중국 남조와의 교류로 국력과 왕권이 크게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75년 문주왕 1년

  ◇10월-백제, 웅진(熊津)으로 천도.

477년

  백제, 해구(解仇)가 문주왕을 살해(?∼), 삼근왕(三斤王) 즉위(∼479).

479년

  ◇11월-백제, 삼근왕 죽고(?∼), 동성왕(東城王) 즉위(∼501).

501년

  ◇12월-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박加)가 동성왕 살해(?∼), 무령왕(武寧王) 즉위(∼523)

523년

  백제, 무령왕 죽고(462∼), 성왕(聖王) 즉위(∼554).

538년 성왕 16년

  백제, 사비성(泗비城)으로 천도.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함.

552년 성왕 30년

  백제, 불상과 경론(經論)을 왜에 보냄.

 

중흥을 위한 성왕의 노력

  백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이 다시 회복되어 본격적인 중흥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6세기 중반 성왕 때였다. 성왕은 수도를 비좁은 웅진성에서 넓은 벌판인 사비성(부여)으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 이 때, 중앙에 22개의 실무 관청을 두고, 수도에 5부, 지방에 5방을 두어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장려하고, 중국과 문물을 교류하였으며, 왜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가져 불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을 전해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왕은 신라와 힘을 합하여, 이전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오랜 숙원을 한때 이루었으나, 곧 동맹국인 신라의 공격을 받아 한강 유역의 땅을 신라에 빼앗겼다.

  이에 성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전사하여 중흥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백제는 신라의 배신을 응징하기 위해, 고구려와 힘을 합해 동맹국이었던 신라를 적으로 삼아 신라와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554년

  백제, 성왕 죽고(?∼), 위덕왕(威德王) 즉위(∼598).

598년

  백제, 위덕왕 죽고(525∼). 혜왕(惠王) 즉위(∼599).

599년

  백제, 혜왕 죽고(?∼), 법왕(法王) 즉위(∼600).

600년

  백제, 법왕 죽고(?∼), 무왕(武王) 즉위(∼641).

641년

  백제, 무왕 죽고(?∼), 의자왕(義慈王) 즉위(∼660).

647년 의자왕 7년

  백제, 신라의 무산, 감물, 동강 3 성을 침   

 백제 금동 대향로의 출토 때의 모습(국립 부여 박물관 소장) 충남 부여 출 토 백제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의 논에서 출토되었다.

 

[3]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의미는 무엇인가?

 

신라의 발전

  신라는 6세기 지증왕을 거쳐 법흥왕, 진흥왕에 이르면서 크게 발전하여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지증왕 때에는 나라 이름을 면모가 날로 새로워져 덕업이 사방에 떨쳤다는 뜻의 '신라'로 정하고, 왕호를 마립간에서 중국식 칭호인 '왕'으로 바꾸어 왕권을 강화하였고,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복하였으며, 정치 제도를 더욱 갖추어 나갔다. 선진 중국 문화와 정치 제도를 받아들여 전국적인 지방 제도인 주·군 제도를 정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면서 중앙 집권을 강화하여, 신라 사회는 한층 발전된 모습으로 바뀌었다.

  법흥왕 때에는 나라의 법령인 율령을 반포하여 나라의 지배 체제를 갖추고, 17관등과 모든 관리들이 입는 공복을 정하였다. 이로써, 다양한 세력들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통합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 병부를 설치하여 군사 지휘권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였으며,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진골 귀족회의의 대표자인 상대등을 두어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제 모습을 갖추었다.

  이 때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주 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또, 귀족 세력의 반대를 물리치고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삼아,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였으며, 김해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의 가야 땅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500년

  신라, 소지마립간 죽고(?∼), 지증왕(智證王) 즉위(∼514).

503년 지증왕 4년

  신라, 국호를 신라(新羅), 존호를 왕(王)이라 함.

512년 지증왕 13년

  신라,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침.

514년 법흥왕 1년

  신라,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520년 법흥왕 7년

  신라, 율령(律令) 반포.

527년 법흥왕 14년

  신라, 이차돈(異次頓) 순교.

529년 진평왕 51년(건복 46)

  ◇8월-김유신, 고구려 낭비성을 공파

536년 법흥왕 23년(건원 1)

  신라, 처음으로 연호(年號)를 세워 건원(建元)이라 함.

540년 진흥왕 1년(건원 5)

  신라, 법흥왕 죽고(?∼), 진흥왕(眞興王) 즉위(∼76).

 

 

진흥왕의 영토 확장

  왕뿐만 아니라 고위직 문무관이 죽으면 대표적인 치적이나 행적을 두 글자로 요약하여 시호를 짓는데 이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권장하고 징계하는데 의의가 있다. 앞서 지증왕, 법흥왕이 신라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지만, 진흥왕은 6세기 중반 때에 이르러 대외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여 삼국통일 이전 가장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왕이었는데, 진흥왕(眞興王)이란 시호와는 잘 어울리는 치적이었다, 진흥왕은 자장 대사의 건의로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능한 청소년을 양성하는 단체인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551년 진흥왕 12년(개국 1)

  신라, 개국(開國)이라 개원(改元). 백제·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

553년 진흥왕 14년(개국 3)

  신라,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566).

555년 진흥왕 16년

  ◇10월-신라 진흥왕 북한산을 순시하고 국경을 척정(拓定)하였다.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건립.

561년 진흥왕 22년(개국 11)

  신라, 창녕 신라 진흥왕 순수비 건립.

562년 진흥왕 23년(개국 12)

  신라, 대가야(大伽倻)를 멸함.

568년 진흥왕 29년(대창 1)

  신라, 황초령(黃草嶺) 신라 진흥왕 순수비와 마운령(摩雲嶺) 신라 진흥왕 순수비 건립

576년

  신라, 원화(源花)제도 시작. 진흥왕 죽고(534∼), 진지왕(眞智王) 즉위(∼579).

579년

  신라, 진지왕 죽고(?∼), 진평왕(眞平王) 즉위(∼584).

584년 진평왕 6년(건복 1)

  신라, 건복(建福)으로 개원(改元).

595년 진평왕 17년(건복 12)

  김유신 출생(∼673)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이전

 

  진흥왕은 이렇게 하여 국가 기반을  굳게 다진 후 이를 바탕으로 영토를 크게 넓혔다. 또한,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이어서,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고구려가 중국의 정세가 불안하여 대비하는 틈을 타 진흥왕은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다.

  이 무렵에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단양 신라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이다. 진흥왕은 국력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자신을 황제에 비겨 ‘태왕’ 또는 ‘짐’이라 하였으며, ‘개국’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다.

 

 

신라의 발전(6세기 

 

 

608년 진평왕 30년(건복 25)

  수나라에 고구려 정벌을 청함

632년

  신라, 진평왕 죽고(?∼), 선덕여왕(善德女王) 즉위(∼647).

634년 선덕왕 3년(인평 1)

  신라, 인평(仁平)으로 개원(改元).

643년 선덕왕 12년(인평 10)

  신라, 당나라에 고구려, 백제의 침략을 호소

647년 진덕왕 1년(태화 1)

  신라, 경주 첨성대(瞻星臺) 건립.

  ◇1월-선덕여왕 죽고(?∼), 진덕여왕(眞德女王) 즉위(∼654).

648년 진덕왕 2년(태화 2)

  신라, 백제의 21성 공략.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김인문(金仁門)이 당나라에 가서 백제 협공을 요청.

654년

  신라, 진덕여왕 죽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즉위(∼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