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의 시작

 

 

 

 

     첨성당|인천 강화   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1  선사 시대의 생활

 

 

  우리 민족의 생활 무대였던 만주와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부터이다. 우리 민족은 인종적으로는 몽고 인종에 속하고, 어족(語族)으로는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고대인이 남긴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볼 때, 선사 시대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 순으로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국가가 성립되어 고조선이 건국되었다.

           

 

염재 신농씨|중국 

 

바위그림|경북 고령  

동심원, 십자형 등의 기하학무늬가 새겨져 있다..

 

 

[1] 언제부터 한반도에 사람이 살았을까?

 

과거를 들여다 보는 거울

  과거와 현재, 다가올 미래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이며, 미래는 현재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상들이 살아온 모습을 그들이 남긴 유물, 유적을 통하여 바르게 이해하여 교훈을 얻어, 현재 벌어지는 일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우리가 과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다.

  먼 과거의 일은 문자로 기록된 당시의 역사책이나 오래 된 문서, 비석에 새겨진 기록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문자가 쓰이기 이전의 시대를 선사 시대라 하는데, 이때 살았던 사람들에 관해서는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을까? 그들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내어, 그것을 바탕으로 과학적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의 흔적은 그들이 살았던 집터나 쓰레기더미, 시신을 묻었던 무덤, 그리고 비바람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바위그림 등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기원과 삶의 터전

  만주와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였다. 지리적으로 살펴 볼 때, 구석기 시대에는 추운 빙기(氷期)와 따뜻한 간빙기가 여러 차례 번갈아 나타났다.

  이 당시에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 열도, 타이완 등이 모두 하나의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빙기가 끝난 후, 거대한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져 해안선이 변화되자,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은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북쪽으로는 대륙과 연결되고, 동쪽과 서쪽으로는 바다와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대한 해협을 건너 대마도와 마주하게 되었고 더 멀리 일본과도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황색 피부, 검은 색 머리 등의 신체적인 특징을 지녔으며, 인종적으로는 몽고 인종에 속하고, 어족(語族)으로는 터기 어, 퉁구스 어, 몽고어와 함께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남방계보다는 북방계와 관련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민족의 기틀을 형성하고, 주변의 여러 민족과 교류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2]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의 차이는?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인류가 뗀석기와 뼈, 연모 등의 간단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 시대를 구석기 시대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여러 곳에서 유적들이 발굴되어 약 70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부터 한반도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서의 구석기 시대 유적은 함경 북도 웅기군 굴포리를 비롯하여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처음에는 돌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다가, 점차 쓰임새에 따라 여러 가지 뗀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짐승과 물고기를 잡아먹었으며, 식물의 열매를 따먹고, 뿌리를 캐어 먹었다. 또, 계절에 따라 이동 생활을 하면서 자연 동굴이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주로 큰 강 유역이나 해안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며, 한반도 전 지역에 고루 퍼져 있다. 연대가 가장 이른 곳이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다.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간석기와 낚시, 바늘 등의 뼈 도구가 있다. 그리고 빗살무늬 토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살기에 편리한 강가나 바닷가에서 뼈낚시, 그물 등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였고, 돌창, 돌화살 등으로 사냥을 하여 생활하였다. 한편, 식물의 열매나 뿌리를 채집하여 먹는 생활을 하다가, 뒤에는 농사를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되었다.

  농경 생활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돌괭이로 땅을 일구고 조, 피 등을 가꾸어 돌낫, 뼈낫 등으로 추수를 하였으며, 돌갈판에 추수한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또, 가락바퀴로 실을 뽑고, 뼈바늘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였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씌운 움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같은 핏줄의 씨족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나아가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이루었다. 즉, 이들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이동하지 않고서도 한 곳에서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틀을 잡아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인구가 늘고 지역이 넓어지면서 경험이 많은 부족장이 농사, 사냥 등 생산 활동을 지휘하였다.

  따라서, 농경, 목축을 기반으로 하는 정착 생활은 인류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는 즉, 동물과 구별되는 혁신적 변화로 인류 문명을 탄생시켰다. <신석기 혁명>

 

자연과 영혼에 대한 생각

  선사 시대 사람들은 자연 현상을 영혼과 결부시켜 생각하였다. 그래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인간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해, 달, 산, 강, 동물, 큰 나무 등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으며, 특정 동물을 자기 부족의 수호신으로 생각하여 숭배하였다. 또, 이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예술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구석기 유물이 출토된 지역|경기 연천 전곡리

 유적(왼쪽), 충북 단양 수양개 유적(오른쪽)

 

북방식(탁자식) 고인돌|인천 강화                             남방식(바둑판식) 고인돌|전북 고창

 

BC 2800년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는 섬서성(陝西省) 기산(岐山) 아래로 흐르는 강수(姜水)가에서 살았으므로 그 성(姓)을 강(姜)씨라고 했다. 신농씨를 염제 곧 불꽃 임금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가 처음으로 불에 물을 끓여 먹는 방법을 가르쳤기 때문이며, 그는 음식을 불에 익혀 먹는 방법을 세상에 전하기도 했고, 또 농사짓는 법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으며, 온갖 식물을 맛보아 약초를 찾아내어 인류를 질병에서 구하는데 공헌하였다.

 

  중국의 고전 「회남자(淮南子)」라는 책에 보면, "신농은 백성들에게 오곡을 파종하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백 가지 약물의 맛이 보았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신농씨가 백 가지 약초를 맛보아 비로소 의학이 시작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약물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서 적으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 있다. 신농씨가 지었다고 하지만 저작 시기는 대략 동한(東漢)시대로 추측되며, 작자 또한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BC 2600년

  치우천왕이 배달나라 14대 임금(재위 109년 B.C. 2707∼2599)인 자오지 한웅 (桓雄)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기(史記)에 치우천왕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치우는 옛 천자(天子: 황제)이다." [蚩尤古天子]

" 치우(蚩尤)는 구리(九黎)의 임금이다." [九黎君號蚩尤是也]

  구리(九黎) =구이(九夷) = 동이(東夷) = 고대 한국

  중국의 사서「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神農亦世及之君末帝楡罔時同姓黎君蚩尤作亂’

 (염제 신농국 말기 (유웅국) 임금 유망(楡罔)에 이르러 같은 성을 가진 구리국 임금 치우가 난을 일으켰다.) *

이라 해서 14세 한웅인 치우천왕이 신농씨(神農氏)의 나라와 동성(同姓) 즉 강씨(姜氏)라고 고증하고 있습니다.

  단군 이전의 민족사 기술이 거의 없기 때문에 동이민족의 조상인 염제 신농씨(神農氏)라든가 동이족의 한 파인 묘족의 조상인 치우천왕이 우리 상고사에서 사라지고 중국 역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우리 상고사를 복원하게 되면 염제 신농씨(神農氏)와, 치우천왕이 강씨(姜氏)로 기술되겠지요.

 

 

 

[3] 청동기 시대에 달라진 사회 모습은?

 

청동기 시대의 시작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 만주 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처음으로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진 청동을 녹여 거푸집에 부어 필요한 도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청동기는 만들기가 어려웠고, 대량으로 만들만큼 재료도 충분하지 않아서 지배 계급의 무기나 장식품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청동기 시대의 생활도구는 여전히 돌이나 나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였다.

 

고인돌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은 족장의 무덤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하고 있는 거석 문화의 하나로,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이 수십 톤이 되는 것도 있다. 이 정도 규모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강력한 지배자가 등장하였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무덤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 조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와 달라진 생활 모습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구릉 주위의 골짜기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기 위하여 강을 끼고 있는 야산이나 구릉 지대에 살았다. 이 때의 집은 직사각형이나 원형의 움집으로, 움은 신석기 시대보다 낮아졌고, 집의 크기는 훨씬 커졌다. 그리고 마을의 규모도 신석기 시대보다 커졌다.

  이들은 단단한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이용하여 농경지를 넓히고, 또 고랑을 내고 김을 매면 생산량이 늘어난다는 것도 알았다.

  한편, 반달 돌칼로 곡식을 자르고, 맷돌로 곡물을 가공하기도 하였다. 주로 재

배된 곡식은 조, 보리, 콩, 벼 등이다.

 

청동기 시대의 사회 모습

  청동기 시대에 경제가 발전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신분의 상하가 나타나는 계층 사회가 성립되었다. 부족을 통솔하는 족장(군장)은 농업 생산이 증대함에 따라 재산이 불어나자, 청동제 무기를 만들어 이웃 부족을 정복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족장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 등 종교 의식도 주관하여 더욱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를 제정 일치 사회라고 한다. 족장이 죽으면 그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거대한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을 만들고, 청동검, 청동 거울 등을 함께 묻었다.

 

 

2  국가의 성립

 

 

   고조선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로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건국하였다.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더욱 강성하게 되었다. 고조선의 성립 이후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의 여러 나라가 세워졌다.

  

 

 

철제 농기구(따비)

밭을 가는 데에 사용되었다.

 

 

 

 

 

오리 토기|울산 하대 출토 삼한지역에서는 여러 가지 모양의 토기가 만들어졌다.

 단군 영정단군의 고조선 건국은 우리 나라의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1] 고조선 건국의 역사적 의의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

  청동기 문화가 발전됨에 따라 만주 요령(遼寧) 지방과 한반도 서북 지방에는 족장(군장)이 다스리는 많은 부족들이 나타났다. 단군은 이러한 부족들을 통합하여 우리 나라 최초 국가인 조선(朝鮮)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년). 근세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조선(古朝鮮)이라 부른다.

  단군의 건국 사실과 홍익인간의 건국 이념은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자긍심을 일깨워 주는 원동력이 되어 국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나라의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 것에서 선사 시대에 형성되었던 특정 동물을 숭배하는 신앙의 요소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비, 바람, 구름을 주관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서는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가 농경 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되었다는 것과 천손(天孫) 사상도 엿볼 수 있다. 

 

고조선의 성장과 변천

  청동기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고조선은 점차 정치·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기원전 4세기경에는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잇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거대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2세기경, 연나라에서 무리 1천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돌아온 뒤 서쪽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년). 이 시기에  철기 문화가 확산되면서 고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BC 2333년

  단군왕검(檀君王儉) 고조선 건국.  

 

BC 1122년

  은의 기자(箕子)가 조선에 들어옴. 8조금법(八條禁法) 제정.

 

BC 1000년

  강여상(姜呂尙)1>, 중국 주(周)나라 무왕을 도와 상의 폭군 주왕을 정벌함.

 

1> 太公望 呂尙(태공망 여상)

  본명은 강상(姜尙)으로, 주공의 선왕 태공이 기다린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리었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 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을 도와 상(商)의 폭군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나라의 패권을 수립하는데 큰공을 세워, 제(齊) 지역을 분봉(分封)받아 제나라 시조가 되었다.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문화와 도덕, 예법과 평화가 공존하는 이상주의 국가를 실현시켰던 전설적인 인물. 중국 최초로 이민족을 받아들이는 다민족 포용정치를 실시하여 후에 춘추 첫 패자가 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병서 육도(六韜)를 남겼다.

 

  또, 한반도 남부 지방  에 위치한 진국의 여러 나라와 중국의 한나라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어 부강해지면서 한나라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커졌다.

  이 때, 철기문화로 발전한 한나라는 대군을 보내어 수도인 왕검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은 막강한 한나라의 대군을 맞아 1년 동안 버티면서 잘 싸웠으나,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기원전 108년). 이와 함께 철기문화가 한반도 전역에 확산되었다.

 

고조선의 사회 모습

  고조선 사회는 생산력의 증가로 사유 재산이 늘어나면서 빈부의 차이가 생기고, 정치와 군사를 담당하는 지배 계층과 생산을 담당하는 피지배 계층이 생기게 되었다. 통치 조직이 확립되어 왕 밑에는 상, 대부, 장군 같은 여러 관직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도 제정되었다. 법률은 8개 조항이 있었는데, 다음의 3개 조항만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남을 다치게 한 자는 곡물로 갚는다.”

 “도둑질한 자는 잡아다 종으로 삼는다. 용서를 받으려면 많은 돈을 내야 한다.”

  이 법을 보면, 그때도 사람들의 생명(노동력)과 재산을 중시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BC 800년

  고조선의 수도를 왕검성에 정함.

 

BC 450년

  송화강 상류 일대에 부여(扶餘) 성립.

 

BC 400년

  철기문화 들어옴. 진국(辰國) 성립.

 

BC 323년

  중국의 연(燕)이 조선을 치려다 실패

 

BC 300년

  한문자(漢文字) 전래. 원3국시대 시작.  

 

BC 221년

  진(秦)의 중국 통일로 회하(淮河) 방면에서 동이(東夷)의 활동이 중단.

 

BC 209년

  조선의 준왕(準王)에게 연(燕)·제(齊)의 수 만 호(戶)가 피난옴.

 

BC 203년

  맥족(貊族)의 기병이 한(漢)을 도와 초(楚)를 공격.

 

태공망 여상 강태공이라 불리운다

 

 

[2] 철기가 보급되어 나타난 사회 변화는?

 

철기의 보급

  기원전 4세기경부터 우리 나라에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1세기경부터는 철기가 널리 보급되었다. 보급 초기에는 청동기도 함께 사용되었으나, 철은 주로 생활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데에 사용되었다. 점차 철이 많이 생산되고, 철을 단단하게 담금질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농기구로는 이전의 목기나 석기와 함께 삽, 괭이, 낫 같은 철제 농기구들을 사용하였다. 무기로는 칼, 창, 화살촉 등이 있었으며, 공구로는 끌, 톱, 도끼, 자귀 등이 있었다. 한편, 토기의 생산 기술도 발달하였으며,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의 토기가 만들어졌다. 

  

 

 

BC 202년

  기자조선이 패수(浿水)를 한과의 경계로 삼음.

 

BC 200년

  해모수(解慕漱) 설화·금와(金蛙) 설화 성립.

 

BC 195년

  기자조선에 요동의 위만(衛滿)이 망명해 옴. 준왕(準王)이 박사(博士)를 삼고 서계(西界)를 지키게 함.

 

BC 194년

  위만이 왕검성을 공략, 위만조선을 건국. 기자조선의 준왕이 남하하여 한왕(韓王)이 됨  

                                           비파형 동검

 

          세형 동검

 

 

철기 시대의 생활과 사회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경작지가 쉽게 개간되었으며, 농업 기술이 발달하여 농업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났고, 인구도 크게 늘어났다. 반면에, 부족 간에 서로 많은 식량을 차지하려는 다툼이 생겼고, 철제 무기를 전투에 사용하게 되면서 부족 간의 전쟁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에 따라,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는 새로운 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철을 잘 이용한 부족은 세력을 크게 키워 국가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으며,  철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직업의 전문화와 사회의 계층화가 더욱 뚜렷해졌다. 또, 중국이나 일본과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문화 교류를 하였다.

  철기 시대의 무덤으로는 널무덤과 독무덤 등이 있다.

  널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널을 넣은 것으로,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먼저 만들어지다가 남부 지역으로 퍼져 나갔는데, 특히 낙동강 유역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독무덤은 두 개의 항아리를 옆으로 이어 만든 것으로, 철기 시대 전기에는 소형이었다가 점차 커졌는데, 특히 영산강 유역에서는 대형의 독무덤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BC 190년

  위만왕이 진번(眞番)·임둔(臨屯)을 복속시킴.

 

BC 175년

  함흥 이화동 유적의 토광묘·동검(銅劍)·철기의 문화 형성.

 

BC 149년

  서홍 문무리 유적의 한국식 동검(韓國式銅劍) 관계 형성

 

BC 128년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호구(戶口) 28만을 데리고 한(漢)의 요동군에 귀부(歸附). 그 땅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

 

BC 128년

  한(漢), 창해군(滄海郡)을 폐지

 

 

 

 고조선 이후 한반도에 등장한 여러 나라

 

 

[3] 옥저, 동예 및 여러 나라의 정치와 사회 풍속은 어떠하였는가?

 

여러 나라의 등장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펼치다가 사라질 무렵, 그 주변 지역에서는 한민족의 또 다른 집단들이 부족 단위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각 세력은 다른 부족과의 연합 또는 전쟁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여 마침내 국가로 발전해 나갔다. 만주 송화강 유역에 부여와 고구려가 고조선에 이어 큰 국가를 형성하고, 한반도 북부 동해안 지방에는 옥저와 동예가 자리를 잡았다.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는 고조선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 의해 철기가 보급되면서 삼한이 더욱 발전하였다. 한강 이남 황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마한이 자리를 잡았으며, 마한에는 54개의 소국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馬韓)의 왕으로 행세했다고 한다.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에는 각각 12개의 소국이 있었다.

   

                       솟대|전북 남원

 

 

BC 108년

  위씨조선(衛氏朝鮮) 멸망. 한(漢)의 고조(高祖) 조선을 침공, 위만의 고조선을 멸하고 낙랑(樂浪)·임둔(臨屯)·진번(眞番)·현토(玄唾)의 4개군을 설치.

 

BC 82년

  고구려족이 임둔·진번군을 축출. 한이 낙랑군에 동부도위(東部都尉)·남부도위를 설치.

 

BC 75년

  고구려족이 현토군을 공격하여 서북쪽으로 축출.

 

BC 69년

  신라에 박혁거세(朴赫居世) 탄생.

 

BC 59년

  해모수(解慕漱)가 북부여(北夫餘)를 건국.

 

BC 58년

  동부여(東夫餘)에서 주몽(朱蒙) 탄생.

 

22년 고구려 대무신왕 9년

  부여, 대소왕의 동생을 옹립하여 갈사국(曷思國)을 건국.

 

494년 고구려 소지왕 16년

  ◇1월-부여,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

 

 

 

여러 나라의 정치 조직

  각 나라는 성장 과정에 따라 나름대로의 독특한 정치 조직을 갖추어 나라를 통치하였는데, 특히 부여와 고구려는 몇 개의 부족이 연합한 연맹 왕국이었다. 부여는 왕 밑에 짐승의 이름을 따서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이 있었다. 고구려도 5개 부족이 연합하여 왕을 세웠는데, 왕의 권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옥저와 동예에는 부여와 고구려처럼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의 칭호를 사용하는 지배자가 없었고, 대신 각 부족을 읍군, 삼로라고 불리는 군장들이 다스렸다. 삼한의 소국들도 신지, 읍차 등으로 불리는 군장들이 정치를 맡았으며, 제사장은 소도(蘇塗)라는 특별 구역에 머무르면서 제천(祭天) 행사를 담당하였다. 이때에 와서 삼한은 제·정 분리 사회가 되었다.

 

법률과 풍속

  나라마다 사회 관습, 종교 의식 및 법률이 있었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법으로는 살인이나 남에게 상해를 입힌 죄, 도둑질에 대한 벌칙 등이 있었는데, 대체로 복수주의라는 특징을 지닌 것으로 이는 고조선의 법과 비슷하였다.

  부여에는 생전에 데리고 있던 노복들을 함께 묻는 순장(殉葬)과 껴묻거리를 묻는 장례 관습이 성행했고, 흰옷을 즐겨 입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험한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았으므로 식량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변 나라들을 침략하여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무예를 중히 여겨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 하였으며, 수렵 대회, 씨름 대회 등을 열어 신체를 단련하였다. 또, 고구려에는 서옥제, 일종의 데릴사위 제도가 있었고, 무덤 속에 금, 은 등을 묻는 풍습이 있었다.

  옥저(沃沮)와 동예(東濊)의 언어와 풍습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았다. 옥저는 땅이 기름져서 농사가 잘 되었으나,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삼베와 소금, 어물 등의 특산물을 바쳤다. 또, 옥저에는 어린 며느리를 맞이하는 풍속,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고, 한 가족의 뼈를 함께 매장하는 가족 공동 묘 관습이 있었다. 동예는 산천을 중히 여겨, 각 부족이 소유한 산천에는 다른 부족의 출입을 막았다. 또, 읍락(邑落)끼리는 서로 침범하지 않았는데, 이를 어기면 소, 말 등으로 갚아야 하는 "책화"라는 법속이 있었다. 그리고 같은 씨족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았는데 이를 족외혼이라 하였다.

  삼한에서는 특히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이 발달하였다. 한편, 변한(弁韓)에서는 철을 많이 생산하여 마한, 한의 군현, 일본 등으로 수출하였으며, 이를 화폐로 사용하기도 하였다.